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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와 아마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만화나 글처럼 ‘창작’을 하는 쪽에서도 프로와 아마추어란 자기가 내놓은 창작물을 팔아서 ‘밥을 벌어먹고 살 수 있느냐’를 잣대로 구분한다. 때문에 대체로 고료나 인세 등 돈을 남에게서 받을 수 있는 창구에 이름을 올려놓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프로의 관건이다...

2009-06-11 서찬휘

프로와 아마. 어떤 일을 전문으로 또는 직업적으로 하는 이를 뜻하는 프로페셔널(professional)과 그 반대로 직업적, 전문적이지 않은 활동을 하는 아마추어(amateur)를 각각 줄인 말이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로 꼽을 수 있는 건 전 세계 아마추어 체육인 최대의 잔치라 할 수 있는 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쿠베르탱 남작(1863~1937)의 “인간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척도는 그 사람이 승리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느 정도 노력하였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승리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정당당히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라는 말이다. 이렇듯 아마추어는 결과로 향하는 과정에서 들이는 노력과 마음가짐을 중요하게 여기며, 결과에 따른 성과는 명예와 이름값 그리고 기록으로 남는다.

반면, 프로의 세계는 이와 반대로 냉혹한 정글의 논리로 설명되곤 한다. 실력이 결과로 이어지고, 그 결과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며 때론 그에 따른 성과에 진행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묻어두는 게 되레 미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에서 프로의 성과는 곧 금전적, 상업적 이익으로 연결되곤 한다. 이런 탓에 프로와 아마를 구분하는 척도로 다른 무엇보다 ‘돈’을 드는 경우가 많다.
결국 아마는 상업적인 활동보다는 해당 분야에 관한 순수한 탐구와 도전 정신으로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정진하며, 순수한 노력을 추구하기보다 능력만큼 돈을 버는 ‘직업’으로 그 분야에 뛰어들고자 하는 이는 프로가 되고자 한다. 이것이 프로와 아마를 이야기하는 보편적인 인식이다. 많은 이들이 아마추어 활동을 기반으로 실력을 쌓다가 프로로 올라서는 과정을 거치며, 시장과 업계는 공모전이나 스카우트 등 이런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들을 다수 마련하고 있다.
이렇게 프로 무대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데뷔(debut), 또는 일본어에서 잘못 전해진 은어로 ‘입봉’이라 일컫기도 한다.


만화나 글처럼 ‘창작’을 하는 쪽에서도 프로와 아마추어란 자기가 내놓은 창작물을 팔아서 ‘밥을 벌어먹고 살 수 있느냐’를 잣대로 구분한다. 때문에 대체로 고료나 인세 등 돈을 남에게서 받을 수 있는 창구에 이름을 올려놓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프로의 관건이다. 흔히 문단에서 일컫는 ‘등단(登壇)’은 문예적 소양과 능력을 주최사와 심사위원들에게 인정받았음을 뜻한다는 점에서 데뷔와 크게 다르진 않으나 순수문학이라 불리는 계열에서는 상업성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어 대체로 일반적인 대중·상업 예술을 표방하는 이들은 프로 무대에 들어서는 행위를 가리켜 ‘프로 데뷔’라는 표현을 주로 쓴다.

만화의 경우 다른 분야에 비해 아마가 프로, 인디·언어와 함께 판의 큰 축을 이루고 있다. 만화계에서 아마는 흔히 동인(同人)이라는 표현으로 불린다. 본래 동인이란 ‘어떤 일에 뜻을 같이 하여 모인 이들’을 뜻하는 표현으로 현재는 만화 쪽 아마들에게 주로 쓰이고 있으나 시(詩) 동인을 비롯해 비상업적인 활동을 펼치는 이들을 뜻한다.
만화 동인은 일본에서 동인지즉매회, 국내에서 만화 동인 행사 등으로 불리고 있는 판매 행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직접 창작한 작품 또는 만화·애니메이션·소설·게임 등 다양한 매체 장르의 패러디를 만화로 그려 책으로 묶어낸다. 이렇게 묶어낸 책을 가리켜 ‘만화 동인지’, 통칭 ’동인지‘라 부른다.

