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계절이든 안 그러겠냐만, 겨울은 유난히 다중적인 의미와 상징이 혼재하는 계절이다. 뼈 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를 몰고 오지만, 그 때문에 따스함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시기이다. 그리스도가 태어난 계절인 종교적인 기간이면서 (물론 사실은 정확히 12월 25일에 태어나지는 않았다지만.) 산타클로스로 대표되는 극단적 상업주의로 얼룩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특히 차갑고 녹으면 질척거리며 불쾌하기만 하지만 어쨌든 내리고 쌓이는 시점에서는 아름다운 눈의 이미지는 빼놓을 수 없는 계절의 꽃. 서울의 첫눈은 진눈깨비 정도로 그치고 말았지만, 만화 속에서나마 겨울을 만끽해 보자.
겨울이 되면 우선 눈에 띄는 것이 거리에서 파는 따끈따끈한 주전부리 거리와 구세군의 자선냄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따스함을 갈구하게 되거나 요구되기도 하는 것은 춥디추운 기후 때문이다. 물론 난방시설이 설치된 주거지를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이니 당연하겠지만, 어쨌든 좀 더 여유가 있어도 온기가 그리워지는 추운 계절이다. 만화에서 제공해주는 ‘따스함’은 훈훈함이나 애잔한 감동을 느끼게 해 주는 종류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이 살아있는 세상에서는, 차가운 눈마저 솜처럼 깨끗하고 포근한 꽃송이로 보인다.
아사다 지로 원작, 타쿠미 나가야스 작화의 「철도원」은 대단히 섬세하고 꼼꼼한 솜씨로 시골 마을의 작은 역과 사방을 뒤덮는 함박눈, 그리고 그 역을 평생 지켜온 늙은 철도원의 모습을 그려낸다. 리얼리티가 높은 만큼 눈 속의 추위와 실내의 따스함이 손에 잡힐 정도지만, 마지막에 와 닿는 것은 아련한 서정성으로 가득한 잔잔한 추억의 온기다.
겨울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크리스마스. 원래 원산지인 서구에서는 가족 친지끼리 모이며 훈훈한 신경전을 벌이는 국가적 명절이자, 시기상 대학교 신입생들이 고향에 돌아간 겸 고등학교 시절의 연애관계를 정리하는 비공식 커플 파경 명절로 악명 높지만, 사실상 크리스마스가 외래 명절인 동양에서는 친한 사람들, 특히 연인과 같이 알콩달콩 새콤달콤한 시간을 보낼 핑계가 생기는 일종의 이벤트 휴일로 장착된 지 오래다. 그래서 아기자기하고, 훈훈하고, 귀엽고, 가슴한쪽이 살짝 포근해지는 크리스마스 에피소드가 눈에 띈다. 하지만, 사실 완벽한 이벤트 같은 것은 실제로는 성공률이 낮은 만큼, 어딘가 어설프고 실수투성이인 크리스마스가 리얼한 만큼 오히려 더 감동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요시나가 후미의 「플라워 오브 라이프」 3권에서 하루타와 친구들은 하루타의 집에서 멋진 크리스마스 파티를 계획하며 각자의 역할을 다짐한다. 하지만 아무리 머릿속으론 이상의 파티 준비물을 그려봤자, 실상은 경험도, 준비성도 부족한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 당연히 크리스마스 당일 남아있을 캐롤 CD는 전부 다 나갔고, 집에 있을 줄 알았던 크리스마스 트리는 부모님이 치워버린 지 오래고, 기합을 잔뜩 넣어 무리하며 만들려던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실패하고 만다. 그래도, 어설픈 대로, 부족한 대로 유쾌하고 즐겁게 끝난 파티는 풋풋한 인물들만큼 귀엽고 따끈따끈하다.
강풀의 「순정만화」에도 어설프고 투박하지만, 완벽한 크리스마스는 아니지만 분명히훈훈한 크리스마스가 나온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니어서 풀이 죽은 수영, 그 때 하늘에서 눈송이가 내려온다. 한 방향으로만 날아가는 이상한 모습에 올려다보니 진짜 눈이 아니라, 아파트 위층에서 연우가 뿌려주는 눈 스프레이였던 것. 수영이 그만 웃음을 터뜨려버릴 정도로 어설프지만, 그래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선물해준 연우의 노고와 마음이 마냥 사랑스러울 뿐이다. 아파트라는 환경적 특성을 최대한 살린, 최고로 아름다운 가짜 눈이 내리는 가장 포근한 화이트 크리스마스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눈은 분명 아름답고 화사한 모습이지만, 그것이 2, 30cm 이상 쌓이거나, 방향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시야를 가리며 휘몰아치거나, 눈보라와 함께 동반되는 혹한 속에 내팽개쳐 진다면, 그야말로 생존을 위협하는, 지옥 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꽃잎처럼 미려하고 가냘픈 형태이면서 동시에 어지럽게 흐드러지게 내리며 만물을 뒤덮는 눈의 이미지는 어딘가 이질적인, 섬뜩하기까지 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그 차가운 온도, 생명의 온기의 정 반대에 위치하는 냉기는 아름다우면서도 치명적인, 기묘한 이중성을 극대화한다.
