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의 그림체 : 디지털 작가주의 VS 인상파 병맛 화가
디지털 기술과 특수효과로 거둔 작가주의적 웹툰 작화
다소 엉성한 모양의 '병맛체' 그림은 디지털 문화를 투영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그려갈 뿐, 웹툰 다운 그림체에 뚜렷한 정답은 없다.
이모션 D
‘그림체’는 만화의 문체(文體, style)입니다. 문체에 글쓴이의 사상과 개성이 담기듯, 그림체에도 작가의 사고방식과 개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 생각을 어떻게 그려야 사람들이 잘 이해해줄까?”라는 고민과, “나는 이렇게 표현하는 걸 잘해”라는 소신 사이에서 ‘그림체’는 탄생합니다. 요컨대 그림체는, 만화가가 이 세상을 포착하는 독특한 방식이라고나 할까요?
세상이 바뀌면 그림체도 달라집니다. 세상은 참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출판 만화의 시대, 만화가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는 ‘인쇄’라는 과정이 필요했었죠. 인쇄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꽤나 비용이 드는 작업이었습니다. 종이 낭비가 없게끔 알차게 칸을 채우고, 오탈자가 없게끔 검수하고, 그렇게 철저한 편집을 거친 후, 인쇄소를 거쳐, 서점까지 실어 날라야 했지요.
요즘 세상은 어떤가요? 여전히 '만화책'이 있지만, 이제는 만화책만 있지는 않습니다. 인터넷만 켜도 언제든지 만화를 볼 수 있게 되었죠. 네이버나 다음 같은 포털 사이트뿐만 아니라 각종 콘텐츠/만화 전문 플랫폼, '카연갤(카툰 연재 갤러리)' 같은 커뮤니티, 심지어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 같은 SNS(Social Network Site)에서도 만화를 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통로 덕분에 누구나, 언제든, 어떻게든, 만화를 그리고, 만화를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출판된 만화를 이북(e-book)으로 보는 수준의 변화가 아닙니다. '디지털' + '만화'의 단순 결합, 컴퓨터에서도 만화를 본다는 기술적 발전, 그 이상의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웹-툰'이라는 화학적 융합, 디지털 매체에 맞는 새로운 장르가 출현한 것입니다.
화려체, 컬러와 특수효과로 이뤄낸 웹툰 시대의 그림체
웹툰 시대에 새로이 등장한 그림체가 있습니다. ‘디지털’의 장점을 살려 총천연색 컬러 작업, 극한의 퀄리티에 특수 효과까지 더한 ‘화려체’가 우선 첫째 경향성입니다. 추혜연의 <창백한 말>을 봅시다. “한 컷 한 컷이 일러스트”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묘사가 섬세하고, 입체감과 빛 묘사가 훌륭하고, 색채도 풍성합니다. 이래서 연재를 어떻게 하는 거지, 싶을 정도로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그림체입니다. 아예 작정하고 월간으로 연재하는 석정현의 <무당>도 가히 경이로운 작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극사실주의풍의 그림체가 쉴 틈 없이 이어지는 걸 보고 있노라면, 이건 정말 ‘작품’이라는 감탄이 절로 듭니다.
△ 추혜연 <창백한 말> 중, 석정현 <무당> 중
이러한 ‘작가주의’적 그림체는 웹툰이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출판 만화의 시대, 만화의 그림들은 대부분 흑백이었습니다. 화려한 그림을 책으로 찍어내려고 하면 단가가 비싸지니, 전략적으로 흑백 기본에, 그나마 톤 작업으로 질감과 색감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컬러 페이지는 가끔씩 책 시작할 때 붙는, 특전이나 마찬가지였고요.
하지만 웹툰 세상에서는 그렇게 ‘아낄’ 필요가 없죠. 얼마나 화려하게 그리든, 디지털 화면으로 보여주면 되기 때문에 비용적으로 더 비싸질 것이 없습니다. 디지털 화면의 자유 안에서 만화가들은 한껏, 그리고 싶은 만큼 화려한 그림을 펼쳐낼 수 있고요. 작가주의적 그림체가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웹툰들은 모두 ‘색채 작업’을 합니다. 눈 돌아가게 화려한 디지털 화면의 세상에서, 만화 또한 시각적으로 매혹적이어야 하기 때문이죠.
