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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주목할 만한 작품들 02

쥐가 물러나고 소가 다가오는 기축년 새해가 밝았다. 올 한 해에는 어떤 작가 어떤 작품에 주목해 보면 좋을까? 여기 열 작품을 꼽아 보았다..

2009-01-07 서찬휘

이어서..

5.「안녕, Pi」
신유하 / 『이슈』 연재 중 / 대원씨아이 / 단행본 4권 발매 중

안녕, Pi 이미지


신유하 씨가 『이슈』에서 「학교방위 365일」을 마쳤을 때 든 생각은 ‘그림 참 보기 편하게 그린다. 오히려 이렇게 그리기가 쉽지 않을 텐데’였다. 귀엽고 발랄하고 상큼한 필체와 색채, 적당히 핀트 나간 등장인물들의 왁자지껄 대소동. 하지만 「학교방위 365일」의 약점은 ‘거기까지’였다는 데에 있었다. 똑같은 얼굴인 애를 잘나가지만 멋대로 사라진 학생회장 자리에 앉힌다는 소재가 딱히 독특한 것도 아니거니와 팬터지도 아닌 이상 학생회에 결정권한이 그리 많다는 것도 일본 만화에서 심심하면 등장하는 과대망상설정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그런 신유하 씨가 후속작인 「안녕, Pi」를 발표했을 때엔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게다가 신작 연재 발표 전인 2006년 7월, 『이슈』 9월호(7월 25일 발행)에 에스프리 형식으로 가볍게 실었던 「Summer Vacation - 즐거운 여름」의 귀여운 소년과 병아리가 주인공이었던 것. 귀엽고 편안한 그림은 여전한데 어떤 이야기로 풀어갈까. 이윽고 같은 잡지 2006년 11월호(9월 25일)에 「안녕, Pi」가 첫 선을 보이면서 걱정은 곧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전생의 강한 인과로 말미암아 현세에 다시 주인공 주변의 인연으로 태어난 인물들의 이야기를 예의 그 그림으로 예쁘고 말랑하면서도 진지할 때엔 제대로 진지하게 연출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발전하는 작가를 지켜보는 독자의 마음은 흐뭇하게 마련이다. 이 작품 역시 큰 전개 하나를 넘어선 상태로 인물관계를 어떻게 정리해낼지가 새해 연재분에서 주목해 볼만한 점으로 보인다.

6.「춘앵전」
전진석 이야기, 한승희 그림 / 『윙크』 연재 중 / 서울문화사 / 단행본 3권 발매 중

춘앵전 이미지

시대와 소재를 가리지 않는 액자식 이야기 전개로 새로운 감각의 아라비안 나이트를 그려냈던 「천일야화」의 찰떡궁합 작가 콤비가 완결 4개월 만에 낸 신작. 1950년대 여성국극이라는 현대 국악 뮤지컬 장르를 창시한 임춘앵(林春鶯, 1923~1975)의 일대기를 다룬 시대극이다. 하지만 시대극이라 무조건 진지하기보다 만화로써의 재미를 잃지 않기 위한 장치들을 꾸준히 배치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
「천일야화」 때보다도 한층 더 세련되고 힘이 들어간 한승희 씨의 그림도 단연 볼거리지만 다층적인 실존 인물 연구는 물론 탯말(흔히 ‘사투리’라 말하는 그것) 사전까지 탐독해가며 인물에 맞는 대사의 맛을 구수하게 살려내고 있는 이야기 작가 전진석 씨의 노력도 작품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예인이었으나 현재는 술에 절어 사는 아버지와의 불화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도망치듯 광주에서 경성(일제강점기 시대 서울의 명칭)으로 올라온 15살 무렵 이야기로 시작한 「춘앵전」은 이후 장군의 아들 김두한과의 만남, 가장 큰 조력자 역할을 해 주는 평론가 신대우와의 만남, 탭댄스 경연대회 출전 등을 거쳐 가장 큰 갈등 요인이자 경성행의 원인이었던 아버지와의 재회와 사별에 이르는 큰 전개 하나를 마무리 지은 상태. 2009년 연재분에서는 재능이 있으나 아직 될성부른 떡잎이었던 춘앵이의 훌쩍 큰 내외면적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덤으로, 팬이라면 단행본 4권쯤에서 볼 수 있을 22화 연재분은 꼭 기대를 해 볼 것. 가야금과 심청가로 대변되는 부녀간의 말 없는 교감은 지금까지의 연재분 가운데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라 하겠다.