이 때문에 눈은 종종 위협적이고 적대적인 환경으로 사용된다. 즉 기후 자체가 재난이 되거나, 혹은 재난을 야기하는 존재인 것이다. 특히 [고립]이라는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눈보라 속의 고립된 산장/별장/저택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추리물의 고전. 만화만 해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명탐정 코난, 소년탐정 김전일 에피소드에서 눈으로 고립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다루었는지 헤아려보면 쉬이 납득이 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살인사건은 대부분의 경우 의도적으로 기후를 이용한 계획범죄다. 즉, 애초부터 범인은 명백한 살의를 지닌, 이미 정상인의 궤도를 벗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만약 눈이라는 악천후가, 고립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사람을 광기로 몰고 가는 경우는 어떨까. 가슴 속에 깊숙이 묻어두었던 비밀을, 사회도덕이 억눌러 왔던 야만성을 불러일으킨다면,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가. 후쿠모토 노부유키와 카와구치 카이지의 합작품인 「고백」의 두 주인공은 어느 쪽도 처음부터 범죄 계획은커녕 살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발단은 산에 몰아친 눈보라와 부상으로 빈사의 지경에서 튀어나온 ‘고백’. 곧바로 생존의 길이 발견되지만, 이것은 고백을 한 자와 그것을 들어버린 자의 치열한 생존투쟁을 의미하게 된다. 엄밀히 말해 단순한 ‘생존’이 아닌, 문명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가지는 ‘자기 보존’을 위한 혈투이기에 그들의 싸움은 사전에 선을 벗어난 범죄자가 아닌, 단지 극한의 상황에 몰린 인간의 입장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점이 섬뜩하면서도 강렬하다.
좀더 추상적이지만 훨씬 무시무시한 눈의 이미지는 히노 히데시의 「지옥도」에서 구체화된다. 바야흐로 전쟁과 살육으로 얼룩진 인간계가 지옥으로, 지옥으로 화하는 그 절정의 순간, 눈은 지옥의 풍경이 된다. 시커먼 어둠 속에 미친 듯이 휘날리는 눈보라, 하얀 눈 위에 작열하는 선혈의 강력한 대비. 광란과 세기말적 절망에 가득 찬 지옥도의 눈은 아름다우면서 치명적이고, 너무나 끔찍한 것을 봤을 때 눈이 떼어지지 않듯이, 부정할 수 없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포근한 낭만이든 잔혹한 계절이든, 어차피 겨울은 4계절 중 하나, 눈과 추위도 언제까지나 기상 현상이고, 특히 눈이 많은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1년 어느 때보다 많은 지겨운 계절의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일상화된 눈’을 가장 실감나게 표현하는 작가는 일본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홋카이도 출신의 사사키 노리코. 아예 홋카이도가 배경인 「동물의사 닥터 스쿠르」와 「월관의 살인」(이야기 작가는 아야츠지 유키토)은 물론, 도쿄가 배경인 「헤븐?」에서도 그녀가 그리는 내리는 눈, 쌓인 눈, 밟힌 눈, 덮는 눈, 녹은 눈 등 각종 눈과 추위에 대한 묘사는 체감온도가 느껴질 정도로 실감난다. 눈과 겨울은 때로는 위협적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징글징글하고 지긋지긋한, 미워도 고와도 공존해온 생활의 일부일 뿐, 미화되지도, 과장되지도 않고 단지 자연현상이 그러듯이, 그곳에 존재할 뿐이다.
눈으로 인한 재해나 불편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는 인간의 지혜에 달려있고, 또한 오히려 그런 기후이기에 가능한, 눈으로 집을 짓거나 개썰매 대회에 참가하거나 하며 나름대로 유쾌하게 보낸다. 심지어 살인사건이 나오는 추리물 「월관의 살인」에서도 눈은 여타 고립형 추리물처럼 무섭고 적대적인 존재로 묘사되지 않는다. 물론 확실히 불편하긴 하지만, 홋카이도 각지를 활주하는 선로의 모습에서는 오히려 정겨움이 느껴질 정도다.
이렇게 눈이 한바탕 쓸고 지나가고 겨울의 추위가 휩쓸고 가면, 언젠가 눈은 녹고 봄은 올 것이다. 비록 눈은 녹아서 지저분해질 뿐인, 「절망선생」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자면 질척이는 구질구질한 화해와도 같은 구석이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눈이 녹기에 새 생명과 새해와 봄은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 추위를 피해 따스함을 찾고 자기 스스로 따스함을 베풀며, 때로는 일부러 살벌한 만화를 읽으며 겨울의 한기를 만끽하고, 가끔은 추우면 추운 대로 계절을 즐기며 외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