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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웹툰

2020-12-08 박꽃


 

△ <비혼주의자 마리아> <서늘한 여름밤의 내가 느낀 심리학 썰> <며느라기>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젊은 세대가 주로 소비하는 가벼운 즐길 거리로 인식돼온 웹툰이 사회적 안건을 부드럽게 공론화하고 세간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콘텐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웹툰 전문 플랫폼에 연재되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작가 개인이 개설한 블로그나 SNS 계정을 통해 게재 날짜와 분량을 비교적 자유롭게 조절하며 업로드된다. 해당 작품의 명료한 세계관에 매료된 독자가 하나둘 늘어나고 작품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 ‘팔로워’나 ‘좋아요’, ‘하트’ 등의 표식으로 지지와 호응이 누적된다. 온라인상에서 충분한 인지도를 쌓은 작가는 작품의 지향과 일치하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다양한 주체와 공익성 캠페인, 마케팅 협업, 영상화 계약을 맺고 영향력을 확장하기도 한다. ‘세상을 바꾸는 웹툰’의 등장이다.




‘우울하면 나약한 사람?’ 인식 변화 이끈 웹툰


2015년 개인 블로그를 통해 연재를 시작한 ‘서늘한여름밤’ 작가의 웹툰 <서늘한여름밤의 내가 느낀 심리학 썰>은 심한 우울감이나 감정 기복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사며 인기를 얻었다. 대형병원의 임상심리전문가 수련을 그만둔 뒤 “나와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에게 용기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간단한 만화를 그려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한 서늘한여름밤 작가는 ‘병원수련 나온 이야기’, ‘우울증이 있었던 이야기’ 등을 차례로 연재했다. 특히 “기질적으로 체온조절이 어려운 사람이 있듯 나는 감정조절이 어렵다”고 설명하는 웹툰은 남보다 쉽게 감정적인 곤란을 겪는 사람이 결코 나약하거나 잘못돼서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심리상담과 그 상담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덜어냈다는 평가를 받는 서늘한여름밤 작가의 웹툰은 단행본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로 정리돼 2017년 출간됐다. 올해 2월까지 9쇄를 인쇄할 정도로 수요는 꾸준하다. 



△ 서늘한여름밤 작가의 <서늘한여름밤의 내가 느낀 심리학 썰>


서늘한여름밤 작가는 “내 이야기를 더 많은 분께 들려드리고 싶었다. 전공자로서 심리 상담에 대해 모르는 것, 오해하고 있는 것, 고민해야할 것을 알려주려고 했다”고 웹툰 연재 이유를 들었다. 작품에 관한 대중적 호응에 관해서는 “우울증이 있었던 이야기, 상담을 받거나 정신과 약을 먹은 이야기 등 정신 건강에 관해 사람들이 쉽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부분을 공유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짚었다. 서늘한여름밤 작가는 2019년 보건복지부 중앙자살예방센터가 함께한 ‘세바시 자살예방 특집 강연회’에 출연해 “우울증을 관리하고 살아간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나에게 다정한 하루>(2018) <우리의 사랑은 언제 불행해질까>(2019) 등 인간의 심리와 불안을 이야기하는 단행본을 꾸준히 출간해온 그는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로 인해 용기를 얻었다는 말을 들을 때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며느리는 일하는 사람? 아니죠~’ 60만 구독자로 반향 일으켜


2017년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계정에 업로드된 ‘수신지’ 작가의 웹툰 <며느라기>는 평범한 직장인 여성 ‘사린’이 한 집안의 며느리가 된 뒤 경험하는 크고 작은 불편한 상황을 다룬다. ‘제사’, ‘설날’ 등 일상적인 소재를 거치며 남편 집안의 가사와 각종 행사를 당연하게 도맡던 주인공의 인식이 점차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 작품은 온라인, 오프라인 모두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SNS 계정에서 누적 60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리게 된 <며느라기>는 ‘2017 오늘의 우리만화’에 선정되고 2018 대한민국 콘텐츠대상 문화체육부장관상을 수상하면서 그해 가장 주목받은 웹툰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작품성과 흥행성 모두를 높게 평가받은 <며느라기>는 박하선, 권율 주연의 웹드라마로 제작이 확정돼 지난 11월 21일(토) 카카오TV에서 최초 공개됐다.



