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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야구, 만화를 보자 #04 드라마의 주역이 되다, 에이스 그리고 슬러거

한번은 야구에 일자무식인 사람에게 야구를 설명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야구에는 까막눈이지만 축구광이었던 그를 위해 모두가 하나둘 축구에 빗대어 야구 이야기를 시작하게 됐는데, 이게 아주 묘안이었다.

2013-10-30 강상준
한번은 야구에 일자무식인 사람에게 야구를 설명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야구에는 까막눈이지만 축구광이었던 그를 위해 모두가 하나둘 축구에 빗대어 야구 이야기를 시작하게 됐는데, 이게 아주 묘안이었다. 쉽게 납득시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비교하면 할수록 말하는 모두가 신기해 할 만큼 두 스포츠는 닮은 점이 많았던 것이다. 가령 야구의 3, 4, 5번 타순을 일컫는 ‘클린업 트리오’는 축구의 공격수로 설명이 된다. 또 타격정확도, 장타력, 수비능력, 송구능력, 주루능력을 모두 갖춘 ‘5툴 플레이어’도 축구로 치면 득점력, 패스(혹은 어시스트), 체력, 주력, 판단력을 전부 지닌 선수가 될 것이다. 대부분 한두 가지를 갖췄을 뿐이지만 드물게 다섯 개 능력을 모두 갖춘 선수가 축구에도 있으니까. 그런데 딱 한 가지만큼은 축구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건 바로 투수. 축구광께서 가라사대 “투수는 최전방 공격수 아냐?” 하지만 모두가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투수는 공격을 하지 않으니까. 투수는 점수를 내지 못하는 ‘수비수’일 뿐이다. 그렇다면 최전방 수비수? 축구에 그런 게 있었나? 모두가 갸우뚱거리다 결론을 내렸다. 투수는 오직 야구에만 있는 가장 독특한 포지션이라고.
 
흔히들 야구를 투수 놀음이라고 한다. 투수라는 존재는 9분의 1 이상, 아니 팀 전력의 절반 그 이상이다. 야구는 매순간 투수의 손에서 공이 떨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바꿔 말하면 투수가 공을 던지지 않으면 시합은 성립되지 않는다. 투수력은 곧 경기력이다. 거칠게 가정해 아마추어리그라면 괴물투수 한 명으로도 리그를 지배하는 게 가능하다. 때문에 팀의 제일 투수인 ‘에이스’는 그 어떤 스포츠의 어떤 포지션보다도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에이스의 등판일이라면 팀원들은 연패를 끊어 내거나 연승을 이어갈 수 있음을 확신한다. 야구만화가 팀의 에이스를 주인공으로 삼는 건 처음부터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지] 아다치 미츠루 <터치> <에이치 투> <크로스 게임> (왼쪽부터)
 
 
아다치 미츠루의 야구만화 거의 전부는 에이스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터치>의 타츠야는 쌍둥이 동생 카즈야의 죽음 이후 사람들의 기대에 떠밀려 야구를 시작한다. 자연히 그에게 주어진 역할 역시 카즈야와 같은 에이스. 천재 투수였던 카즈야의 재림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바람은 에이스에 거는 기대, 에이스의 어깨에 달린 책임감과 꼭 맞아떨어진다. <에이치 투>의 히로도, <크로스게임>의 코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주인공이기 이전에 에이스이기에 늘 팀의 기둥으로서 기대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지뢰진>의 작가 다카하시 츠토무의 <철완소녀>는 에이스의 막중한 위치를 그대로 긴박한 드라마로 전치한 케이스다. 전후 한 화장품 회사의 여권 신장의 상징으로써 기획된 여성 야구단은 오로지 ‘철완걸’이라고 불리는 카노우 토메에 의해 꼴을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메가 소속된 캔디스는 겨우 공을 주고받을 정도의 오합지졸들로 급조된 팀이지만, 강속구 좌완투수 토메에 힘입어 마침내는 전후 실의에 빠져있는 전 일본의 기대를 등에 업고 승전국인 미국과 결전을 벌인다. 단순한 야구경기가 아니라 국가 단위의 엄청난 도박으로 설계된 이 경기에 사람들이 건 기대는 곧 에이스인 토메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서 시작된다. 물론 에이스의 어깨에 걸린 책임감 역시 그와 동량이다.
 
