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독자들에겐 생소한 기업 이름이 있다. 바로 일본의 ‘셀시스(Celsys)’다. 하지만 웹툰을 많이 봤던, 그리고 작가 인터뷰를 자주 접하거나 소셜미디어 등을 팔로우하고 있는 독자라면 ‘클립스튜디오 페인트(Clip Studio Paint)’, 또는 ‘클튜’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셀시스는 이 클립스튜디오 페인트를 만들고 운영하는 기업이다.
지난 9월 말, 셀시스는 네이버웹툰의 본사인 북미 웹툰엔터테인먼트와 기술 제휴를 맺는다고 밝혔다. 그동안 네이버웹툰이 ‘기술제휴’를 맺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이번에는 많은 웹툰 작가들이 사용하는 ‘클립스튜디오 페인트’의 경우에는 기술제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장점이 더 많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웹툰 플랫폼의 ‘기술제휴’가 가지는 의미
‘만화’와 ‘웹툰’의 결정적인 차이는 뭘까? 페이지 연출과 세로 스크롤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차이는 IT 기술의 접목 가능성이다.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종이책은 감상의 측면에서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을 접목하기 어렵다. 하지만 웹툰은 이미 10년도 전에 BGM이 개발됐고, 그동안 수많은 기술들이 접목되어 왔다.
비단 감상뿐만이 아니라, 제작의 측면에서도 기술 접목이 가능하다. 네이버웹툰이 최근 공개한 AI 페인터처럼 인공지능을 이용한 채색이라던지, 상용화를 목표로 개발중이라는 ‘오토드로잉’이 그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포토샵을 운영하는 어도비에서도 드로잉 특화 기술들을 개발해 내놓고 있고, 와콤과 같은 하드웨어 기업 역시 아티스트들과 협업해 제품 개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 중에서 웹툰-만화 작가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전문가 도구가 바로 클립스튜디오 페인트다. 기술제휴 발표가 있기 전, 웹툰엔터테인먼트에서 운영하는 북미 아마추어 자유연재 플랫폼인 ‘웹툰 캔바스(Webtoon Canvas)’와 북미 네이버웹툰은 클립스튜디오페인트, 와콤과 함께 8월 21-22일(현지시간) 양일간 캔바스에서 연재중인 인기 작가들과 함께 웹툰 제작의 기초부터 완성까지를 배울 수 있는 워크숍을 진행했다.
이번 기술 제휴 직전에 펼쳐진 이 행사는, 이번 기술제휴가 향후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두 기업이 모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한국에서 웹툰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건 다양한 개인 창작자의 작품이 쏟아져 나왔던 2000년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제 막 시장을 개척하는 해외 시장에서는 보다 다양한 창작자들이 안정적인 작품활동을 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특히 아직은 해외 시장에 생소한 스크롤 연출과 웹툰 최적화를 빠르게 전파하려면 창작자들에게 직접 ‘이런 방법이 있다’는 점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직접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도구인 클립스튜디오 페인트와 네이버웹툰이 직접 제휴해 스크롤 방식에 최적화된 기능을 추가하기 시작한다면, 웹툰 창작자 입장에선 클립스튜디오가 가장 최적화된 도구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다. 네이버웹툰의 입장에서도 웹툰에 최적화된 창작도구인 클립스튜디오 페인트와 기술제휴를 맺고 ‘오토드로잉’에 필요한 기능들을 습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웹툰엔터테인먼트는 “번역”까지 노린다
네이버웹툰이 보도자료를 통해 발표한 이번 기술제휴 파트너십 체결의 내용에는 ‘웹툰 콘텐츠 제작, 번역, 배포의 효율성을 끌어올린다’는 문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웹툰엔터테인먼트는 ‘번역 부분에서 역량 강화를 기대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웹툰을 만드는 기업과 웹툰 제작도구를 만드는 기업이 번역이라니?