7.「탐나는도다」
정혜나 / 『윙크』 연재작 / 서울문화사 / 단행본 5권 발매 중
탐나는도다 이미지

탐이 나는구나’와 ‘탐나(탐라)는 섬이다’라는 두 뜻을 담고 있는 묘한 제목을 달고 나온 본격 표류 외국인 생존 러브 스토리(?). 2006년 서울문화사 신인만화가 대공모전에서 「오빠의 남자」로 은상을 받은 신예 정혜나 씨가 『윙크』 3월 15일자(3월 1일 발행)부터 연재에 들어간 첫 장편으로 데뷔 때부터 연출력 등에서 대물급 신인으로 기대를 모았다.
동양 문화에 빠진 젊은 영국귀족 윌리엄 스펜서가 동방세계 탐방을 위해 여행길에 나섰다가 그만 난파를 당해 말도 안 통하는 기묘한 섬에 표류했다 한 소녀를 만나면서 시작하는 「탐나는도다」는 우리나라 제주도에서 물질하는 잠녀(해녀)들을 비롯해 당시 제주도의 환경, 문화 및 귀양 선비들의 유배지로 쓰였던 조선시대 제주도의 위치 등이 주인공 소녀인 버진이와 윌리엄의 이야기와 함께 생생하게 등장해 ‘만화 속 제주도’라고 하면 졸지에 요괴들 잔뜩 나오는 곳으로 생각하기 쉬웠던 「아일랜드」의 폐해(?)를 불식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독특한 문화를 남기고 있는 ‘제주도’와 거기에 표류해 온 노랑머리 외국인, 그와 제주도의 해녀 소녀 사이에서 싹트는 애정과 귀양 선비 박규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삼각관계 등 러브스토리의 정석을 밟으면서도 단순한 조선시대 배경과도 다른 또 다른 맛을 주는 독특한 소재들이 널리고 널린 덕에 지난해 그룹 에이트와 드라마화 계약을 체결, 지난해 8월부터 촬영에 들어간 상태다. 드라마 제작 발표 당시 가장 우려됐던 ‘윌리엄은 누가 맡느냐’는 「미남들의 수다」에 출연했던 황찬빈(프랑스 이름 : 피에르 데포르트)이 기용되었다고.
여기에 일본에서 「Ciel」을 수입하고 있는 신쇼칸이 「궁」을 중심으로 한 비정기 간행물 『라부쿙매거진(らぶきょんマガジン)』에 이 「탐나는도다」 1권 일부를 실음으로써 「궁」 「Ciel」에 이은 본편의 일본 진출도 기대해 볼 수 있게 됐다. 「탐나는도다」는 여러모로 2009년이 분주할 것으로 보인다.

8.「트럼프(TRUMP)!」
정현주(DOVA) / 『영챔프』 연재작 / 단행본 1권 발매 중
트럼프 이미지

도바(DOVA)’ 정현주 씨는 80년대 이후 출생한 만화 동인 가운데 활발한 활동력과 창작 지향 포트폴리오 프로젝트 등을 이끄는 등의 자생적 기획력으로 데뷔 전부터 주목받아 온 작가다. 데뷔 전에는 뉴타입 등 애니메이션 잡지에서 삽화와 마카 일러스트레이션 강좌 등을 진행한 적도 있다. 『영챔프』 16호(8월 1일 발행)에서 첫 연재를 시작한 데뷔작 「트럼프!」는 본래 블로그 등을 통해 공개하던 웹 연재작으로 잡지 연재에 들어가며 얼개와 주인공 등 대부분의 면면을 뜯어고치는 대수술을 감행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제목에서 나타나듯 작품에는 ‘카드’가 등장한다. 다른 게 있다면 이 작품이 도박 만화도 카드놀이하는 이야기도 아니라 초능력자들 이야기라는 점. 할아버지가 만날 전혀 쓸 데가 없어 보이는 카드 이야기를 해 주고 무서운 엄마가 집안을 휘어잡고 전학 좀 밥 먹듯이 했다는 걸 빼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녀 지영이가 새로 전학하기로 한 학교에 수속을 밟으러 갔다가 유명 모델이 낀 웬 ‘기묘한’ 싸움에 휘말리고, 설상가상으로 이튿날 전학한 학교에서 그 싸움을 벌인 장본인들을 만난다. 유명 모델 덕에(?) 영상이라도 찍나 했던 ‘기묘한’ 싸움은 알고 보니 초능력이었고 할아버지가 늘 말해주던 그 쓸데없어 보이던 카드 이야기와 맞닿아 있었던 것. 카드 이야기란 다름 아닌 능력자들 각각을 나타내는 ‘패’를 뜻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영이 자신도 그 중 하나였다. 그것도 중요한(할지도 모를).
평범해 보였던 일상이 어떤 계기로 변하는 이야기야 많지만 그만큼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가 관건. 나오는 인물마다 멀쩡한 일면에 어딘지 살짝 나사가 풀리거나 약을 적당히 먹은듯한 묘한 삐딱선을 타는 점이 대책 없이 세계의 법칙(룰)이라는 화두 앞에서 진지해지기 십상인 이 주제를 적당히 희석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단행본 1권 분량에서 설정과 밑바탕을 깔아놓았다면 2권부터는 정신없이 내달릴 전망이다. 다만 올 복학을 앞둔 작가가 제 컨디션을 잃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필진이미지

서찬휘

* 만화 칼럼니스트. 
* 《키워드 오덕학》 《나의 만화유산 답사기》 《덕립선언서》 등 저술. 현재 청강문화산업대학교와 백석문화대학교 출강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