반대로 하라 히데노리의 <그래 하자!>에서는 팀의 에이스였던 카노우가 포수로 전향하는 상황이 등장한다. 믿음을 주지 못하는 에이스는 언제든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법. 자연히 카노우의 상실감 역시 어마무지하기 마련이다. 이제까지의 에이스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에이스도 있다. 이전 야구만화의 에이스가 독불장군에 열혈과 긍정으로 똘똘 뭉친 캐릭터였다면, <크게 휘두르며>의 미하시는 그 정반대편에 선 에이스다. 소심하고 여린 성격의 미하시는 경기를 주도하는 압도적인 타입의 투수가 아니라 전적으로 포수인 아베의 리드에 따라 움직이며 정확한 제구력으로 승부하는 투수다. <크게 휘두르며>는 그 어떤 야구만화보다 선수들의 멘탈에 큰 비중을 할애한 만화인 만큼 ‘심약한 에이스’라는 전복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투수 중심 이상의 넓은 시야로 경기를 조망한다.
 

 
 
 
 
 
 
 
 
 
 
 
 
 
[이미지] <철완소녀> 다카하시 츠토무, <그래 하자> 하라 히데노리, <크게 휘두르며> 히구치 아사 (왼쪽부터)
 
하지만 아무리 수비가 완벽해도 점수를 내지 못하면 잘해봤자 비길 뿐이다. 메이저리그 데뷔 첫 해 14승을 올린 대한민국 에이스 류현진도 작년 한화 이글스에서 거둔 승수는 9승에 불과했다. 야구는 점수를 많이 낸 팀이 이기는 스포츠다. 그러므로 한 타석에 최대 4점까지 뽑을 수 있는 야구규칙상 슬러거(slugger)는 야구라는 스포츠에 있어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팀의 슬러거, 즉 ‘거포(巨砲)’는 지고 있는 경기도 단번에 뒤집는 각본 없는 드라마의 주역이다. 홈런을 야구의 꽃으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홈런왕 하면 떠오르는 선수인 베이브 루스는 단순히 뛰어난 장타력과 그에 따른 엄청난 기록 때문에 위대한 선수로 남은 것이 아니다. 루스는 방망이를 노브(knob)까지 내려 잡고 풀스윙을 했던 최초의 타자로서 기존 타자들이 단타를 노리는 것과는 달리 일발장타를 무기삼아 홈런을 양산함으로써 야구의 패러다임을 바꾼 최초의 슬러거였던 것이다. ‘타격왕은 포드를 타고, 홈런왕은 캐딜락을 몬다.’는 오래된 속설 역시 슬러거의 무거운 존재감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재미있게도 이런 점 때문에 슬러거는 현실과는 달리 만화에서는 주역이 되지 못하는 편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였기에 감동과 환희도 뒤따랐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타점을 양산하는 슬러거 주인공을 내세워 언제고 일발역전 드라마만을 써내려간다면 재미는 훨씬 덜할 게 분명하다. <에이치 투>에서 히로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고교 최강타자 히데오는 분명 투수인 히로를 돋보이게 하는 조연이었기에 빛날 수 있었으리라. <사랑해요 배트맨>은 강타자 카야마 유타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긴 하지만 야구라는 시합보다는 유타로를 중심으로 한 휴먼 드라마에 집중함으로써 시합을 좌지우지하는 슬러거의 돌발적인 면모를 이야기에 적절히 반영한다. 로빈즈의 4번 타자 유타로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섬세하고 꼼꼼한 성격을 지닌 캐릭터. 유타로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구심점 삼아 프로야구라는 치열한 전장을 무대로 한 <사랑해요 배트맨>은 앞뒤를 예상키 힘든 야구라는 스포츠를 사람 냄새 폴폴 나는 드라마로 아울러 인간의 다채로운 면면을 그려낸다.
 
