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漫?)의 의미는 이렇다. “이야기 따위를 간결하고 익살스럽게 그린 그림. 대화를 삽입하여 나타낸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만화는 ‘그림’과 ‘대화’가 있는 매체라는 것. 그림과 함께 글을 읽으려면 당연하게도 ‘볼 수 있어야’ 한다. 만화는 시각예술이다.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나 애니메이션, 영화, 그리고 소설까지도 전부 눈으로 볼 수 있어야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콘텐츠들이다. 최근 몇 년 사이 만화에 대한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게 접근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하나 둘 생겨났다. ‘보는’ 만화를 넘어 ‘들리는’ 만화의 영역에 이르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단순히 만화계의 이슈나 영광의 순간들을 감상적인 목소리로 읊는 것을 넘어 직접 만화 속 장면들을 입체적으로 구성해 라디오 드라마의 형식으로 송출하거나, 만화가들이 직접 나서 만화에 대한 이야기와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섰다. 대표적인 몇 가지 케이스를 살펴봤다.
만화를 드라마로 : EBS <소설마당 판 - 라디오 카툰> 그리고 <라툰>
<소설마당 판 - 라디오 카툰>의 진행자인 김형규 씨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만화를 원작으로 한 라디오 극을 선보이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지만 실은, 처음은 아니다. 2000년대 초중반 MBC 라디오에서 이미 <만화열전>이란 제목으로 걸작 만화들을 라디오 드라마로 재구성해 방송한 이력이 있다. 아직까지 인기리에 연재 중인 전극진, 양재현 작가의 <열혈강호>를 시작으로 황미나의 <레드문>,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 고우영의 <삼국지> 김수용 <힙합> 이현세 <공포의 외인구단> 등 걸작으로 꼽히는 국내 만화를 다뤘다.
눈으로 봐야 제맛인 만화책을 라디오라는, 듣기만 할 수 있는 매체에서 다룬다는 것에 처음에는 회의적인 시선도 있었지만 곧 큰 인기를 누렸다. 만화를 즐겨보는 기존의 독자들부터 방송이 나가는 시간에 운전을 하는 운전기사나 자가 운전자들에게서 먼저 호응이 왔고, 극중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성우들의 팬 층까지 청취자로 이끄는데 성공했다. 만화라는 매체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제목 정도는 익히 들어보았음직한 유명한 작품을 선택한 것, 새로운 매체를 받아들이는데 익숙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라디오’ 게다가 MBC라는 공중파에서 방송을 했다는 것, 단순히 만화 속 대사를 그대로 읊는 것이 아닌 현재 시대상을 반영한 적절한 패러디 등으로 재미를 추구한 점 등이 성공 요인으로 꼽혔다.
EBS <소설마당 판 - 라디오 카툰>은 <만화열전>과 10년 이라는 시간적 갭을 가지고 출발했다. 10년, 사이에는 참 많은 환경의 변화가 있었다. 만화를 ‘문화콘텐츠’로 인식하며 각종 다른 성격의 매체들과의 미디어 믹스가 활발히 이루어지게 됐고, 만화의 중심이 웹툰으로 옮겨갔으며 국민의 반수 이상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됐다.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으로 제약 없이 인터넷이 가능한 시대가 됐고 들고 서서 책장을 넘기며 독서하는 사람 이상으로 휴대전화나 스마트 기기들로 독서하는 인구가 늘어났다.
<라디오 카툰> 첫 회에 방영된 작품은 이종범 작가의 <닥터 프로스트>였다. 그 다음으로 정필원 작가의 <마음이 만든 것>, 유현숙 작가의 <나는 매일 그를 훔쳐본다> 하일권 작가의 <삼봉이발소> <목욕의 신> 이었다. 모두 현재 포털사이트 네이버와 다음 웹툰 코너에서 인기리에 연재 중이거나, 연재가 끝난 작품들이다. 독자들이 ‘지금’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무협이나 SF 판타지 등의 장르보다 드라마로 구현하기 수월한 작품을 선택한 것으로 읽힌다(현재 신일숙 작가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방송 중이다. <라디오 카툰> 출범 이후 걸작 출판 만화는 첫 시도). 물론 이미 2차 판권 계약 문제나 해외 작가의 작품인 경우 저작권은 물론이요 작가와 접촉하는 것조차도 작품을 선택하는데 있어 큰 장애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 역시 십 년도 더 전에는 흔히 걱정할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만화 원작이 드라마나 영화, 뮤지컬 등의 원천 콘텐츠로 활발하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는 것을 떠올려보자.
