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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만화와 메디컬 : (1)녹색 십자가 너머로-의료만화의 세계
의료물, 혹은 의학물. 의료계를 테마로 하는 장르를 말한다. 비록 “병원에서 연애하는 것 뿐”이라는 한국드라마의 고질적인 러브라인 전통에서는 좀처럼 벗어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 주인공들과 병원 배경인 소위 ‘의학드라마’는 언제나 인기와 관심을 받아왔다. 기존 한국 의학드라마에 대한 반동으로 연애요소를 전면 배제하고 병원 사회 안의 정치적 암투와 천재의사의 흥망을 그려낸, 일본 소설 원작 드라마 [하얀거탑]이 화제를 몰았던 것도...
2008-03-03
김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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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Comic & Culture ⑪] 만화와 메디컬
언제부터인가 주위를 둘러보면 병원을 배경으로 하거나, 의사들이 나오는 드라마들이 갑자기 늘어났습니다. 의사가 단순히 캐릭터의 직업이 아니라, 병원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는 메디컬 드라마의 세계. 역시 만화 속에서도 매디컬 분야는 만만치 않은 장르도 자리 잡고 있지요. 한 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 줄을, 다른 한 손에는 그 생명 줄을 끊을 수도 이을수 있는 날카로운 메스를 잡고 있는 의사들. 당연히 이들의 이야기는 늘 흥미진진하지요. 이번 호에서는 이렇게 흥미진진한 메디컬 만화의 세계를 소개 합니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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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십자가 너머로 - 의료만화의 세계
의료물, 혹은 의학물. 의료계를 테마로 하는 장르를 말한다. 비록 “병원에서 연애하는 것 뿐”이라는 한국드라마의 고질적인 러브라인 전통에서는 좀처럼 벗어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 주인공들과 병원 배경인 소위 ‘의학드라마’는 언제나 인기와 관심을 받아왔다. 기존 한국 의학드라마에 대한 반동으로 연애요소를 전면 배제하고 병원 사회 안의 정치적 암투와 천재의사의 흥망을 그려낸, 일본 소설 원작 드라마 [하얀거탑]이 화제를 몰았던 것도, 지나치게 빈번한 나머지 종종 한국드라마의 단점으로도 거론되지만 역으로 그만큼 핵심적이기도 한 연애요소 없이도 상당한 사회적 반향을 몰 수 있었던 것도 부분적으로는 익숙한 관심사인 ‘의료계’를 무대로 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째서 의료계는 이토록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일까.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영역인 만큼, 어떤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존재의의에 대한 탐구 때문인가? 물론 그런 철학적인 원인도 없잖아 있겠지만, 사회적, 역사적인 배경도 중요하다. 사실 서양의학은 근대 서구에서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진 것으로, 원래 의사, 특히 현대 의학물의 꽃으로 [블랙잭], [의룡], [갓핸드 테루] 등 다수 작품의 주인공인 외과의사는 원래는 ‘sawbone (톱쟁이. 뼈를 톱으로 써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라는 경멸적인 단어로 불리며 천시라면 모를까 존경과 선망의 대상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의학은 종교적인 영역과도 깊이 겹쳐, 원래는 한 사회의 주술사, 점쟁이, 샤먼이 약초, 종교의식, 카운셀링을 동반한 복합적인 치료사의 역할을 수행하던 것이 옛적부터의 전통이었다. 하지만 근대에 와서 의학은 종교나 의례 같은 ‘비과학적인’ 영역으로부터 적출되어 이성적이고, 청결하고, 선구적인 말 그대로 현대과학의 가장 우수하면서 아름다운 결과물로써 새롭게 태어난다. (그 극상에 위치하면서 동시에 의학의 발전과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결과물은 물론 ‘전쟁기술’이다.) 덧붙여 의학의 전문화, 세분화는 다양한 의료관련 업종의 탄생 및 분리, 기존역할의 확대, 축소, 새로운 정의, 그리고 의과대학 교육과정의 장기화로도 이어지며, 집안에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거나 특별히 우수한 인재 외에는 의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전부 마치기 힘들어지게 되고, 따라서 ‘의사’라는 직종은 필연적으로 혜택 받은 경제적, 사회적 의미가 부여된다. 사람의 생명을 돌본다는 숭고한 일이긴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보상과 보람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내지는 현실적으로는 어떻든 드라마 속에서나마 가운을 휘날리며 화려하고 멋진 모습으로 비춰지지 않는다면 과연 얼마나 이 험난한 업계에 뛰어들려 할까? 물론 그렇다고 픽션 속 의사들이 죄다 병원에서 폼 잡으며 연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전문만화, 직업만화의 세계에서 의료만화는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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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만화의 이데아-블랙잭
