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면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는 말로 서로를 위로하며 다가오는 내년을 대비한다. 말 그대로 ‘여러 일’들이 있었던 올 한 해, 우리 만화계 안팎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5. 동인계의 새 흐름
2003년 이후 코믹월드가 주도해 온 만화 동인계에 새로운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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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드 플레이스(3rd Place) 포스터 |
먼저 새 행사인 서드 플레이스(3rd Place)가 지난 2월 24일부터 선을 보이고 있다. 서드플레이스는 코믹월드와 달리 코스프레 전면 금지, 팬시만 들고 참가하는 행태(팬시 온리) 금지 등을 내세워 동인지 중심 만화 행사라는 기조를 세워가고 있다. 또한 부스당 의자 2개 제공, 무료입장 두 명 허용 등 코믹월드의 독점적 지위에 따른 동인들의 오랜 불편사항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보여준 한편 성인전용구역 레드존을 비롯해 기존 행사에서 잡음을 일으켜왔던 부분 상당수를 해소해 행사 참가자 및 관객들의 폭넓은 호응을 얻고 있다. 올 한 해 네 차례 행사를 연 떼 이어 내년엔 첫 성인 전용 행사 레드서플이 1월 4일에, 5회 행사가 2월 22일에 열릴 예정. 참가 부스 규모도 초기에 비해 3배 이상 늘어 5회 행사에선 200에 가까운 부스를 받을 예정이다.
이벤트(또는 온리전)도 2008년 들어 한층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국내에선 2000년부터 일부에서 카페 등을 빌려 소규모로 시작했던 온리 이벤트는 2005년부터 그 이전까지의 개최 횟수와 맞먹는 수가 한 해에 열리면서 만화 동인 이벤트의 한 조류로 자리를 잡았으며 2008년에 이르면서는 작품과 인물을 넘어 장르, 커플링, 특정 설정 등 한층 더 좁은 취향 단위로 행사들이 세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올해 열린 온리 이벤트에는 여성향 특촬물 온리 이벤트 변신제, 국내 작품 온리 이벤트 가온나래, 백합(百合, Girls Love) 성향 작품 온리 이벤트인 백합제 등이 있다.
이러한 흐름들은 만화 동인계가 다양성을 안정적으로 확보해 가고 있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어 이후 귀추가 주목된다.
6. 저작권관련 문제
만화계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저작권 침해와 얽힌 사건 사고가 올해도 줄을 이었다.
지난해 연말 경 한 법무법인이 벌인 단속에 심적 압박을 느낀 학생 하나가 자살하는 사고가 터졌다. 보통 저작권법 위반과 관련하여 만화가 단체의 위임을 받은 법무법인은 위임장을 근거로 불법 스캔 만화 등을 공유한 이들을 단속하여 합의금을 끌어내 위임한 작가와 일정 비율로 나누어 챙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단속을 위한 일정 가이드라인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 이는 위임자인 만화계 단체와 법무법인 사이의 소통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탓도 크나 단속 대상이 된 이들에게 지나친 압박을 준 법무법인 측의 강압적 단속도 문제를 부풀리는 데 한 몫 했다.
사실 그동안은 형식적인 반성문 정도로 넘어가주던 터라 단속 효과가 거의 없었다. 그러니 법무법인이 단속에 뛰어든 이후 표면으로나마 ‘귀찮지만 잘못하면 확실히 위험해진다’라는 경각심이 조금이나마 생긴 건 어느 정도 성과라 할 수 있다. 자살 사건이 터지면서는 온라인 인용 가능 범위 등을 정리한 가이드라인 마련 등 후속 조치가 마련되기도 했다.
2008년 중후반에는 국내도 아닌 외국과 얽힌 주목할 만한 사고가 터지기도 했다. 먼저 후나토 아카리(船渡明里) 작품 무단 전재 사건. 「언더 더 로즈」를 그린 일본 만화가 후나토 아카리가 일본 웹 사이트에 유료로 연재했던 「허니 로즈」를 국내 한 블로거가 자기 블로그에 무단으로 번역해 실었다가 원작자에게 발각당한 것.
격앙한 후나토 아카리는 출판사를 통해 조치를 단행했으며 이에 따라 한국의 만화콘텐츠저작권침해신고센터(CCPA)가 후나토 아카리의 저작물과 관련한 집중단속을 벌였다. ‘인용 범위’를 비롯한 저작권 해석에 관한 후나토 아카리의 지나친 견해나 한국인 블로거들에 관한 비난이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작가가 한국인 전체를 싸잡아 비난했다는 볼멘소리 이전에 명백한 잘못을 먼저 시인하고 하던 도둑질부터 멈추는 것이 순서라는 점을 습관처럼 만화 공유를 일삼는 이들은 알아야 한다. 최근 기계 번역 품질이 좋아지며 한일 양국 통신인들의 인터넷 왕래가 빈번함을 새삼 실감하게 된 사건이다.