어쨌든, <라디오 카툰>은 현재 가장 전문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들을 수밖에 없지만 눈앞에 장면이 선연한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 공중파의 안정적인 시스템을 십분 활용해 가지고 있는 데이터베이스와 시설, 인력을 적극 활용해 배경음악 하나까지 심혈을 기울여 선정한다. 여기에 작가들 이상으로 만화에 대한 애정과 깊은 내공을 자랑하는 방송인 김형규가 진행을 맡았다.
<라툰>의 경우는 공중파 라디오라는 막강한 배경은 없지만, 애초 탄생 배경 자체가 ‘성우들이 만드는 웹툰 라디오 드라마’이다. 청취의 기본 형식은 팟캐스트. <만화열전>이 방송되던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형식일 것이다. <라디오 카툰>과 마찬가지로 작품을 선정하고 작가와 소통이 완료되면 기획과 재구성을 거쳐 전문 성우진이 투입되어 녹음에 들어간다. 다만 ‘매주 월요일 업로드 예정입니다(가능하다면요)’라는 애잔한(?) 팟캐스트 상세설명에서 느껴지듯 작품은 9월 29일 Hoonnak 작가의 <살인자> 후기 방송을 마지막으로 업데이트가 되고 있지 않다. 원작은 네이버 도전만화 코너에 연재한 작품으로, 후기를 포함 총 25화로 완결이 난 상태.
만화가들의 만화방송 : 카툰부머의 팟캐스트 <웹툰 라디오> 시리즈
‘카툰 부머Cartoon Boomer’는 웹툰 작가들의 최대 커뮤니티다. 단순히 작가들의 모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친목도모는 기본, 각종 정보의 공유를 하며 더 좋은 작품을 보다 나은 환경에서 할 수 있는 고민을 하고, 만화계의 이슈와 사건에 목소리를 내는 곳이다. 여기서 <웹툰 라디오>의 전신, <부머 라디오>가 시작됐다. 부머 라디오에서 메인 DJ를 맡았던 권혁주 작가는 “웹툰을 보는 이들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웹툰 이야기를 할 만한 곳은 별로 없다. 웹툰을 좋아하는 이들이 즐길 만한 방송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웹툰 작가들은 주로 자기 작품에 달린 댓글로 독자와 소통하는데, 오디오 팟캐스트는 색다른 방식으로 소통하는 느낌이라 재미도 있다”고 부머 라디오 기획의 소회를 밝혔다.
부머 라디오는 웹툰 작가들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으로, 웹툰 작가를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초대작가 시간’과 웹툰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부머 인사이드’ 코너로 진행됐다. 이후 부머 라디오는 시즌 3까지 이합집산을 겪다가 지난 2011년 ‘웹툰라디오’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단장했고 2013년 3월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통칭‘웹툰 라디오 시즌 2’라 부르는 시기를 지나고 있는 중. 모바일 환경에 최적화된 웹툰을 연재하는 작가들답게 웹툰 라디오 역시 팟캐스트로 송출한다. 웹툰 라디오 시즌 2는 총 다섯 개의 하위 채널로 운영되고 있다.