△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



수신지 작가는 “독자들의 공통적인 반응이 있었다. 크게 문제 삼기에는 너무 사소한 차별이라 자신이 예민한 게 아닐까 자기검열을 한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며느라기>라는 콘텐츠로 완성된 이야기를 보면서 ‘그 정도는 참을만한 일’이었던 것이 ‘사실은 문제가 될 만한 일’이었다는 걸 자각한 것”이라고 작품의 의미를 짚었다. 또 “(기성 웹툰 플랫폼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연재를 해야 했지만, SNS를 이용하면서 추석 같은 명절마다 그에 맞는 에피소드를 그려 매일매일 연재할 수 있었다. 실제 시간과 만화 속 시간을 딱 맞춘 것이 재미 요소가 되기도 했다”고 부연했다. “<며느라기>를 그리면서 만화의 효용성을 몸으로 느꼈다”는 수신지 작가는 낙태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담은 신작 <곤 GONE>을 <며느라기>와 같은 방식으로 연재 중이다. “어떤 메시지가 문구로만 존재할 때와 이야기를 품은 만화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의 힘 차이를 느꼈기 때문”이다.

 


수준 높아진 대중, ‘세상을 바꾸는 웹툰’ 더 원할 것


사회적 이야깃거리를 끄집어내고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웹툰의 흐름은 더욱 확장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대중이 그런 작품을 원하기 때문이다. 수신지 작가는 지난 2019년 3월부터 한겨레 신문의 제안으로 네 컷 분량의 만화 코너 <사람이 살고있습니다>를 격주 연재하며 ‘배드파더스’, ‘N번방’ 등 보편적인 인권과 관련된 소재를 다뤘다. “여러 웹툰 플랫폼이 <며느라기> 연재 제안을 모두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SNS를 통해 작품을 공개하기로 한 지 3년여 만에 생긴 변화다. 기성 언론 매체 진출은 더욱 넓어진 독자층을 대상으로 인권, 젠더 감수성을 갖춘 작품을 선보이는 발판이 됐다. 수신지 작가는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로 나를 처음 알게 됐다는 분을 많이 만났다. 신문을 사보는 어른들이 많이들 보시는 것 같다”고 추이를 설명했다. 


△ 안정혜 작가의 <비혼주의자 마리아>


네이버웹툰, 카카오페이지 등 대형 웹툰 플랫폼에서도 이제는 가정폭력 문제, 페미니즘 소재 등을 다루는 작품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가정폭력으로 신음하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와난 작가 호러 웹툰 <집이 없어>, 비슷한 설정에 8~90년대생 여성이 경험하는 성차별요소를 더한 다온 작가의 <땅 보고 걷는 아이> 등이 대표적이다. 기독교 웹툰 플랫폼 에끌툰에 연재된 안정혜 작가의 <비혼주의자 마리아>는 교회 내 성폭력 문제를 다루면서 누적 조회수 100만 회를 달성했고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선정한 ‘2019 우수만화도서’에 선정됐다. 박혜리 대전대학교 영상애니메이션학과 겸임교수는 “과거에는 작가주의 만화에 한정해서 사회적 이슈를 다뤘다면 지금은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콘텐츠에서도 관련 소재를 다룬다”면서 “네이버웹툰처럼 전연령을 아우르는 대중적인 콘텐츠를 다루는 플랫폼에 가정폭력, 페미니즘, 노동 등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웹툰이 업로드된다는 건 독자가 그만큼 다양한 콘텐츠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갖추게 됐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이 지속되는 한, 그로 인해 생겨나는 사회경제적 어려움과 그것을 극복하는 내용의 더욱 웹툰이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상을 바꾸는 웹툰’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기대해봄직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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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꽃

무비스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