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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와 영웅 (1)만화속 영웅들의 모습

창작물 속, 그 중에서도 대중친화력이 높은 만화 매체 속에서는 대중이 바라는 영웅들, 또는 현 시대가 요구하고 시대를 비추는 표상으로서의 영웅들이 현실 이상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영화나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2009-02-05 서찬휘

                                                                          [연중기획 Comic & Culture 20] 만화와 영웅

세상을 살아가는게 정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세계경제는 나락에 떨어져서 구해달라고 아우성치고 있고, 안타까운 사건을 목격해야 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죽인 살인자까지- 숨쉬는것 조차 불편해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하늘에서 멋진 영웅이 내려와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면 어떨까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만화 속 영웅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줄 영웅을 꿈꿔봅시다. (편집부)

창작물 속, 그 중에서도 대중친화력이 높은 만화 매체 속에서는 대중이 바라는 영웅들, 또는 현 시대가 요구하고 시대를 비추는 표상으로서의 영웅들이 현실 이상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영화나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2차원적 비주얼과 역동적 영상 연출이 공존하는 만화의 특징을 등에 업은 덕이다. 또한 ‘영웅’을 나타내는 영어 낱말 히어로(hero)가 극을 대상으로 할 때엔 ‘주인공’으로도 해석되는 데에서 볼 수 있듯 작품 속 주인공들은 대중들이 시대와 현실 속에서 보고 갈망해왔던 영웅상과 느껴왔던 여러 면면들을 한층 더 강하게 반영한다.

만화 속 영웅에 ‘슈퍼 히어로’라는 호칭이 붙은 시기는 1930년대 들어서다. 이 시기를 전후한 미국의 상황을 보자면, 1920년에서 1933년까지 이어진 금주법 시대와 그 사이에 터진 1929년 대공황,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다. 갱과 경찰이 유착하고 범죄가 들끓는 암흑기에, 그리고 세계대전이라는 격변하는 흐름 속에서 대중들 앞에 등장한 슈퍼맨, 배트맨 등은 ‘이민으로 태어난 미국’이라는 나라의 기본적 속성에서부터 세계의 경찰 노릇을 자임하기 시작한 자기 나라의 모습, 또 혼란스런 사회상을 나를 대신해 평정해줄 처단자의 모습 등을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초인적 능력과 (밝지만은 않은) 탄생 배경과 과거사 등의 ‘설정’으로 표현해 내면서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한다.

만화 스파이더맨 이미지
만화 「스파이더맨」

이러한 시대 반영적 기조는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며 그 시대를 통해 성장해 온 많은 세대들의 마음을 진하게 반영한다. 미국·소련이 주도한 냉전시대와 베트남 전쟁, 전 지구적인 반 체제 운동으로 번졌던 프랑스 68혁명 등을 겪었던 전후 세대들은 기존 흐름을 전방위적으로 ‘해체’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맞으며 거센 혼란 속 성장기를 보낸다. 이 시기에 등장한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의 주요 화두는 성장통이나 세대 갈등, 초인적 능력과 현실 속 자기 모습의 괴리감에서 오는 괴로움 등이 주는 정체성 혼란과 같은 면면을 담아낸다.

이들 히어로물이 그래픽노블이라는 형태로 문학적 가치까지 인정받기 시작한 1980년대에 이르면서는 이들 캐릭터가 초인적인 힘으로 구현해 온 맹목적이고도 자기식인 ‘정의’의 가치에 물음표를 던지기 시작한다. 더 이상 정의롭지만은 않고 때론 편짜먹기(?)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데다 과연 정의란 무어고 히어로란 무엇인가와 같은 골치 아픈 질문들도 둥둥 떠다닌다. 1980년대 말엽 즈음엔 「데어데블」과 같이 아예 누가 악당이고 누가 정의인지 구분할 수 없거나 아예 악마의 힘을 품은 「스폰」과 같은 종자(?)들까지 나타난다. 이제 이들 영웅들은 「배트맨 : 허쉬」의 배트맨이 그러하듯 자기가 자기로 있기 위해서 자기 속부터 점검(?)해야 하는 사태에 직면한다.