의료만화 장르의 시초는 일본에서 ‘만화의 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폭넓은 장르와 일본 만화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데즈카 오사무의 78년도 장편 [블랙잭]이다. (원작을 리메이크한 야마모토 켄지의 3권짜리 [블랙잭]과 혼동이 없기를 바란다.) 재미있는 것은, 의료만화의 시초이면서도 주인공 블랙잭은 정상적인 의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의사 면허도 없는 데다가 (애당초 면허를 따지 않았는지, 혹은 면허가 있었는데 파기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하얀 가운과는 대조되는 시커먼 코트를 휘날리며 터무니없는 고액의 수술비를 요구하고 비정한 독설을 내뱉는, 이 천재적인 수술 솜씨의 아웃사이더 외과의사는 의뢰에 따라 세계각지를 떠돈다는 점에서 의사보다는 살인청부업자나 스파이를 연상하게끔 한다. 아니, 어쩌면 바로 정상적이고 평범한 의사가 아니라는 점이 의료만화 장르의 창시작이 될만한 인기와 화제성의 원인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정상적인 외과의사 캐릭터를 기피한 이유는 작가 본인이 의사면허증 소지자이긴 했으나 의료업에 종사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병원이나 진료소의 의사의 일상을 속속들이 그려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현실적인 점도 있지만, 동시에 만화적인 재미를 위한 적절한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블랙잭의 반사회적이고 극단적이며 특이한 위치는 내부자의 입장으로써는 드러내기 힘든 의료계의 병폐와 사회의 치부를 보여주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당연히 동업자들에게는 곱지 못한 시선을 받으며 경멸의 대상인 블랙잭이지만, 역으로 파기될 의사면허도, 잃어버릴 명예나 지위도 없기에 복잡한 상황에서 의사를 속박할 수 있는-때로는 환자의 생명보다 자신이 몸담은 조직을 우선할 수밖에 없는-각종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순수한 ‘의사,’ 즉 생명을 구하는 자로써 충실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거액의 수술비를 요구하는 것도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돈 그 자체를 원한다기보다는, 환자가 자신의 생명에 걸 수 있는 ‘각오’의 정도, 즉 생명의 무게를 가늠하기 위한 시험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병원뿐만이 아닌 가정, 재난현장, 전장 등 다채로운 배경에서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진정한 생명의 가치를 해부하는 [블랙잭]의 철학은, 의료물에서 가능한 거의 모든 이야기의 원형을 모아뒀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후 [닥터K]같은 다소 오락성이 강한 의료 소재 만화에서부터 일본 의료계의 현실을 고발하는 [헬로우 블랙잭]같은 사회적 성격의 의료만화에까지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헬로우 블랙잭]의 주인공이 지향하는 (하지만 일본 의료계 현실에서 한계에 부딪치는) 이상적인 의사상(像)으로써도, 의료만화의 ‘원형’으로써도 [블랙잭]은 의료 장르의 ‘이데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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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전쟁터, 싸우는 의사들
사는 것이 곧 전쟁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치열하다는 것인데, 그 정도로 관념적이지는 않지만 인간 육체의 건강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병들거나 다친 인체와 시시때때로 마주해야 하는 의료인의 삶은 일상적으로 전장과 함께하는 셈이 아닐까. 물론 현실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의료인은 환자의 몸뿐만 아니라 수많은 외부적인 여건들과 부딪쳐가며 치료를 병행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놓여있다. [헬로우 블랙잭]과 [국경을 달리는 의사 이코마]는 각각 현대 일본의 병원과 세계 각지의 분쟁지역이라는 극명히 다른 배경에서 활동하는 의사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공통적으로 실제로 전쟁터이거나 전장에 가까운 환경 속에서, 환자의 몸이라는 전쟁터 안에서 병마뿐이 아닌 환자를 병들고 다치게 하고 직접적, 간접적으로 죽이기까지 하는 외부적인 적-즉 이중(二重)의 전쟁터에서 싸워야 한다. 