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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와 연말 : 만화책 속에서 마무리 하는 한해

거리엔 캐롤이 울리고 머플러를 함께 두른 연인은 밤거리를 나란히 걷는다. 선거바람, 유세바람만 아니면 여느 때와 같은 연말이지만, 유가는 치솟고 물가도 오르는데다 88만원의 비정규직 월급 또한 오를 줄을 모른다. 서울, 2007년 연말은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왔다.

2007-12-07 이영미


                                                                           [연중기획 Comic & Culture ⑨] 만화와 연말
어느덧 2007년도 한 장의 달려만 남겨놓고 있습니다. 1년 동안 만화규장각 매거진에서 연중기획으로 만화와 문화를 함께 읽는 기획을 진행했었습니다. 다양한 문화를 만화와 연관하여 만화에 대한 흥미를 높이려는 기획으로 진행을 하다보니 벌써 올해의 마지막 기획을 하게 되었습니다. 12월 호에 맞게 이번에는 연말과 만화에 대한 내용입니다. 내년에도 더욱더 흥미 있는 주제로 여러분을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편집부)

거리엔 캐롤이 울리고 머플러를 함께 두른 연인은 밤거리를 나란히 걷는다. 선거바람, 유세바람만 아니면 여느 때와 같은 연말이지만, 유가는 치솟고 물가도 오르는데다 88만원의 비정규직 월급 또한 오를 줄을 모른다. 서울, 2007년 연말은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왔다.
누구에게 연말은 한 해 수확을 정리하고 술잔을 들어 파이팅을 외치는 시기지만, 그렇기에는 다가올 새 해가 불안한 청춘들도 많다. 내년엔 꼭 해 보자고, 잘 돼 보자고 우정 어린 술잔을 기울이지만 희뿌연 앞날이 두렵기 그지없는 나날들.

이 연말에 만화책을 한 번 펼쳐보면 어떠할까.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움을, 메마른 도시인에게는 촉촉한 추억을 열어줄 수도 있지 않을지. 만화 속에는 불꽃놀이처럼 화려한 연말이 있는가 하면 88만원 세대의 우울한 미래처럼 슬픈 연말도 들어 있으니까 말이다.
만화가 현실을 닮은 꿈이라면, 직장인들의 로망, <시마과장>(켄시 히로카네)은 도시 직장인들의 연말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시대 회사생활에서 지켜가야 할 ‘정글의 법칙’과 처세술을 가르치는 회사만화 <시마과장>, <시마부장> 속에서는 회사 내의 연말 풍경들을 볼 수 있다. 회사에서는 연말 실적을 보고하고, 임직원들 정치활동들의 사실상 결과물인 승진자 명단이 발표되어 서로의 희비가 엇갈리며 회사의 업무를 마감하고 종무식 뒤에는 부서별로 로바다야끼에서 술자리를 함께 하며 가라오케에 간다. 술자리가 끝나면 하이에나처럼 긴자의 밤거리를 어슬렁거리는 회사원들은 물론 도화살 낀 정력대감 ‘시마’ 과장(부장)은 매년 여자와 함께이지만.
시마의 연말은 답답한 일상의 휴식이며, 애인과의 짜릿한 밀회가 된다. 성실하고 올곧은 듯 보이지만 운과 인복(人福)이 대단히 좋고 기회도 잘 타는 시마에게 잠시의 휴식을 주는 여느 직장인다운 마무리와 정리의 시간이다.

마린블루스 일기中
마린블루스 일기中

같은 직장인이지만 사뭇 다른 연말도 있다. 정장을 입고 부서간의 화합과 친목을 (의무적으로) 다지는 자리에서 한잔 술을 기울이는 대신, 자유로운 복장에 사원들끼리 친구처럼 어울리는 꿈의 회사. <마린블루스>(정철연)의 성게군이 다니는 캐릭터회사가 그렇다. 징검다리처럼 이어지는 연말 모임에서는 곧 술독에 들어갔다 나올 새도 없이 또 빠지면서 한 해를 마감하지만, 그 자체가 나빠 보이지 않는다. 또 성게군의 ‘연말 술독 퍼레이드’는 각종 망년회 뿐 아니라 동창회, 동호회 정모 등 온 오프를 포함한 각종 커뮤니티를 즐기는 요즘 세대의 연말 분위기를 전해준다. 신년회 까지 늘어서 있는 술독의 향연에 흐느적거리는 성게군은 작가의 모습인 동시에 이 시대 많은 젊은이들의 실제 모습에 가깝다. 물론 성공한 젊은이의 모습이다. 그들은 당당한 이 시대 ‘직장인’ 아닌가.