이번사건은 대체로 ‘국가망신’이라는 자조적 한탄이 뒤따르는 가운데, 문제가 된 작품의 국내 정식 출판이 요원해졌다는 점을 안타까워하는 팬들의 목소리가 줄을 이었다. 한편 이밖에도 국내 블로그들 상당수가 아직 대패질(불법 스캔 만화 등 이미지 데이터의 원어 부분을 지우고 한국어 식자를 새로 붙이는 행위)이나 애니메이션 동영상 등을 올리는 식으로 구독자를 끌어 모으는 운영 방식을 고수하고 있어 문제의 불씨를 남기고 있다.
7. 국내 라이트노벨 시장 활성화와 그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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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사랑받고 있는「초인동맹에 어서오세요」 |
이제 만화와 함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시장에서 비중을 높여가고 있는 장르가 바로 라이트노벨. 10여 년 전 판타지노벨(대원), 어드벤처 노벨(학산) 두 브랜드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국내 라이트노벨 시장이 다시 기지개를 켠 것은 대원이 NT노벨이라는 브랜드를 낸 2002년이었다. 이후 윙크노벨(서울), J노벨(서울), 익스트림 노벨(학산) 등 출판사들이 앞 다투어 새 브랜드를 내고 작품들을 찍어내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 모두가 일본 작품 수입을 목적으로 했다는 점이다. 라이트노벨 무크지를 표방한 파우스트(학산)가 공모전을 통해 국내 작가 작품을 실었으나 단행본 출간으로 연결하진 못한 상황.
2007년 7월 25일 팬터지 장르소설을 찍어 오던 D&C미디어가 이러한 구도를 깨고 처음으로 한국 작가들을 기용한 라이트노벨 단행본 브랜드 ‘시드노벨’을 출범했다. 임달영, 오트슨, 반재원 등 이름 있는 작가들로 첫 선을 보인 시드노벨은 1년이란 짧은 시간에 걸쳐 한 달에 세 권씩을 꾸준히 출간하며 독자들의 눈을 끌었다. 공모전을 통한 신인 작가 발굴에 나서는 한편 라이트노벨의 특성 가운데 하나인 일러스트를 십분 활용한 감각적인 홍보물로 속칭 ‘낚시 마케팅’ 전략을 잘 쓴다는 평가를 끌어내기도 했다.
더욱이 「GGG」나 「제로」 「유령왕」 등의 홍보물에서는 음악을 제대로 가미한 영상물을 연출해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 뿌림으로써 인터넷 시대의 콘텐츠 홍보를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시드노벨 측은 출범 1주년을 맞이하며 문고 잡지의 역할과 이슈 메이킹 등의 역할을 수행하는 홈페이지의 기능을 최대한 살린 가칭 IT노벨이라는 화두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 「미얄의 추천」 「초인동맹에 어서오세요」 「유령왕」 등 대표적 인기작들은 꾸준한 증쇄를 보여주고 있다.
시드노벨이 일정 이상 성과를 거두자 다른 출판사들도 부랴부랴 새 브랜드를 세워 국내 작가들을 기용한 라이트노벨을 내기 시작했다. 대원은 아키타입을 비롯해 대원 소설상 공모전 등을 통해 작가 모집에 나서고 있으며 서울문화사도 젬스노블을 출간하다 이후 J노블 브랜드로 통합했다. 다만 시드노벨을 비롯해 각 브랜드들에서 작품을 내는 작가들 중 일부가 라이트노벨이란 장르의 특성을 잘 살리지 못한 채 기존 대여점 대상 팬터지 소설의 한계를 노출하곤 하는 점은 여전히 극복해야 할 숙제로 남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국산 라이트노벨 브랜드의 인지도가 상승하고 독자층이 늘어나면서 일부 부작용이 드러나기도 했다. 시드노벨 출간작 가운데 하나인 「정의소녀환상」의 완성도에 불만을 품은 한 독자가 지난 8월 30일 책을 태우고 그 사진을 출판사 독자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려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 논란이 일어나며 분서에 관한 찬반이 확산되자 반대 여론에 자극받은 또 다른 독자가 문제가 된 작품을 래핑도 뜯지 않은 채 불태운 후 사진을 찍어 올리는 촌극을 벌인데 이어 지난 11월 8일엔 한 블로거가 「로스트 콘택트」란 작품의 내용적 문제를 들어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책을 태우곤 그 사진을 자기 블로그에 올리기도 해 분서 행위가 이제 내용 비판 여부는 물론 장르나 독자층을 넘어 책 내용에 불만을 품은 이들 사이에서 일종의 ‘유행성 놀이’로 자리 잡는 양상이다.
