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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와 만화가 (1)만화가를 그린 만화들-한없이 개인적이면서 지극히 시대적인

만화가가 만화가에 대해 그린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곧 만화가라는 정체성을 의식한다는 것이고, 앞서 창작자로써의 자의식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만화에 작가의 이름이 실리지 않거나...

2008-11-04 김혜신

                                                                         [연중기획 Comic & Culture 19 ] 만화와 만화가
 
지난 11월 3일이 바로 만화가의 날 이었습니다. 우리가 늘 재미있게 보는 만화. 이 만화들을 열심히 만들어내는 분들이 바로 만화가분들이겠지요.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만화속 만화가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만화가들을 그린 만화들은 과연 어떨까요? (편집부)


만화가가 만화가에 대해 그린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곧 만화가라는 정체성을 의식한다는 것이고, 앞서 창작자로써의 자의식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만화에 작가의 이름이 실리지 않거나 대충 지은 듯한 가명이 첨부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배경에는 만화를 자기 이름을 올릴 정도로 의미 있는 창작물로 여기지 않았던 작가의 판단과, 그만큼 만화가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인 가치가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 예를 들어 나혜석 같은 저명한 화가도 신문만화를 그린 적이 있으나 본명을 내걸지는 않았거나, 내지는 전기에서 종종 누락되는 경력으로 취급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해방이 되고 출판물에 대한 제한이 해금되면서 한 작가의 만화만으로 구성된 책이 출판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비로소 만화가가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렇게 “작가”로써 자신을 드러나면서 자연스럽게 만화 후기의 자화상이나 화실 일기 같은 형태로 만화 속에서 만화가를 그리게 되는 일도 많아졌다.

‘고바우’ 김성환의 자화상
출처 : 다시 보는 우리만화 1950-1969

그러나 만화가라는 업종 그 자체가 주역이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혹시나 만화가의 꿈을 품었을 극소수의 독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독자층에게 만화가의 사정 자체는 관심 밖 대상이었다. 사실 신나는 모험이든, 달콤한 로맨스든, 화끈한 액션이든 어떤 종류의 도피라면 모를까 칙칙하고 궁상스러운 저임금 창작자의 일상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만화가들 역시 자신의 작업이나 일상이 재미있는 소재거리라고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업종에 대해 논하는 것은 생각 외로 어려운 작업이다. 스스로가 몸담고 있는 환경을 객관화하고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만화가를 그린 만화는 만화가 어느 정도 정착되고 만화가, 혹은 만화 제작과정에 관심을 가질 독자의 수요가 어느 정도 정립된 환경에서 나올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만화도서출판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90년대에 만화제작 지침서라던가, 만화가라는 업종에 관심을 가진 등장인물이나, 아예 만화가 자신이 등장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두드러진다. 가령 여고생들의 생동감 넘치는 학창생활을 그린 [걸즈]의 주인공 중 하나인 람바다가 만화가 지망생으로 공모전에서 좌절을 겪고, 프로 만화가에게 상담 지도를 받는 “21화: 만화가가 될래요!!”가 그런 경우다. 고교생 신분으로 만화가로 데뷔한 여주인공을 그린 [코믹], 만화동호회의 이야기를 그린 [TOON]은 중심 테마로써 만화와 만화가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앞서 만화가들의 삶을 만화로 그려낸 작품이 있었는데, 바로 90년대 초 즈음 [요요]에서 연재되기 시작했던 이명신의 [에피소드]다. 연재잡지를 몇 번이고 옮기게 된 점에서도 역사적이라, [요요]에 이어 [미르], 최종적으로는 [댕기]에서, 2권짜리 단행본도 [댕기]를 펴낸 육영재단에서 출간해냈다. (현재는 파란에서 유료로 감상할 수 있다.) 햇병아리 만화가 지망생 신참미가 (그다지 인기작가는 아닌) 프로 순정만화가 고민이의 화실에 어시스턴트로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소소한 듯 하면서 우습고도 눈물겨운 만화가, 만화지망생, 업계 종사자들의 일상과 꿈을 그린 작품이다. 우아한 자태와 미모에 고양이 애호가이기도 한 얼핏 오만해 보이는 인기만화가가 동고동락한 만화가 동지와 함께 만화 이야기로 밤을 지새운다던가, 자기 분야에서 상당히 성공을 거두었는데도 여성이고 만화가라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인정 받지 못하고 결혼을 강요당해 겪는 어려움이나, 자존심만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드세지만 번번히 퇴짜맞는 만화가지망생이나, 스크린톤이 무척 비싼 재료였던 시절의 사정이나, 만화가들의 (짝)사랑 혹은 착각적 망상과 취향이 유쾌하면서 가볍지는 않게 그려진다. 90년대 초반 대한민국에서 만화가와 만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생생한 현장이 펼쳐진 만화라는 점에서, [에피소드]는 시대적, 역사적 가치를 가진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만화가를 그리는 만화의 의의가 드러난다. 첫 번째는 만화가가 스스로의 창작자로써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표현한다는 정체성 고찰에 있고, 두 번째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 속의 만화, 만화가의 위치를 기록하는 역사성에 있다.