다른 분야와 만화 동인- 정확하게 보자면 이젠 ‘서브컬처 동인’ -들이 다른 점이 있다면, 만화 동인들은 판매전이라 하는 행사를 통해 독자들을 대체로 정기적인 간격을 두고 꾸준히, 그리고 직접 만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러한 ‘독자’를 직접 만나고 이들에게 자기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실력 향상을 꾀하며, 한편으로는 자기가 보고 싶고 추구하고 싶은 방향을 누구에게 간섭받지 않고 그리는 데에 천착한다.
프로가 ‘남의 돈을 받는’ 상업 활동을 기반으로 하기에 자연히 돈을 지급하는 쪽의 간섭이 적으나 크나 들어올 수밖에 없다는 점이 있는데 비해 아마는 돈을 누가 주지 않는 대신 간섭에서 자유롭다. 바꿔 말하면 만화 동인은 활동이 자유로운 데 비해 상업적인 이익을 얻기 어렵다. 이런 연유로 만화 동인 활동은 비상업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실력향상을 위해 노력한다는 지극히 ‘아마다운 명분’과 함께, 자연히 자기 작품의 가치를 대가로 받을 수 있는 프로가 되기 위한 전 단계로써 인식되었다. 공식 활동이라는 상징성과 ‘작가’라는 타이틀, 그리고 공적으로 반응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프로였다.

80년대 중후반 이후 도래한 국내 만화 동인계의 흐름은 ‘순수한 아마 정신의 추구’과 더불어, 이렇듯 프로 상비군이라는 현실적 인식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추어 만화 활동을 통해 독자들의 반응을 얻은 이들은 공모전을 통해서나 매체 관계자들의 제안을 받고 지면에 ‘프로 작가’로 공식 데뷔를 했으며, 이러한 성공사례에 경도된 후진들이 끊임없이 수혈되는 순환구조를 갖추기에 이른다. 이것이 1990년대 말엽까지의 상황이다.


그런데 만화 동인은 동인지 판매 행사라는 독특한 ‘정기 시장’을 통해 유지되고 있다 보니 다른 매체 장르들과는 다른 면을 보인다. 아마 활동을 하는 이들이 소설이나 시 쪽에 없지 않으나, 이들이 수익보다 발표에 가치를 두는 편인데 비해 만화 동인들은 독자를 판매자로서 직접 만나고 직접 돈을 받는다.
행사가 반복되며 아마는 그 자체로 생산과 소비, 유통과 판매가 이뤄지는 말 그대로의 ‘시장’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 말은 바꿔 말해 아마면서도 상업적인 수익을 추구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게 됐다는 뜻이다. 물론 동인지로 수익을 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나, 시장 팽창과 굳이 프로로 갈 생각 없이 인기리에 활동하는 일부 큰손(오오테, 유명한 동인을 뜻하며 이런 이들을 다른 동아리의 판매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벽으로 몰아놓는다 해서 벽부스라고도 부른다)들은 만화 동인계를 단순히 데뷔를 목표로 수련하는 프로 상비군 집단이라고 볼 수 없게 했다.

게다가 1990년대 말엽 이후 불어 닥친 시장 불황과 초고속 인터넷의 발달은 이러한 조류를 한층 더 가속화시켰다. 행사장을 벗어난 교류가 가능해짐은 물론, 질적인 면도 높아진 기대치만큼을 충족시키기 시작한다. 단순히 프로 데뷔가 아니라 그 무대 자체에서 자기 독자들을 만나는 것을 1차 목표로 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실제로 작품의 질이나 만족도 또한 프로 무대에서 발표되는 작품들을 추월하는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불황의 여파로 프로로서 얻을 수 있는 상업적 성과가 낮아진 데 비해 아마로 활동하면서도 낮아진 프로 이상의 상업적 성과를 낼 여지는 높아졌으며, 인터넷 등을 통해 반응을 끌어내기도 용이해졌다.

만화 이미지
만화가 나예리,심혜진의 사례. 상업지면과 달리 자유로운 활동을 펼치고 있음
(출처 : http://blog.naver.com/june0812?Redirect=Log&logNo=110035361019)


이런 탓에 만화 동인 활동과 프로 활동을 병행하는 차원을 넘어서 주 활동 무대를 아마추어로 옮기는 역 엑소더스 사례까지 발생하고 있는 형편이다. 상업적 이익 이전에 프로로 갈 생각 없이도 나름대로 충분한 반응을 얻으며 만족하는 이들까지 합치면 아마와 프로는 이미 경계선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홈페이지 이미지
 
오디오 드라마제작사 야해 홈페이지. 아마추어·언더 성우들을 기용해 제작한 BL물에서부터 현재는 프로 성우들이 참여하는 기획형 오디오 드라마로도 범주를 넓히고 있는 제작사.