국경 없는 의사회 소속으로 세계 각지의 분쟁지역으로 파견되는 이코마는 문자 그대로 총탄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사람 목숨이 지극히 무가치해지고 무의미해지기까지 하는 현실에서 생명을 지켜내려는 외로운 싸움을 하게 된다. 전쟁에서 죽음은 숫자일 뿐이라는 소리도 이미 시쳇말이 된 것이, 미국이 이라크 전쟁 민간인 피해자의 수가 ‘세어봤자 끝도 없다’는 이유로 사망자를 세는 것조차 공식적으로 포기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마치 한 사람이 살아온 삶과 존재 자체가 완전히 부정되고 숫자 이하의 무(無)로 치부되는 것이 현대전쟁 속의 생명의 위치다. 죽고 죽이는 것이 정상적이며, 기껏 살려놓은 환자가 1초도 안되 총탄에 스러지는 모습을, 환자가 수많은 동족을 살해한 원수라 치료 보조를 완강히 거부하는 동료 의료인의 분노라는 거의 비현실적인 현실 속에서 이코마는 홀로 의사로써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미치는 것이 정상인 세계에서 자신은 제정신이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은, 그 세상 안에서는 역으로 미친 행위로 보일 정도로 위태롭고 힘겹고, 이 점에서 [헬로우 블랙잭]의 주인공 사이토와 상통하는 데가 있다. 사이토의 현실은 비록 평화롭고 풍요로운 현대 일본이지만 어떻게 보면 이코마의 현실보다 더 비열하고 냉혹한 것이, 그 평화와 균형의 껍질이 실제로는 인명에도 귀천이 있으며 때로는 종이쪽 한 장에도 남을 수 없을 정도로 무가치하다는, 정확히는 환자의 삶을 그렇게 몰아가는 일본 의료 시스템의 치부를 교묘하게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똑바른 성격의 사이토는 이런 구조에 의문을 품고 정당한 항의를 하며 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 애쓰고 때로는 시스템과 부딪치지만, 그의 정의감과 고뇌는 동료와 주변 사람들에게 ‘손해 보는 미친 짓’ 정도로만 비춰진다. [블랙잭]같은 초인이 될 수 없는, 때로는 블랙잭 본인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현실의 벽에서 좌절하는 범인(凡人) 의사의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을 위해 전진하는 생(生)이라는 치열한 전쟁터를 다룬 작품들로, 현실을 고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을 부각시켜 보기 고통스러운 만큼 값진 휴머니즘의 감동을 제공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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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컬 인터테인먼트-오락으로써의 의료만화
물론 의료물이라고 전부 다 진지하고 무거울 필요는 없다. 확실히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병마를 퇴치한다는 점에서 의술, 특히 가장 비주얼한 치료법을 자랑하는 외과시술은 카타르시스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의사의 엘리트적인 사회적 지위와 병원이라는 독특한 공간은 관심과 호기심을 유발하며, 그 자체가 일종의 미학적 스타일로 정착되기도 한다. 병원에서 연애하는 우리나라 의학드라마나 병원 옷 입고 나오는 에로물이 대부분의 경우 의료 자체와는 크게 상관이 없으면서 인기가 있는 이유가 공간과 복장 등 표면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특유의 매력 때문이다. 심지어 황폐한 현실에서 분투하는 의사를 다룬 진지한 의료물도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휴머니즘을 더더욱 빛나게 하는 또 다른 의미의 ‘즐거움’과 감동을 주고, 사실 그런 즐거움조차 없으면 대중문화 장르로 의료물이 정착되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아예 대놓고 오락물을 표방하는 의료만화는 오히려 정직한 축에 들 수 있겠다. 이 중에 대표적인 예는 역시 [닥터K]인데, 각종 의료도구를 장비한 붉은 망토를 걸치고 방랑하는 엄청난 근육질의 주인공 닥터K는 외모와 설정에서부터 [북두의 권]의 주인공 켄시로와 블랙잭을 합쳐놓은 듯하다. 물론 의료물에는 빼놓을 수 없는 가슴 찡한 휴먼드라마도 펼쳐지기도 하지만 그보다 이 시리즈의 진국은 황당할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에서 주인공의 수술 실력과 근력을 최대한 살린 기상천외한 수술과, 때로는 그 괴력으로 사회악을 응징하기도 하는 닥터K의 주먹이 주는 통쾌함, 즉 액션물로써의 쾌감이다. [왕십리 종합병원]은 오히려 그 반대로 형편없는 실력의 수상하기까지 한 의료진들이 재미와 유쾌함을 선사한다. 