우리나라와 만화의 역사와 규모가 다른 일본에서는 심지어 아마추어 만화가에 대한 만화도 있을 정도로 만화업계, 만화작업, 만화가 및 만화 팬들에 대한 담론이 폭넓게 진행되었고 만화가를 다룬 만화도 수가 많다. 그 중에서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천재적인 테크닉을 보유한 만화 어시스턴트가 주인공인 [코믹마스터 J]가 아닐까 싶다. 거액의 금액을 받고 일하는 J는 “혼이 담겨있는 만화만 도와준다”는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있고, 작중에는 인기 때문에 질질 끌고 끝내지 못하는 만화나 작품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는 등 대외적으로는 큰 인기를 끌지만 만화가 본인의 경제적, 노동적 환경에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폐단 등 업계 내의 음영도 드러난다. 그러나 프로 만화가의 입장에서 창작자로써의 만화가의 정수를 담아낸 것은 91년도에 출판된 시마모토 카즈히코의 단권 작품 [불타라 펜]이다. 국내에도 2권까지 출간된 [울어라 펜]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불타라 펜]은 “월간작품 3개를 연재중인, 어디에서 있을법한 극히 흔해빠진 만화가” 호노오 모유루의 일상을 통해 창작자로써의 만화가의 열정을 강렬한 터치와 정곡을 찌르는 유머감각으로 그려냈다. 두 만화가가 같은 잡지에서 같은 장르의 만화를 같은 시기에 연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촉즉발의 치열한 신경전이나, 궁극의 집중선을 그리기 위한 피 날리는 희생이나 (“만화”라는 점을 최대한 살렸다는 점에서도 연출이 기발하다), 만화가나 어시스턴트나 한결같이 눈물콧물 흘리면서도 그리기를 멈추지 않는, 아니 멈출 수 없는 강행군 등 “픽션이지만 픽션이 아닌 부분도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 만화의 길을 나아가는 이들의 열의를 전한다.



유감스럽게도 국내에 정식 출간된 적은 없지만, 그 중대성 때문에 만화가를 다룬 만화의 목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있다. 바로 1970년부터 연재된 후지코 A 후지오의 장편 [만화의 길]이다. 후지코 A 후지오는 [도라에몽]으로 유명한 후지코 F 후지오와 소년 시절에 만나 함께 후지코 후지오라는 합작 만화가로 장기간 활동했던 작가인데, [만화의 길] 역시 만화를 통해 친해진 두 명의 소년이 성장하고 상경하여 만화가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성격이 강한 드라마이자 일종의 만화사적 기록이다. 주인공의 이름이 마가 미치오, 친구가 사이노 시게루라는 이름으로 대치되어 있지만 이들이 살던 지방의 지명, 접한 잡지와 만난 실존 만화가들은 전부 실명으로 나오며 사건의 배치도 시간 순에 충실하게 엮어져 있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성장하던 배경인 40년대 중반~50년대는 일본 상업만화의 태동기로 어린이잡지의 한 코너를 차지하던 만화가 점점 지면을 넓혀가며 만화로만 이루어진 잡지의 탄생을 예고하고, 관서지방을 중심으로 한 대본소 극화만화가 기존의 어린이만화와 차별되는 날 선 그림체와 생생한 현장감으로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던 중요한 시기였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만화의 뿌리와 가지가 움트던 시대의 기록이자, 주어진 시대 속에 열성적으로 살아가던 만화가들과 편집자들에 대한 최고의 헌사이기도 하다. 물론 이 만화의 가치는 비단 그런 기록사적인 측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심한 성격의 주인공 미치오의 인간이자 창작자로써의 번뇌과 질투, 정열과 좌절을 진솔하게 그려내기에, [만화의 길]은 진정성 있는 성장드라마로써도 빛을 발한다.

만화가를 그린 만화는, 바로 만화가 자신이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매우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만화가에 대한 당시의 인식도 깊게 관여하는, 무척 시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만큼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일지도 모른다. 보통은 만화, 영화, 드라마를 보면서 굳이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궁금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무대 뒤의 사정이 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흥미진진하고 경이로울 때도 있다. 그리고 만화가를 그려낸 만화야말로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만화의 탄생에 관여한 수많은 이들의 열정과 고뇌를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는, 작품의 테마에 가장 어울리는 매개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