또한 ‘만화 동인’이라 부르지만 현재는 게임이나 오디오 드라마, 라이트노벨 등 만화와 연관성을 지니는 서브컬처 장르를 동인으로서 제작하는 이들도 많이들 판에 들어오고 있다. 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한편으로 큰 상업 자본으로만 접근하기 쉬운 프로와는 또 다른 발랄한 발상을 주 무기로 삼으며 만화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 장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방송국 공채로 3년을 보내야 프로가 될 수 있는 성우계도 만화와 라이트노벨을 기반으로 하는 아마추어 오디오 드라마를 제작하는 사례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으며, 게임 또한 전에 없는 관심과 동인계를 넘어 온오프라인 매장을 직접 공략하는 과감성을 보이는 사례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어이쿠 완자님 이미지
게임,「어이쿠 왕자님」대인배들이 제작한 미소년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리브로, 한양문고를 비롯한 온/오프라인 매장에도 직판을 뚫기도 했으며 드라마 CD로도 제작되었다.

여기엔 2000년대 초반 이후 포털의 웹툰이 대세를 이루기 시작하며 재편을 겪은 만화계 상황과 패키지 시장이 몰살당한 게임계 상황 등도 여기에 한 몫을 한다. 게임의 경우 과금이 가능한 온라인 게임이나 일부 콘솔용 타이틀이 아닌 이상 번들·주얼로도 생존하기 어려워졌으며, 만화는 높은 접근성과 무료 정책이 강점인 웹툰이 시장을 형성하며 데뷔를 위한 방식이나 독자의 퀄리티 면에 따른 기대도 등이 완전히 달라진다.

동인지 활동을 하는 만화 동인들도 굳이 프로로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응과 수익을 기대할 수 있게 되는 한편, 기존만큼 작화와 연출, 분량 등에 관한 수련을 파고들지 않아도 잡지와 책으로만 독자를 만날 수 있던 것보다 훨씬 큰 반응과 비용을 끌어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포털의 압도적인 페이지뷰에 비하면 돈을 주고 구입해야 하는 잡지 등의 매체는 접근성이 너무나 떨어짐은 물론 출판 만화시장의 불황과 맞물려 갈수록 종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자연히 데뷔를 위한 방식도 공모전 등보다 훨씬 공개적인 게시판에서 인기를 얻는 형태가 되었으며, 불황과 함께 출판사 공모전 쪽으로 향하는 지망생이나 아마들의 수가 급감한 탓도 있다.

이러한 부분엔 장단점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이후 웹툰 시장이 정체와 기성 작가들 중심의 시장으로 재편되고 마는 단초를 제공하긴 하지만, 일단 많은 이들로 하여금 ‘프로’라는 면에 기대하는 지점과 성과의 선이 기존 관점의 ‘프로’가 아니어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세계대전 만화 이미지
굽시니스트의 「제2차 세계대전만화」. 포털 웹툰이 아닌 디씨인사이드의 카툰연재갤러리에 오르던 작품을 발탁해 책으로 묶어낸 사례.

“작가 소리 듣기 쉬워졌다”는 일각의 비아냥거림도 분명 있긴 하다지만, 현재 프로와 아마는 표면적으로는 단지 공적인 호칭과 명예라는 선을 쥐고 있느냐 아니냐 정도로 차이가 없어지고 있다. 물론 남의 돈을 받는 이상 프로의 원고 마감이 지니는 무게는 가볍게 치부할 것이 아니며 아마로서 피부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오프라인 시장의 불황에서 점차 어느 누구도 안정적인 자리와 수익을 보장해줄 수 없다 할 때, 한계를 두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이라는 아마 특유의 장점이 ‘프로 수준’의 질이나 반응을 끌어내며 전에 없이 좋은 성과들을 내고 있다는 점은 시대적인 화두로 주목해 봐야 할 점이 아닐까.

어쩌면 무너진 벽의 중간 지점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례들은 이러한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방식을 가르쳐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필진이미지

서찬휘

* 만화 칼럼니스트. 
* 《키워드 오덕학》 《나의 만화유산 답사기》 《덕립선언서》 등 저술. 현재 청강문화산업대학교와 백석문화대학교 출강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