모두 작가들이 직접 기획과 진행, 편집까지 맡아하며, 다섯 개의 프로그램은 모두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먼저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정필원, 억수씨, 고아라, 정석우 이렇게 네 명의 작가가 진행하는 ‘만화와 만화가, 그리고 만화키드’를 주요 키워드로 놓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조합을 보면 정적인 분위기 일색일 것 같지만 의외로 시끌벅적한 재미가 있다. 다음으로 ‘추궁 60분’은 부머 라디오 시절부터 있었던 ‘작가초대석’의 발전형으로 일명 ‘웹툰계의 세 얼간이’로 통하는 황준호(인간의 숲) 연제원(제패토), 강냉이(폭풍의 전학생)작가가 진행을 맡아 예능냄새 물씬 나는 방송을 꾸려간다. 예능이 있으면 다큐도 필요한 법, ‘어떤 교집합’은 이종범, 고아라 두 남녀 작가가 매 회 ‘여행’ ‘서른 살’ 등의 한가지 키워드를 정하고 거기에 맞는 만화들을 각자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꽤나 정적인 프로그램. 네 번째로 ‘코끼리뼈’는 권혁주, 꼬마비, 윤필 작가가 나서서 작품 속의 이야기를 각기 다른 성향인 세 작가가 각자의 시선으로 뼈를 더듬고 살을 붙여 전혀 새로운 작품을 상상해내는 방송. 마지막으로 ‘어떤 교집합’의 이종범 작가가 단독으로 진행하는 ‘조곤조곤 만화 박물지’는 작가가 좋아하고, 재차 읽었던 만화를 국적장르 불문하고 소개하는 방송이다. 만화와, 만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대전제만 같고 모두 다른 결을 가졌다.
만화 그리던 만화가들이 진행하는 팟캐스트는 작가에게는 가장 확실한 작품의 홍보 창구이며, 이를 듣는 청취자들과 가장 직접적으로 소통을 위해 열어둔 창구가 된다. 한 줄 댓글이나 대부분 9.9로 맞춰진 평점의 행렬도 좋지만, 더 내밀하고 섬세한 소통을 만화가들 역시 바라고 있다. 반대로 웹툰 독자들 역시 작품에서 궁금했던 ‘작가의 의도’나 ‘진의’, ‘의견’을 다름 아닌 작가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들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루트가 된다. 독자, 그리고 청취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전달할 수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작가와 독자 양쪽 모두에게 마이크를 쥐어주는 소통형 ‘들리는 만화’의 향연.
만화의 ‘안과 겉’에 대하여 : <끝없는 이야기> 그리고 <만수다> <만화만담>
작품과 작가를 둘러싼 이야기가 있다. 작품과 작가를 둘러싼 환경과 그것을 모두 포함하며 변수를 주는 사건과 이슈들이 있다. 그리고 이슈가 발생하게 된 원인이 도처에 있다. 이제부터 이야기 할 세 가지 팟캐스트는 단순히 작품을 읽어주는 것도, 작품 리뷰를 하는 것도, 작가 인터뷰만을 하는 것도 아니다. 업계의 사정과 시스템, 만화를 그리지 않지만 만화업계에 발을 깊게 담그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목소리까지 대신 내어준다. 물론 작품과 직접적인 연관도 있을 것이다.
먼저 <끝없는 이야기>는 만화, 애니메이션 팬들 사이에선 오래전부터 ‘미르기mirugi’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만화/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선정우 씨와 성우 매거진 <소리사랑>의 임영웅 전 편집장이 ‘서브컬쳐 토크쇼’라는 콘셉트로 진행하는 인터넷 라디오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여러 장르의 테마에 관해 별도의 대본과 편집 없이 스카이프Skype를 통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그것이 그대로 방송이 되는 식. 5월 7일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편 이후 업데이트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나 그간 업로드 된 목록을 훑어보면 애니메이션 성우 인터뷰, 그래픽노블, 일본만화 제작시스템, 게임쇼 참가 후기, 출판 불황과 도서정가제 이슈, 작품에서 드러나는 종교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이다. 업계의 일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이야기와 마니악한 이야기가 공존하고 있다. 두 진행자 모두 직접 만화를 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업계에 종사하며 전문적인 지식을 쌓은 내공이 엿보인다.