극한의 퀄리티를 추구하는 ‘디지털 작가주의’는 이런 ‘화려체’에 그치지 않습니다. 정적(靜的)인 화면의 한계를 벗어나, ‘디지털’에서만 가능한 표현을 웹툰에 도입하기도 합니다. 2011년 미스테리 단편 릴레이에서 공개되었던 호랑의 <옥수동 귀신>, <봉천동 귀신>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화제작이었습니다. 으스스한 괴담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 단편들은 3D 효과, 플래시 애니메이션, 효과음, 스크롤 감지 기능으로 ‘최고의 장면’을 만들어냈었죠.
△ 호랑, <옥수역 귀신> 중
사라진 여자를 쫓아 지하철 선로를 유심히 바라보는 순간, 피 묻은 손이 튀어나와 눈앞에서 휘적거립니다. 관절이 뒤틀린 듯 이상하게 걸어가고 있던 여자가 괴성을 지르며 나를 향해 달려옵니다. 적막한 고요를 깨고, 갑작스레 움직이는 그림은 괴담 만화에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이런 연출은 오직 ‘웹’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웹툰’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실험적인 표현입니다.
호랑 작가는 이런 특수 효과를 여러 작품들에 도입하여, 자신만의 ‘그림체’로 삼았습니다. 호랑 작가 외에도 ‘액션툰’이나, ‘인터랙션툰’을 시도한 사례는 꽤 있었습니다. 디지털과 웹이라는 환경에 발 맞춰, 나름대로 새로운 시도를 해본 것인데, 사실 호랑 작가가 했듯 ‘찰떡’ 같은 몰입감을 보여준 경우는 그다지 없어 보입니다. 출판 만화에서는 할 수 없었던 새로운 표현들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참신했지만, 그러다가 ‘만화다움’을 해쳐서 오히려 몰입에 방해가 되었달 까요? 상호작용의 즐거움만 따지자면 게임이나 비주얼 노벨(Visual Novel)을 따라갈 수가 없는데다, 만화를 즐기는 독자들은 애초에 그런 식의 ‘참여형 스토리’를 보려고 웹툰을 소비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뭐, 애니메이션 효과가 붙으면 눈이야 즐겁습니다만, 꼭 그런 효과가 없어도, 웹툰은 재밌으면 그만입니다. 랑또의 <가담항설>을 보면서, 컷의 색깔과 움직임이 바뀌는 것이 나름 눈요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특수 효과가 없었어도, 저는 여전히 <가담항설>의 이야기와 캐릭터 표현을 좋아했을 겁니다. 웹툰 시대, ‘디지털의 특성’을 그림체에 녹여내는 것은, 꼭 기술적인 특수 효과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디지털의 특성’이라는 것이 녹여내는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일까요? 이 지점에서, 웹툰 시대에 새로이 등장한 그림체의 두 번째 경향성이 나타납니다. 총천연색 컬러 작업에 특수 효과까지 더한 ‘화려체’와는 정반대의 방향성, 바로 ‘병맛체’입니다.
‘병맛체’는 얼핏 보기에는 형편없는 낙서처럼 보입니다. 잘 그린 만화라기에는 한참 수준 미달인데, 그래도 뭔가 재미는 있을 때 사람들은 “이거 참 병맛이네.”라고 평하지요. 까다로운 독자들은 “이게 그림이냐?”, “좀 성의 있게 만화를 그려라.”라는 혹평을 하기도 합니다.
△ 조석, <마음의 소리> 중
2006년부터 지금까지 연재되고 있는 <마음의 소리>는 시대를 풍미한 흥행작이자, 일상툰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시초와 같은 웹툰입니다. 2007, 2008, 2009년 대한민국 만화대상 인기상, 2017년 대한민국 만화대상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작품이지만, 이러한 명성과 달리 <마음의 소리> 초창기 그림체는 다소 엉성합니다. 날고 긴다는 출판 만화 작가들의 그림체에 비하면, 속된 말로 좀 ‘아마추어’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시대 독자들은 출판 만화 대신 <마음의 소리>를 선택했습니다. 웹으로 만화를 보던 독자들에게, 그림체의 완성도는 중요하지 않았던 거죠. 중요한 것은 <마음의 소리>가 담고 있던 ‘공감’ 포인트들이었습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군 복무, 자취방, 학창 시절의 ‘일상’ 이야기. 조석 작가의 ‘생활 체험’이 진솔하게 담겨 있었던 <마음의 소리>는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의 ‘마음’을 울렸던 거죠.
디지털 시대가 어떤 시대이기에 이런 웹툰이 먹혔던 것일까요? 웹(World Wide Web)이라는 환경은 누구나, 손쉽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게끔 해주었습니다.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친구와 직접 만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싸이월드나 블로그 같은데 주절주절 올리면 됩니다.