「정의소녀환상」 분서의 경우 화형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동원하여 다수가 보는 커뮤니티 게시판을 통해 자기 불만을 토로했다는 점에서 ‘자살극’이란 형태를 띠고 있으며, 「로스트 콘택트」라는 작품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책을 태운 후 사진을 블로그에 공개했다는 점에서 ‘공개 처형극’에 비유할 만하다. 아니 정확히는 양쪽이 두 비유에 어울릴 만한 면을 지니고 있으며 창작물과 감상자 사이의 관계에 관한 고민을 채 성숙하지 않은 시장 앞에 던졌다는 점에서 좋든 싫은 중요한 사례로 기록할 만하다. 다만 하지만 여러 가지를 차치하고서라도 논의 과정에서 독자 입에서 튀어나온 ‘작가는 글 쓰는 기술자, 책은 상품일 뿐’ 류의 현실 인식은 제법 스산한 기분을 들게 한다. 작가의 신조나 시장 분석에나 어울릴 법한 말이 창작물을 감상하는 주체인 독자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오는 이 지점이 바로 이제 첫 돌을 넘기며 열심히 성장통을 겪고 있는 국내 라이트노벨 시장이 보여주는 현 주소이자 풀어나가야 할 숙제더미다.
8. 오디오 드라마 CD 시장 성장세성우들의 목소리 연기와 효과음, 음악만으로 극을 구성하는 오디오 드라마(라디오 드라마)가 올 들어서 국내에도 시장 형태를 갖춰나가기 시작하는 모습이다. 강경옥 씨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천애」 이후 이곳저곳에서 조금씩 시도는 되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진 못해온 이 분야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여성향 섹슈얼 팬터지 장르인 BL(≒ 야오이)을 전면에 내세운 업체들이었다.
2005년 등장해 BL 계열 오디오 드라마 CD를 꾸준히 내며 고정 팬층을 형성하고 있는 아코(ACO) 를 비롯, 2007년 말 등장한 야해(夜海)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소위 인디·언더로 불리는 비정식 성우들을 기용해 작품들을 만들며 시장을 조금씩 넓혀 왔으며, 2008년 들어서는 전에 없는 분량들을 대거 쏟아내기에 이른다. 만화 원작인 「완전무결하게 사로잡히다」(ACO), 「Hey, Boys!!」(야해) 등 원작을 둔 BL 작품을 비롯해 창작 BL극인 「SET ME FREE」(ACO)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출시됐다.
현대지능개발사의 루비코믹스 시리즈가 보여준 사례에서도 입증된 바 있는 국내 BL 시장의 ‘충성도 높은 고정적 팬층’을 기반으로 한 이들 시리즈는 2008년 오디오 드라마 시장에서 실로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BL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Missing Link」(야해)와 같이 인기 소설가를 각본에 참여시켜 완성도를 높인 작품도 시도되었
으며 전래동화를 각색한 「동심」(ACO)와 같은 독특한 작품도 나왔다.
프로 성우들의 대거 진입도 볼거리다. 목소리로 잠재워주는― 잘 수 있는가는 둘째 치고 ― 독특한 컨셉을 지닌 「더 자라」(야해)라든지 동인 게임으로써 대흥행을 한 「어이쿠! 왕자님」의 오디오 드라마인 「사운드 오브 왕자님」, 「Missing Link」의 원작자 반재원 씨가 집필 중인 라이트노벨의 부록 형태로 들어간 「초인동맹에 어서오세요」나 애니메이션 정보지의 부록으로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입시명문 사립정글고등학교」 등은 프로 성우들이 참여하여 호평을 얻은 경우. 올 들어 등장한 브랜드인 이음(耳音)의 경우 「사운드 오브 왕자님」에 이어 프로 성우들을 19금 BL 커플링으로 내세운 「비밀」을 내놓아 BL 팬층과 성우 팬층의 지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올 한 해에만 나온 오디오 드라마 CD가 모두 27장. 이러한 시장 성장세와 함께 오디오 드라마 시장에 참여하며 실력을 키운 인디·언더 성우들이 방송사 공채를 통과하는 사례도 생기는 한편 BL이 아닌 형태, 타 매체와 제휴하는 형태로 독특한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사례도 점차 늘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는 각 작품들이 적은 시장에서 적은 분량을 찍어 적은 수익을 확실하게 뽑아내는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 2008년이 가능성을 확인한 해였다면 앞으로 만화와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과의 합종연횡이 좀 더 거세게 일어나 또 다른 성과를 내 주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