웹툰엔터테인먼트의 모기업인 네이버가 운영하는 파파고는 인공지능 번역 서비스인 ‘파파고’를 운영중이다. 이미 네이버는 아이돌과 소통할 수 있는 서비스인 브이라이브(V LIVE)에 파파고 번역 기능을 추가했고, 팬들이 직접 번역할 수 있는 ‘FANSUB(Fan+Subtitle)’기능도 가지고 있다. 네이버웹툰이 가진 방대한 데이터와 자동번역 기능을 추가한다면, 번역과 검수에 시간이 걸리던 작업을 자동번역-검수로 간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셀시스가 전세계에 서비스중인 것을 감안하면, 전세계 1천만명 이상이 사용하는 창작도구인 클립스튜디오 페인트와 낼 수 있는 시너지는 창작 분야에서는 꽤 기대가 된다. 다만, 일반적인 문서를 번역하는 것과 달리 캐릭터의 특성, 작품의 내적인 맥락을 파악해야 하는 만화 번역의 연장선에서 웹툰 번역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당장의 성과보단 기술제휴를 통한 고도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보인다.
‘각자 알아서’에서 한발 더
이번 기술제휴는 단순히 플랫폼과 플랫폼의 기술이 서로 만났다는 평가만 단편적으로 내리긴 어렵다. 네이버웹툰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과 플랫폼의 역량, 그리고 클립스튜디오라는 플랫폼이 가지고 있는 충성고객과 노하우가 만났다고 보아야 한다.
그동안 웹툰의 창작은 개인의 스타일에 따라 다르고, 도구를 쓰는 방식에 따라 달랐다. 일부 사설 학원이나 유튜브를 통해 독학하거나, 책을 구매해 도구 쓰는 법을 익히는 것이 가장 먼저였다. 그러다 보니 전체 기능의 일부만 사용하거나, 아니면 노하우를 전수받지 못하면 비효율적인 작업을 해야 하는 등 작가마다의 편차가 컸다.
△ 2019년 공개된 클립스튜디오 인공지능 채색
하지만 웹툰 캔바스 등을 통해 작가 커뮤니티를 보유한 네이버웹툰과 셀시스가 만난다면, 앞서 펼쳐졌던 워크샵 등과 같이 작가들에게 직접 사용법과 노하우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도 있고, 네이버웹툰이 작가들에게 직접 설문을 해 셀시스에 전달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 프로그램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셀시스가 2019년 공개한 인공지능 채색 등이 더욱 고도화되어 작가들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네이버웹툰의 서비스가 클립스튜디오 안에 애드온(Add-On)이나 플러그인처럼 추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작가들이 ‘각자 알아서’ 하던 창작이 한발 더 나아가 조금 더 정교한 프로세스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원스탑 서비스도 가능해질까
지금까지 작가들은 배경은 주로 스케치업에서, 주된 창작은 클립스튜디오에서, 후보정 등 후반작업은 포토샵에서 하고 있다. 신인 창작자들에게는 이 프로그램들의 월 구독료도 부담이다. 이들 프로그램 제공사들 중에서 ‘만화 창작’에 관련된 애셋을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곳은 클립스튜디오가 유일하다.
△ 클립스튜디오 페인트가 제공하는 '클립스튜디오 에셋'
물론, 어도비 역시 사진이나 그림 애셋들을 제공하는 ‘어도비 스탁(Adobe Stock)’을 운영하곤 있지만, 주로 사진이나 영상 제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 셀시스에서 운영하는 클립스튜디오 애셋(Clip Studio Assets)에서는 만화 창작에 필요한 브러시부터 배경이나 소품을 그릴 때 필요한 3D 도구들까지 다양한 애셋들을 선보이고 있다. 모두 클립스튜디오에서 제작해 구동되는 것이다 보니, 여기저기 옮겨다닐 필요가 없다는 장점도 있다.
네이버웹툰과의 기술제휴가 창작의 전반을 기술로 풀어내 모두에게 열린 창작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면, 클립스튜디오 애셋은 여러 개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만화 창작의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예상보다 아주 빠른 기술의 발전 속도는 과연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놓을까?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