그런 만큼 이제 악역은 그저 소탕 대상에 머무르지 않으며, 일방적 선악구도는 미국·소련이 주도해 온 냉전시대가 점차 끝으로 다가서면서 더 이상 빛을 볼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가를 외칠 수밖에 없던 그 시기, 어둠과 빛은 더 이상 별개가 아니었던 셈이다. 이와 같은 복잡다단한 구도는 비주얼하면서도 진중한 읽을거리를 원하던 성인 독자층을 매료시켰음은 물론 이후 등장한 만화와 그 외 다양한 문화매체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기분 내키는 대로 구는 ‘까칠한 영웅’ 「헨콕」과 같은 사례는 만화를 통해 정립되어 온 현 시대의 영웅상이 영화에 어떻게 전이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배트맨 : 허쉬 한국어판 만화 이미지
만화 「배트맨 : 허쉬」한국어판

히어로물’이라는 장르가 미국에서 만화를 통해 정립되었지만, 이들처럼 대놓고 ‘나 영웅이오’하고 가슴팍을 풀어헤치지 않아도 대중들은 다양한 형태의 영웅상을 만들어 소비해 왔다. 일본은 온갖 로봇물과 특수촬영물(특촬물) 캐릭터들을 통해서 나름의 영웅상을 만들어왔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과 특수촬영물 등으로 전개되어온 일본식 영웅물 또한 전후 일본이 겪은 사회적 아픔과 극복 의지 등을 담으며 한창 성장동력을 이끌던 세대의 가슴을 울렸으며 이들이 남긴 유산이 현재 일본의 끝갈 데 모르는 오타쿠 문화를 이루는 재산으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하지만 일본 땅에서 정의를 지키던 초인들 또한 맹목적인 정의 싸움에서 벗어나 점차 고민을 싸안고 정체성을 고민하는 면모를 보여주며 성인 독자, 시청자층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는 시대적 흐름이 단지 한 국가 단위를 넘어서 거세게 몰아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한국형 히어로의 효시인 김산호 작가의「라이파이」이미지
한국형 히어로의 효시인 김산호 작가의「라이파이」

한국은 이들 ‘영웅’이 전면에 드러나는 세계관을 보여준 작품이 많진 않다. 히어로물이라는 형태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작품을 꼽으라면 「라이파이」 정도가 되겠으나, 「각시탈」과 같은 시대적 아픔을 노래한 작품도 민중 영웅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 최근 드라마화한 만화 「일지매」 또한 일지매라는 인물의 인생역경과 활약을 통해 시대적 배경에 도사리고 있던 여러 부정적 면을 ‘제거’하는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 준다는 점에서 주효하다. 영웅이라는 코드를 희화화한 작품도 있다. 2대에 걸친 불의를 향한 ‘처절한 응징’을 보여줬던 「황대장」 시리즈는 풍자 개그로 현 한국 사회 속 영웅(?)을 정말로 ‘웃기고 통쾌하게’ 그려냈다.

영웅은 시대가 만든다. 작품 속 영웅은 시대적 열망과 갈망이 복합된 초인적 인물이자, 어찌 보면 시대를 사는 대중들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만화가 오버를 살짝 섞어 반영한 현실에서 대중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읽는다. ‘검은 기사(다크 나이트)’와 그 영혼적 쌍둥이가 펼치는 사랑과 정열의 애증극이 각광을 받고 있는 이 시기, 새삼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영웅상이 과연 무엇인지를 되돌아 봐야 할 시점이 아닐까 싶다.

아울러 우리 나름의 영웅을 그려낸 작품들이 좀 더 등장해주길 기대도 해 본다.
필진이미지

서찬휘

* 만화 칼럼니스트. 
* 《키워드 오덕학》 《나의 만화유산 답사기》 《덕립선언서》 등 저술. 현재 청강문화산업대학교와 백석문화대학교 출강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