술자리에서 만나 서로 친구가 된 개성 있는 백수들이 겨울 바다를 찾아가 모래밭에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며 조촐한 연말파티를 하는 모습은 참으로 소박하지만 예쁘기도 예쁘다. <우주인>(이향우)에서 주인과 친구들이 고물차에 멀미하며 겨울바다로 떠나는 모습과 대비되는 조개껍질 트리의 낭만은 ‘젊으니까, 사랑하니까 이대로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물론 그 결과는 참담한 떼 감기몸살이지만.

그런가 하면 세상물정 모를 나이에 보내는 연말은 또 얼마나 풋풋할까 기대하게 한다. <파라다이스 키스>(야자와 아이) 의 유카리. 그녀의 진짜 인생은 명문 고등학교의 모범생이었던, 수험준비에 바쁜 3학년 2학기에서 시작된다. 바로 파라키스의 주인공들을 만나는 순간 그대로 천국으로 직행하는 것이다. 모델 데뷔, 조지와의 만남, 패션쇼, 확 바뀐 진로. 어른이 되기 전 유카리의 고교시절 마지막 연말은 유키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안내하는 시간이다. 심성이 여린 18세 꽃 소년 소녀들이 작은 일로 일희일비 하는 모습이 때로 답답도 하지만, 그들에겐 일생일대의 도박이자 모험인 것을 어쩌랴.
함박눈 쏟아지는 그들의 연말은 이제 곧 어른이 되어 세상에 날개 짓을 시작할 희망이자 예고기 때문에 아름답고 풍요로운 인생의 선물이 된다. 물론 가장 큰 연말선물은 받은 사람은 주인공 유카리다. 연예계 데뷔, 조지와의 짧고 뜨거운 만남, 엄마와의 화해, 열 트럭분의 의상과 구두(!). 그 연말의 파라다이스는 온전히 유카리의 것이다.
이들보다는 철들었지만 역시 질풍노도의 감성세계를 보여주는 <나나>(야자와 아이)에서는, 터질 것 같은 상처들을 애써 감춘 채 친구들과의 파티를 준비하는 그들의 연말을 그려준다. 롤러코스터같은 인생이야 여느 만화 주인공 또한 매한가지가 아닐까. 그래서 그림 같은 연말 파티는 이들에게, 함께 모여 같이 웃으면 되지 않느냐고 단순한 결론을 내려준다.


너는 펫 中
너는 펫 中

화려하지는 않지만 행복한 연말의 향연은 또 있다. <너는 펫>이 그러하다. 주워 기른 꽃미남과 동경하던 선배미남. 둘로 갈라놓은 이상형의 두 얼굴 매력남 두 사람을 한꺼번에 가진 스미레의 연말 파티야말로 부러움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하스미 선배에게 모모의 존재를 들키기 전 갈등하는 스미레의 연말 파티는 조바심을 감춘 채 아무렴 어떠냐는 듯 두 남자의 사랑으로 풍요롭기만 하다.

만화속에 그려진 연말이 마냥 흥겹고 신나기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신입사원>(야마구치 카츠미)의 연말은 취업난의 십자가를 진 이 시대 젊은이의 초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준다.

신입사원 中
신입사원 中

<신입사원>의 대학 3학년생 마키와 타쿠는 구직 시즌을 맞아 취업을 위해 박람회를 다니고, 면접을 보고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가하며 우리네 대학졸업반과 비슷한 연말풍경을 보여준다. 도쿄의 명문대학들에 좋은 취업처가 몰리는 현상도 비슷하고, 영어실력과 학점, 성실성에다 면접 트레이닝까지 받는데 번번이 물을 먹는 것마저 같다. 꾸역꾸역 이력서를 써 내는 자취방의 풍경도, 그런 방에 모여 맥주잔을 앞에 놓고 파티를 하는 모습도. 끝나지 않는 88만원 세대의 끝나지 않는 방황이 있는 한국의 현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신입사원>의 주인공 마키는 훨씬 나은 상황이다. 여자친구가 능력 있는 벤쳐의 유망주에게 도망가 버렸지만, 유명 탤런트와 한 방을 쓰게 되고, 인턴십도 체험해 보니까.

마냥 아름답기만 한 연말은 아니다. 취업난 경제난이 아니더라도 현실의 문제는 어디서나 항상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만화 속에서조차 그러하니까. 다만 희망도 말하고 있다. 진부하지만 희망에 대한 말은 꼭 희망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화 주인공들이 자신의 소망을 연말 파티의 촛불과 이력서에 담아 보내는 동안 한 해가 저무는 것은 다시 뜨기 위해서가 틀림없다고 독자들은 믿는다. 그래서 또다시 파이팅, 파이팅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