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속을 채우는, 시공간을 초월한 한 사람의 역사
근희
흑과 백, 네모난 프레임 안에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시공간을 초월한 한 사람의 역사가 색깔 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나는 멈추고 싶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내 손을 당장 거두고 책을 덮고 싶은 심정이었다. 땅만 보고 걷는 습관이 생긴 사람이 있었다. 앞에 선 사람을 보지 못해 화들짝 놀라고 마는 그녀의 75년 전 일이 어제 일어난 일인 것처럼 선명한 고통으로 와닿았다. 이옥선. 이 세 글자로 이생을 살아내는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가 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남자인 오라비와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취급당했다. 몹시 궁핍한 사정으로 입 하나 더는 것이 급했는지, 자식이 굶지 않는 것이 먼저였는지 영영 확인할 길 없이 부산 우동집으로 팔려 갔다. 그곳에서 술 따르는 것을 거부했다가 울산 술집으로 또 팔려 가게 된 것이다.
식민지기 조선은 가난한 집안의 여자아이들을 그 가장에게 10엔이나 20엔 정도 주고 데려다가 양녀로 삼았다. 팔려 다니며 식모로 착취당했고 창기나 작부 같은 접객부로 팔아넘겨 버렸다. 길거리를 다니다가 인신매매를 당하기도 했다.
옥선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울산 어느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납치를 당해 연길로 가게 된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 기차 안에는 이미 비슷한 사정의 여성들로 빼곡했다. 낭떠러지 산을 둘러가는 기차에서 뛰어내려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옥선은 그러지 못했다. 어떤 식으로든지 죽지 않으면 빠져나오지 못 할 거라 생각했던 연길 위안소. 살아있는 존재의 존엄과 인권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어린 여자아이들을 노리개 취급하며 성노예로 삼는 것이 자신들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자신들이 누려야 할 인권인 것처럼 행동했던 일본군과 위안소 주인, 징모업자 등 한 사람의 역사를 파괴했던 잔인한 파렴치한만 사람의 가죽을 입고 있었다. 힘없는 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냥 어쩌다 일어난 사건쯤으로 치부하고 덮어버려도 되는 걸까. 가당찮다. 인권은 다수 혹은 공공의 것이나 권력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지극히 한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개인들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너무나 큰 희생양이 되었다. 일본군 위안소는 일제의 침략 전쟁이 치러진 모든 국가·지역에 설치되었다.
나는 <풀> 보는 내내 입을 틀어막거나 두 눈을 질끈 감아야 할 때가 많았다. 아니, 겨우 눈을 뜨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옥선은 자꾸만 머리카락이 빠졌다. 손바닥에 발진이 일었고 아래가 헐어 고통에 허덕였다. 더 군인을 받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위안소 주인은 옥선을 군대 병원으로 보냈다. 매독이었다. 606호 주사(살바르산)를 맞았지만 두 달이 지나도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위안소 주인에게 옥선은 곧 돈이었다. 그녀를 다시 데려왔다.
“어디선가 수은을 구해 왔어. 군의관에게 받아왔다는데 그걸 작은 종지에 부어놓고 불로 끓여서 그 김을 쐬라고 하더군. 얼굴을 가리고 아래옷을 벗은 뒤 수은 액체가 끓는 종지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 김을 쐬게 했어. 결국 병은 나았지만, 그 때문에 평생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었지”
<풀>은 내게 흑과 백, 선의 굵기만으로 이옥선 여사의 역사를 가감 없이 느끼게 해주었다. 다만 나는 평론가나 만화가가 아니어서 기술적인 부분을 논할 수 없다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다행이기도 하다. 75년 전 한 소녀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 거대한 역사 안에서 어떻게 얽히게 되었는지 더 공부하고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옥선 여사는 광복이 되어서도 귀향하지 못하시다가 2000년에 귀국을 하셨다. 가족과 조우했지만, 자신이 위안소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안 보려 했다는 부분도 가슴 아팠다. 피해자도 가족도, 모두가 아픈 상처로 남은 것이다.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계시는 여사님들께 인터뷰나 촬영 요청을 해오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매번 그럴 때마다 어린 옥선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대면하셨을까. 물론 연세가 있으셔서 뒤틀려 가는 기억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지독한 한스러움은 절대 무뎌지지 않으리. 아직 고통의 역사는 계속 되고 있다. 여성이라는 존재의 차별과 억압의 서사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졌고 더 많이 알려지는 중에 있으므로 더 많은 사람이 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작가가 말한 대로 ‘쓰러져도 일어나는 풀’처럼, 민들레 홀씨처럼 더 멀리 날아가리라 믿는다.
수묵의 가늘고 두꺼운 선으로 그려진 수많은 풀과 민들레를 생각하니 문득 이 장면이 떠오른다. 불바다가 된 연길 시내를 떠돌던 여섯 명의 우리.
“살겠다고 살아남겠다고 함께 다니던 우리 여섯은 뿔뿔이 흩어졌어. 어떤 날은 밥 한 숟갈 겨우 얻어먹고 걷다가...... 어떤 날은 거리에서 밥을 빌다가.... 힘이 없으면 어디건 그냥 쓰러져서 잤어. 그렇게 한숨 자고 일어나 보면 큰길 한복판일 때도 있었지. 하늘 아래 내가 잔 곳이 그냥 내 집이었어.”
민들레 씨앗이 움트는데 참 오랜 시간이 걸리는 중이다. 그래도, 꼭 움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