<만수다>는 두 신진 만화가가 진행하는 인터넷 방송이다. 꾸준한 업데이트는 장점이라 할 수 있으나 작품 리뷰, 인터뷰, 업계 동향과 이슈 등을 모두 다루다 보니 아직 명확한 콘셉트가 잡히지 않은 느낌이다. 그러나 2013년 상반기 웹툰 작가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던 PPS와 카카오 페이지 이슈에서는 전문가를 섭외, 장시간 진행한 심도 깊은 인터뷰를 내보냈으며 만화가들의 ‘먹고사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에피소드에서는 이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전문가를 초빙해 실질적인 팁 - 예컨대, 합법적으로 절세하는 방법 같은 - 등을 방송에 내보냈다. 가장 궁금하지만 불특정 다수가 청취할 ‘라디오’ 라는 매체에서 이와 같은 행보는(게다가 평론가, 혹은 전문가 집단이 아닌 만화가가) 신선하다는 평. 야심차게 시작한 방송이 이런저런 사정들로 업데이트가 느려지고, 결국 멈추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아직 꾸준함을 유지하고 있으니 보다 정제되고 재미있는 방송을 기대해봄직 하다.
또 하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만화전문 인터넷 라디오가 있다. <만화만담>은 만화에 대한 다양하며, 정제된 정보와 심도 깊은 인터뷰를 주로 다뤘다. 인터넷 서점 예스24를 통해 들을 수 있었던 시즌 1을 지나 한국만화영상진흥원과 손을 잡고 시즌 2를 시작했다. 만화계 소식을 정리하고 핵심을 짚어주는 ‘뉴스테이블’, 뉴스 중에서도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을 집중적으로 조명해보는 ‘30분 초재기 토론실 : 어머! 30분’, 작가 등의 인터뷰 코너와 상황별 만화 추천 코너 ‘만화집현전’, 그리고 현대 만화사의 뒷이야기들을 발굴해 소개하는 ‘발광하는 현대만화사’ 등 꽉 짜여진 구성으로 무려 주 3회, 매 회 한 시간씩 방송되었다. 자칭 ‘만화 골라주는 남자’, 만화 칼럼니스트 서찬휘와 <위대한 캣츠비>의 강도하 작가가 호흡을 맞추다 강도하 작가가 <발광하는 현대사> 연재를 위해 하차한 뒤 시즌 2는 <만화만담>의 프로듀서를 맡고 있던 만화 칼럼니스트 양세종이 진행자로 합류했다. 만화에 관심이 있는 대중들에게 보다 다양한 만화 정보 콘텐츠를 맞춤형으로 제공하겠다는 포부를 밝혔고, 입소문을 타고 인기리에 방송이 되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중단된 지 오래. 완성된 작품으로서의 ‘만화’만을 손에 쥘 수 있는 보통의 독자들은 웹서핑을 하고 트위터의 타임라인을 훑어도 건져내기 힘든 신선한 정보와 인사이트에 관련한 소상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몇 안 돼는 방송임을 생각한다면 아쉬움은 배가 된다.
만화를 단순히 시각예술인 만화 그대로만 소비하고 끝내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매체로의 전이가 이루어지고 있다. 만화에 대한 관심이, 만화에 대해 우리가 알고 싶고 이야기 하고 싶은 것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반증으로 읽힌다. 양적인 성장이 조금 더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말이다. 거기에 더해 ‘책상 위의 인터넷’에서 ‘내 손안의 인터넷’ 세상으로의 진입이 이뤄진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고 이 낯설음에 적응하지 못하던 독자들이 새 환경에 익숙해질 정도의 시간 역시 흘렀다. 질감을 느끼며 넘겨보던 만화가 3.5인치 화면 속으로 들어오고, 다시 모습을 바꾸어 보이지 않고 들려도 충분히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을 만한 시간이 흘렀다는 이야기다. 다시 십 년 쯤 후에는 만화가 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아닌 제 3의 어떤 감각으로 흡수할 수 있는 매체가 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좋은 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다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