예전에는 남이 내 이야기를 보게 하려면, 훌륭한 수필 작가가 되어 ‘출판’을 해야만 했습니다. 표현을 다듬고, 교정을 받고, 멋들어지게 편집한 ‘작품’만이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매체’라는 것이 대중화된 다음부터는 누구나 마음껏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음의 소리> 같은 일상툰이 흥행했던 데에는 이러한 시대 배경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은 이미, 싸이월드 등을 통해 공유되던 ‘개인적인 일상’, ‘소소한 생활’ 이야기에 친숙하게 읽어왔습니다. 일상 친화적인 이야기를 즐기고 좋아했지요. <마음의 소리>는 이러한 ‘시대 의식’을 꿰뚫고 있는 작품입니다. 신기술을 적용한 애니메이션 효과도 없고, 잘 정련된 그림체조차 아니었지만, <마음의 소리>에는 ‘시대정신’이 담겨 있었습니다. ‘디지털 기술’을 넘어, ‘디지털 문화’의 특성을 담아낸 것입니다.
‘디지털 문화’ 속에서 활발하게 향유되던 ‘일상의 이야기’, 이러한 것들이 ‘만화’와 융합하여 ‘웹툰’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실제로 초창기 웹툰들은 개인 홈페이지에서 시작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워니의 <골방환상곡>이나 서나래의 <낢이 사는 이야기>는 원래 싸이월드 및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연재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전통(?)은 이후에도 이어져, 개인 블로그에 포스팅 형식으로 올리던 글이 <역전! 야매요리>처럼 웹툰화되기도 합니다.
소위 ‘극화체’가 사용되는 작가주의적 작품들은 출판 만화에도 있었고, 디지털 만화로도 그 명맥이 이어졌었습니다. 반면, ‘일상툰’은 웹툰 시대에 이르러서야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 장르입니다. 어찌보면 <마음의 소리> 같은 일상툰이야말로, ‘디지털 만화’와 구분되는 ‘웹툰’의 시대를 연, 웹툰의 ‘본류’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SNS의 일상 글들을 보면서 거창한 문학성을 기대하지 않듯, 웹툰 시대의 독자들도 훌륭한 그림체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대충 주절거린 뻘소리가 더 쉽고 재밌듯, 어쩌면 ‘낙서 같은 그림체’ 특유의 병맛을 더 즐기는 독자도 있는 듯합니다.
△ 엉덩국 <성 정체성을 깨달은 아이> 중, 김케장 <인터넷 방송의 추억> 중
“기승전병”의 플롯을 지닌 <성 정체성을 깨달은 아이>는 ‘엉덩국 신드롬’을 일으켰고, 추상적이다 못해 막 그린 것 같은 그림체로 만들어진 ‘케장콘’은 10탄까지 나오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대충 낙서 같이 그려놓은 이딴 그림체가 인기를 끌다니? 말도 안 돼!”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디지털 문화’는 원래 이딴 걸 자유로이 향유하곤 합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세상을 포착하는 독특한 방식도 바뀐 것이겠지요.
‘시대 의식’을 예리하게 담아냈음에도 불구하고, 겉보기에 완성도나 성의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병맛 그림체’는 때때로 혹평을 받곤 합니다. 병맛툰과 일상툰이 저평가되는 것이 안타까운 독자로서, 저는 이들을 ‘인상주의(Impressionism)’ 유파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사실적 묘사보다는 화가의 순간적이고 주관적인 느낌, 즉 인상(Impression)을 표현하고자 했던 인상파 화가들은, 당대의 풍습과 사회상을 담아내곤 했습니다. 최소한의 그림체 퀄리티를 보증하는 출판 만화의 전통을 깨고, 사실적인 극화체 대신, 우리 시대의 일상 감성과 체험을 주관적으로 담아내는 ‘병맛 그림체’야말로, 21세기 웹툰의 ‘인상파 화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한 ‘병맛 그림체’를 열렬히 옹호하긴 했지만, 저는 열과 성을 다한 ‘디지털 작가주의’ 그림체도 무척 좋아합니다. 디지털 작가주의와, 인상파 병맛 화가! 웹툰 시대에 등장한 이 새로운 그림체 중, 어떤 그림체를 더 좋아하시는지요? 어떤 그림체가 더 ‘웹툰답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어느 쪽이든, 새로운 시대에 놓인 ‘웹툰’의 가능성은 앞으로도 무궁무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