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웹툰 <창백한 말> -추혜연 작가
신보라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작화로 유명한 추혜연 작가의 다음 웹툰 <창백한 말>. 이 작품은 1800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마녀로 불리는 불사의 여인 ‘로즈’와 로즈로부터 나온 흡혈귀들, 그런 흡혈귀들과 로즈를 사냥하는 ‘사냥꾼’들의 이야기다.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은 동화 <눈의 여왕>을 모티브로 잔인하고 슬픈 결말을 맞이한다.
2부가 시작되며 현대 영화의 좀비의 모습과 흡사한 흡혈귀, 중세라는 시공간적 배경, 마녀사냥, 연금술이라는 흥미로운 키워드로 방대한 세계관을 이루고 있다. 표절 공방도 있었지만 여전히 퀄리티 높은 작화와 이야기로 많은 작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창백한 말>의 배경이 되는 중세와 마녀사냥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중세 초기에는 사회가 다소 혼란했지만 중세 후기에 단테의 <신곡>이 완성되었고 피렌체의 인문주의가 꽃을 피웠다. 로마가 멸망한 뒤에도 1000년 동안 비잔티움 문화 속에 살아남은 동방 제국의 중세가 있었다. 물론 중세 유럽은 기아와 빈곤에 시달렸지만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구수가 제자리를 찾았다. 마녀사냥이 있었지만 여성혐오증의 극단적 증거인 <마녀들의 망치>는 1486년 중세의 끄트머리에 나왔으며, 마녀들에 대한 가장 무자비한 박해는 르네상스 시기부터 이뤄졌다는 전문가의 의견이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제국’이라는 초국가적 개념이 등장했다. 게르만족을 중심으로 야만족들이 대이동을 했고, 로마제국을 침입한 이민족 문화와 그리스도교와 라틴 문화 등이 결합했다. 오늘날 갈등의 뿌리가 되기도 했다. 661년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4대 칼리프였던 알리의 암살사건은 시아파와 수니파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과학과 기술은 고대를 계승했고 다양한 혼종성이 나타난다. 중세인들은 고대 문화를 백과사전식 요약본으로 정리해 고대의 철학, 과학, 기술의 지식을 후대에 전달했다. 14~17세기 아랍 세계의 과학 수준은 서양 과학 분야보다 앞서기도 했다. 돛과 키의 개선 덕에 콜럼버스는 아메리카에 도착할 수 있었다. 1차 산업혁명에 해당하는 수공업 혁명이 이뤄져 도시가 번창했고, 커다란 교회가 들어섰다. 로저 베이컨,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글을 썼다. 은행, 병원제도가 생겼으며 아라비아숫자, 음표가 나타났다. 그레고리오 성가를 서유럽으로 전파하기 위해 악보가 발명됐다. 오늘날 사용하는 부기, 단추, 속옷, 셔츠, 서랍, 바지, 식탁, 포크, 시계, 안경이 생겼다. 활판인쇄술의 발전으로 책이 출판되었다.
우리가 이제 주목할 것은 중세 시대 유럽 전역에서 횡행했던 마녀사냥이다
사람들은 수상한 행동을 하거나 몸에 이상한 흉터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여인들을 마녀로 몰아 재판관에게 고발했다. 고발된 여인들은 곧바로 마녀재판에 회부됐고 악마와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무자비한 고문을 받다가 화형 또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마녀사냥이 처음 시작된 것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1486년 로마의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한 권의 책을 받게 된다. 도미니크회의 신부 요하네스와 하인리히가 쓴 <마녀의 망치>에는 마녀를 색출하고 처벌하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를 본 교황은 한 가지 묘안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권위가 크게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교황은 이 책을 근거로 교회에 대항하는 이단자들을 마녀로 몰아 처벌함으로써 교황청의 위상을 높이려 한 것이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400여 년 동안 마녀로 몰려 희생된 사람의 수는 무려 50만 명에 달한다. 16세기까지는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17세기 유럽 전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마녀사냥으로 희생된 이들 가운데 절반가량이 이 시기에 집중됐는데 왜 하필 17세기였을까?
2010년 중세의 마녀사냥을 연구하던 독일 자를란트 대학의 역사학자 볼프강 베링어 교수는 날씨에서 답을 찾았다. 당시 유럽에서는 지구의 평균 기온인 13도씨보다 기온이 2도나 낮은 추운 날씨가 지속되고 있었다. 여름에도 평균 기온이 7도를 넘지 않아 농작물이 잘 자라지 못했고 그마저도 수확 전에 냉해를 입기 일쑤였다. 템스강의 경우 완전히 결빙된 것은 26차례인데 그중 절반 이상이 17세기에 발생했다. 영국 해협에는 폭 5km의 얼음 띠기 생성되어 선박 운항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최근의 연구 결과 추위가 절정에 이르렀던 17세기 중반에 태양의 흑점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태양의 활동량과 정비례하는 태양 흑점의 개수가 줄었다는 것은 태양의 활동이 그만큼 약해졌다는 의미로 추운 날씨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기온의 하강은 기상 이변으로 이어졌다. 낮은 기온에 홍수와 우박, 돌풍이 계속됐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게 된다.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아 평균 키가 100년 전에 비해 2cm나 줄었으며 여기에 비위생적인 환경까지 더해지면서,발진티푸스, 장티푸스 같은 각종 질병에 노출된 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황폐해져만 갔다.
굶주린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르게 풍족하게 지내는 부자들을 점점 질시하게 됐다. 그들은 부자들의 식량을 나눠 갖길 원했고 그 방법으로 마녀사냥을 이용했다.
그리하여 추운 날씨를 마녀의 탓으로 돌리고 이에 무관한 여인들을 마녀로 몰았다. 마녀로 고발된 여인들은 대부분 돈 많은 미망인이었다. 여인이 부자면 부자일수록 더 많은 식량을 약탈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마녀사냥은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당시 마녀를 재판했던 이들은 교황청 소속의 재판관이었지만 이들은 사람들의 광기 어린 마녀사냥 묵인했다. 돈 때문이었다. 재판관들은 마녀로 몰린 여인의 재산과 토지를 몰수했고 이는 고스란히 교황에게 전달됐다. 희생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교황청은 더 많은 마녀를 만들어 내길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재판이 열려야만 했다. 때문에 원래는 종교 재판소에서만 이뤄지던 마녀재판을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곳곳에 재판관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렇게 서민들과 교황청의 이해관계 속에 마녀사냥은 걷잡을 수없이 번져 나갔고 수십만의 여인들이 비극적인 현실 앞에 연기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