툭하면 의료사고를 일으켜 환자 100명을 보내고도 여자 꼬시는 데나 전념하는 외과의사, 무시무시한 인체실험에 탐닉하는 미녀 의사, 무뚝뚝한데다가 난폭하기까지 한 (남자) 수간호사, 어떤 천재 무면허의사가 연상될 수밖에 없는 신의 손 치료지왕, 병원 각지를 돌아다니는 묘하게 평온한 표정의 시체 등, 공중파의 멜로드라마적 의학드라마와는 정 상극에 위치된 듯한 엽기적 인간군상들이 펼치는 병원의 일상은 적당한 휴머니즘조차 가장하지 않은 채 순수한 병원 코메디를 지향한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비록 환자로써는 절대로 방문하고 싶지 않는 병원이지만, 그만큼의 황당함과 재미로 독자에게는 확실한 웃음을 처방하는 바람직한 만화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액션, 코메디와 같은 대중적이고 경쾌한 장르에도 의료물은 접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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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화, 세분화, 그리고 미래
분명히 의료물의 스포트라이트는 소설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만화든, 게임이든 치료과정과 결과가 가장 두드러지는 외과에 쏠려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분야가 만화 속에 전무하지는 않다. 외과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자주 다루어지는 분야가 바로 정신과로, 수술이라는 전문적이면서 난해한 장면을 연구하고 그리지 않아도 된다는, 즉 일반인으로써 접근하기 쉽다는 (혹은 그렇게 보인다는) 장점과 정신과에 대한 대중적 관심의 증가, 다양한 드라마를 짜기 용이하다는 장점 때문에 [사이코 닥터], [여의사 레이카의 싸이코 파일] 등 정신과 의사가 주인공인 의료만화도 있다. 정신과 치료는 주로 병원 대신 의사의 편안한 오피스에서, 정신과 의사의 무기는 메스 대신 대화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런 작품들을 의료물로 구분할지 스릴러나 드라마로 분류할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정신과도 엄연한 의학의 한 영역으로 작가의 공부와 이해가 요구되니, 단지 병의 원인이 마음에 있을 뿐 의료만화로 포함될 수 있다. 지나치게 서양의학에 몰려있는 것이 아쉽다면 개화기 일본의 침술사의 활약을 그린 [메이지 침술명의 텐진]도 있다. 동양의학뿐만 아니라 시대극적 요소도 투입하여 매력적이며, 침술에 대한 지식과 경혈의 위치에 대한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하지만 아예 다른 영역인 동양의학보다 더 등불 아래 신세인 것은, 의사 외의 의료인이 아닐까 싶다. 의사도 혼자서 사람을 치료할 수는 없고 간호사, 약사, 제약회사 연구원 등 다양한 의료업계 종사자들이 서로 협력하기에 가능한 것인데, 정작 이들이 주인공으로 조명되는 경우는, 특히 간호사와 약사는 환자가 의사만큼 때로는 의사보다 더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전문의료인인데도 거의 없다. ‘백의의 천사’라는 적잖이 왜곡된 이미지가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회적 인지도는 제법 있는 간호사에 비하면 약사에 대한 만화는 전무하다. ([약사 아르잔]이라는 만화가 있기는 하지만 중세 판타지에 가깝고 도감에서도 쉽게 나오는 서양약초 정도가 나오는 등, 전문적인 느낌의 본격 의료만화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그것은 간호사가 환자와의 거리가 가장 좁은 의료인으로, 좋든 나쁘든 가장 가깝게 존재하기 때문도 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하드코어해질 수밖에 없는 간호사의 일상은 내과병동의 햇병아리 간호사 유키에의 분투를 그린 [못말리는 간호사]에서 실감나게 그려진다. 얄미운 환자에게 아픈 주사를 놓아 앙갚음을 시도하거나, 어느 병원에나 있는 괴담을 듣고 야간근무를 괴로워하거나, 오진을 둘러싼 간호사 대 의사의 갈등 등 간호사이기에 알 수 있는 이야기, 환자가 되었을 때 가장 자주 의존하지만 좀처럼 주목 받지는 못하는, 하지만 그들이 없으면 병원이 돌아갈 수 없는 중요한 의료인이 주인공인 이런 만화야말로 의료만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지 않을까.
의료물에서 이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목소리와 말할 수 없었던 터부 속에 있을 것이다. [못말리는 간호사]가 좀처럼 주목 받지 못했던 간호사들의 목소리로 그들의 세계를 전문적이고 본격적인 직업으로써 조명했고, [헬로우 블랙잭]이 쉬쉬하며 비밀로 붙여졌던 의료계의 현실적 문제점을 강력하면서 효과적으로 고발한 경우이다. 생과 사가 교차하고 과학과 윤리가 협력하기도 대립하기도 하는 의료계는 어느 나라에서나 매력적인 소재이자 현대사회에서 생명이 차지하는 위치와 그 가치에 대한 철학을 일깨울 수 있는 중대한 툴이기도 하다. 만약 현재 한국 대중문화 속에서 단순한 배경으로써만 활용되는 한국 의료계를 본격적으로 접근하는 작품이 두드러진다면, 그곳에서 나오는 이야기야말로 신선하고 생생한 우리네 삶의 현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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