 
내 마구를 받아라앗!
 
고된 훈련, 경기를 대하는 선수들의 마음, 치열한 경기의 긴장감 등 야구를 세심하고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만화와는 다른 매력으로 야구를 즐기는 방법도 있다. 이름하야 ‘마구’,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신비로운 존재를 향한 탐구심이다.
 
 
<거인의 별巨人の星> 카지와라 이키梶原一騎&카와사키 노보루川崎のぼる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을 통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야구선수로 성장한 호시 휴마가 던지던 ‘메이저리그 볼’ 1호, 2호, 3호는 이후 야구만화 계보에 ‘마구’라는 두 글자를 확실하게 새겨 넣었다. 배트를 향해 공을 던져 타자가 친 공이 범타가 되게 만드는 기술(메이저리그 볼 1호)과 시야에서 사라지는 마구(메이저리그 볼 2호)에 이어, 타자가 휘두른 배트가 일으킨 바람의 영향을 받아 공이 배트를 피하게 만드는 과학적인(?) 투구 기술(메이저리그 볼 3호)은 ‘메이저리그 양성 깁스’라는 무시무시한 지옥훈련을 통한 결과였다.
 

 
<아스트로 구단アストロ球?> 토자키 시로遠崎史朗&나가시마 도쿠히로中島?博
1972년부터 1976년까지 <주간 소년 점프>(슈에이사)에서 연재된 초인격투 야구만화. 장르부터 심상치 않다. 수수께끼의 인물 쥬로가 쇼와 29년 9월 9일 오후 9시 9분 9초에 태어난 초인 9명을 모아 만든 ‘아스트로 구단’은 기상천외한 기술을 연마해 사용한다.
 
금속을 넣어둔 배트로 타격해 공과 함께 날아간 파편으로 수비를 교란시키는 ‘자코비니 유성타법’, 3단계에 걸쳐 변화하는 ‘3단 드롭’ 투구(한 경기에 5번 이상 던지면 목숨이 위험), 손바닥에 드릴로 상처를 내서 공의 코스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칠색 변화구’, 던진 공이 갑자기 사라지는 ‘팬텀마구’ 등 왜 ‘초인격투 야구’가 장르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필살기들이 즐비한다.
 

 
<달려라 꼴찌> 이상무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고 야구선수로 성장하는 독고탁의 이야기를 담은 <달려라 꼴찌>에는 세 가지 마구가 등장한다. 곡선을 그리며 날아오던 공이 타자 앞에서 살짝 떨어지는 ‘드라이브 볼’, 먼지를 일으켜 타자의 시야를 방해하는 ‘더스트 볼’(심지어 포수도 공을 볼 수 없다), 공의 높낮이가 롤러코스터처럼 변하는 ‘바운드 볼’이 독고탁의 무기다.
 

 
<사무라이 자이언츠侍ジャイアンツ> 카지와라 이키梶原一騎&이노우에 코井上コオ
무명선수 반바반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가 되는 과정을 담았다. <거인의 별> 호시 휴마에 이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는 마구 몇 가지 정도는 쓸 수 있는지, 반바반 역시 다채로운 공을 던진다. 자신의 키보다 높이 뛰어 공중에서 던지는 ‘하이점프 마구’,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아 손이 여러 개로 보이는 착시효과로(김연아의 레이백 스핀 수준) 어디서 공이 날아오는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대회전 마구’, 하이점프 마구와 대회전 마구를 접목시킨 ‘하이점프 대회전 마구’, 공이 여러 개로 보이는 ‘분신 마구’로 에이스 자리를 굳건하게 지킨다. 그리고 결정타는 이 모든 기술을 합쳐서 던지는 ‘미라클 볼’. 끝판왕이로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