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기사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만화와 스포츠 : 운명의 교차점 - 스포츠만화의 세계

순수하게 권투에 몸을 던질 수 있었던 죠는 어떤 의미로 행복하다. 실제로 대부분의 직업 선수들에게 있어 스포츠는 현실적인 수익원이자 장래이며 위신이다. [공포의 외인구단]의 주인공 오혜성을 비롯한 동료 선수들에게 이 사실은 아플 정도로 생생히 다가오는데...

2008-09-05 김혜신

                                                                       [연중기획 Comic & Culture 17 ] 만화와 스포츠

모두들 베이징 올림픽을 잘 즐기셨나요? 정치적으로나 혹은 국제적으로 여러 가지 말이 무성한 올림픽었지만, 게임이 시작되는 순간부터는 모두를 짜릿하게 만드는 경기들이 펼쳐졌지요. 최고의 감동과 환희를 선사하는 스포츠. 당연히 만화속에서도 스포츠의 세계는 무한하게 펼쳐졌겠지요? 여기 만화속의 스포츠들을 소개 합니다. 모두 다 함께 즐겨주세요.(편집부)

스포츠는 어떤 의미로 가장 원초적인 오락이다. 사냥할 필요가 없는 집고양이가 장난감 쥐를 쫓아다니듯이, 수렵, 채집생활에서 벗어난 인간도 단순히 공을 바구니에 집어넣거나 물건을 멀리 던지거나 빨리 수영하는 것뿐인 일견 무의미한 동작을 연마하고 경쟁하며 응원하고 환호한다. 물론 무의미해 보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고등생물의 특권이지만 말이다. 신을 기념하면서 (남자) 선수들이 나체로 시합했던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서 볼 수 있듯이, 점차 스포츠는 오락을 넘어서 종교적이고 예술적인 의미마저 부여되었다. 일시적이나 스포츠를 통해 인간사를 초월한 숭고함을 추구한 정신은, 올림픽 기간 중에는 전쟁을 금지하였던 올림픽 휴전에서도 볼 수 있으며 현대 올림픽 역시 이런 평화의 이념을 계승하였다. (물론 이번 올림픽에서도 드러나듯이 반드시 현실적으로 지켜지지는 않지만 말이다.) 과거의 종교적인 의미는 퇴색되었지만, 참가자들의 노력뿐만 아니라 날씨나 운이 승부의 운명을 좌우하는 점에서는 확실히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세계와 접점이 있지 않을까. 인간이 스포츠에 열광적으로 끌리는 것도 그 운명적 순간의 긴박감과 감동을 느끼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왼쪽 : [허리케인 죠] 표지이미지  오른쪽 : 모든 것들을 하얗게 태우고 죽음을 맞이하는 죠
왼쪽 : [허리케인 죠] 표지이미지
오른쪽 : 모든 것들을 하얗게 태우고 죽음을 맞이하는 죠

운명이라는 거창한 화두를 내걸었지만, 사실 대부분의 관객이 그 순간을 안전한 객석에서 대리 체험하는 정도라면 진정으로 운명이 걸린 것은 바로 선수 자신들이다. 특히 격투기 종목은 1인 경기인데다가 싸우는 행위라인만큼 고독한 투쟁의 이미지가 강하게 연상된다. 그런 의미에서 권투만화 [허리케인 죠]의 주인공 죠의 고독함이 부각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태생이 천애고아에 거처를 정하지 않고 방랑하는 죠는 코치나 숙명의 라이벌과의 만남을 통해 권투를 알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되지만, 근본적으로는 혼자만의 싸움이다. 링 위는 두 개의 운명이 격돌하는 전장이며, 가족도 신분상승의 욕구도 없는 죠의 고독은 결코 결점이 아닌, 오히려 권투를 향한 순수한 열정을 더욱 빛나게 하는 장치다. 즉, 그에게는 권투가 인생의 전부인 것이다. 모든 것을 불태웠다는 죠의 독백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이 많은 독자들에게 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그가 순결한 젊음과 정열의 화신으로 승화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공포의 외인구단 표지
[공포의 외인구단] 표지

순수하게 권투에 몸을 던질 수 있었던 죠는 어떤 의미로 행복하다. 실제로 대부분의 직업 선수들에게 있어 스포츠는 현실적인 수익원이자 장래이며 위신이다. [공포의 외인구단]의 주인공 오혜성을 비롯한 동료 선수들에게 이 사실은 아플 정도로 생생히 다가오는데, 그것은 이들이 야구가 없으면 사회에 일절 가치도 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스포츠는 자신들을 해하고 버린 사회에 대한 복수의 수단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유일한 수단이다. 순수하게 스포츠 그 자체를 위해 육신을 불사르는 순결한 정열 대신, 야구를 통해 주어진 특권을, 힘을, 승리를 다시는 빼앗기지 않고 물러날 수 없다는 처절한 비장함이 서려있다. 그래서인지 팀 스포츠임에도 불과하고 선수들간의 우정이나 친교보다 각자의 고립감과 야심이 강조된다. 애당초 오혜성이 야구에 매진한 목적이 엄지였으니 마지막에는 야구보다 그녀를 우선하는 결말 역시, 스포츠가 인생의 전부일 수 없는 삶의 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소녀 파이트 표지
[소녀 파이트] 표지

스포츠가 생계를 비롯한 삶의 다른 것들과 직결될 수밖에 없는 직업선수들의 구질구질한 현실성을 기피하기 위해서, 혹은 독자층과 비슷한 연령대를 유지하기 위해 스포츠 만화의 대부분은 소년, 청소년 선수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런 나이대의 주인공에게 중요한 테마는 역시 “성장”이다. 진정한 성장이란 단순히 강해지고 커지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던 것, 두려워하던 것을 향해 정면으로 맞서고 받아들이고 이겨내는 것이다. 배구만화 [소녀 파이트]의 주인공 네리는 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상처를 입고, 그 책임을 자기 자신과 언니의 부상을 야기한 상대팀에게 돌린다. 하지만 네리가 선수로써 성장하고 단련되기 위해서는 그 팀의 시합을 끝까지 보고 팀이 소속된 스포츠 명문고에 입학하며 고된 훈련을 통해 자신의 두려움과 결점을 정면으로 응시해야만 한다. 성장을 위한 필수요소, 통과의례인 성장통인 것이다. 선수로써의 성장과 인간으로써의 성장은 함께한다.

크게 휘두르며 표지
[크게 휘두르며] 표지

성장은 사실 혼자서만은 이룰 수 없다. 상냥하게 돌봐주는 친구든, 엄격히 다그치는 선배든, 맞설 가치가 있는 라이벌이든 상대적인 존재, 즉 타인이 있어야 한다. 또한 아무래도 팀 스포츠는 동료 선수들과의 화합과 단결이 중시되니, 많은 스포츠만화가 선수들간의 우정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크게 휘두르며]는 조금 특별하다. 고등학교 야구부가 배경으로, 포수 아베와 투수 미하시의 우정과 성장을 그린 이 만화는 흔히 부부라고 불릴 정도로 야구에 있어 핵심적인 포수와 투수의 관계를 작품의 핵심추로 잡고 있다. 이러한 관계성을 중심으로 다루기에 팀이라는 것이 한두명의 에이스가 이끌어가고 나머지는 단순한 보조역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각자 강점과 단점을 두루 갖춘 불완전한 선수들로 이루어진 상호보완적 유기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각인시킨다. 진정한 살아 숨쉬는 스포츠의 모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