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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국제만화축제 2013] <이야기의 비밀> 展, 콘텐츠의 힘

Bicof 2013의 테마는 ‘이야기의 비밀’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은 만화가 8월의 태양을 이겼다.

2013-08-30 임지희
올해로 벌써 열여섯 번째를 맞은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의 막이 올랐다. 길었던 장마가 끝나고 뜨겁다 못해 따가운 햇살이 우리를 포함한 한국의 모든 생물에 크리티컬 데미지를 안겨주지만, 그래서 에어컨 바람이 닿지 않는 바깥쪽은 쳐다보기도 싫지만 만화팬(그리고 만화팬의 부모님)들은 이 모든 역경을 뚫고 뜨거운 축제 현장을 찾았다. 운집한 인파를 보니 태양을 이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Bicof 2013의 테마는 ‘이야기의 비밀’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은 만화가 8월의 태양을 이겼다.
 

 
 
 
 
 
 
   
 
[이미지_01] ‘이야기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Bicof 2013 주제展 <이야기의 비밀>
 
‘이야기의 비밀’이란 테마는 문자 그대로, 이것이 정확하게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의도 역시 숨겨놓은 모양이다. ‘이야기의 비밀’이란 제목만 들어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쉬이 가늠이 되지 않는다. 더위를 뚫고 한국만화박물관에 들어서 1층 주제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슬슬 힌트가 나오기 시작한다. 1층과 3층에 각각 이번 축제의 테마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전시가 열렸다. 윤태호의 <미생>, 장 마르크 로셰트· 뱅자맹 르그랑의 <설국열차>, Hun의 <은밀하게 위대하게>, 허영만의 <제7구단>. 이 네 작품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독자들의 많은 지지를 얻은 뛰어난 작품이며, 또 모두 영상화 되었다는 것이다. 모바일 무비로 새로 태어난 <미생>과 최종 스코어 650만 명을 기록한 <은밀하게 위대하게>, 한국에 프로야구 구단이 여섯 개 밖에 없던 시절 만들어진 만화이지만 21세기 영상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3D 고릴라가 주연을 맡아 활약한 <제7구단> 혹은 <미스터 고>, 한국 최고의 영화감독 중 하나인 봉준호가 연출한 <설국열차>. 이 만화들은 저마다 각자의 사정과 스케일에 맞게 영상화 되었다. 뛰어난 ‘이야기’를 찾는 촉이 서 있는 영화 제작자들의 눈에 이 작품들은 최상급의 열매였을 것이다. 그대로 따서, 취향에 맞게 썰거나 즙을 짜내거나, 아니면 통째로 먹으면 될 일이었다. 이 전시에서는 어째서 이 만화들이 영화화 될 수 있었나를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영화화 된 원작들은 어찌 보면 재미와 작품성을 수차례 검증 받은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을 통해 ‘(좋은)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이번 테마의 ‘비밀’이다.
 
만화는 만화가가 수많은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골머리를 앓으며 원고지(요즘은 컴퓨터던가) 앞에 앉아 있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테마를 정하고 오랜 시간동안 아이템을 묵혀두면서 상상도 해보고, 동료 작가들에게 슬쩍 아이템이 어떤지 물어도 보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고, 취재도 하면서 설정을 하나 둘씩 쌓아나가고, 캐릭터를 잡고, 작화의 스타일도 잡아보고, 큰 줄기가 되는 이야기 사이사이 가지를 칠 작은 이야기들도 생각하고… 어쨌든 무수한 과정이 필요하다. ‘이야기의 비밀’ 전시는 위의 작품을 통해 만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작가들만의 작화 방법과 스토리 구성 방법 등에 대한, 일반 독자와 관객들이 잘 알지 못하는 만화가들의 비밀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그러니까 만화를 만드는 과정을 그대로 공개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맛집으로 치자면 레시피와 요리의 과정을 잘 정리해서 대중에 공개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1층 전시장 입구에는 ‘만화작가, 만화스토리작가가 말하는 이야기의 비밀’이란 현수막이 걸려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작가들이 촌철살인의 한 마디로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비결을 말한다.
 
“여기에서 여기까지, 시나리오에서 콘티까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로보트 태권 V> 김형배)
 
“<바람소리>는 ‘왜노비’ 라는 한 단어에서, <덩더꿍>은 ‘홍윤성’이라는 한 인물에서 시작되었지” (<임꺽정> 이두호)
 
“콘티를 잡을 때 가장 자기가 그리고 싶은 대로 마음 놓고 연출해버리기 때문에 그게 분위기에선 최고이고 그림을 그릴 때 서로 연상작용에 의해서 새로운 힌트가 또 나오기 때문에 콘티가 제일 중요하지.” (<공포의 외인구단> 이현세)
 
“그건 인터넷이죠. 사람들이 어느 칸을 두고 생각하고 정리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만들어 내지 않은, 즉각적이면서 생생한 여론.” (<전설의 주먹> 이종규)
 
“모든 소재는 그 안에 드라마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얼마나 그것에 현미경을 들여다 대느냐, 그 성실함에서 뻗어나가는 드라마나 이야기의 밀도가 달라진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닥터 프로스트> 이종범)
 
“내 만화 이야기의 비밀은… ‘그 사람’에게 있어요. <미생>을 할 때 계속 그 분을 인터뷰 하면서 디테일을 완성했습니다.” (<미생> 윤태호)
 
“먼저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요. 그리고 그 책을 쓴 작가를 만나 취재를 하죠.” (<춘앵전> 전진석)
 
“계속 싸워요. 그러면서 더 좋은 만화가 나오는 것 같아요.” (<죽음에 관하여> 시니·혀노)
 
이들 작가는 저마다 ‘이야기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취재와 자료조사, 누군가는 콘티와 시나리오, 또 다른 누군가는 스토리작가와 그림작가의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의견 교환, 또 누군가는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단 하나의 단어다. 작가의 수만큼 다양한 비밀이, 레시피가 있을 것이다. 1층 전시장에는 위의 코멘트를 남긴 작가들의 이야기 짓는 과정을 작가들이 실제로 작업과정에서 그리고 쓰고 찍어 남겼던 기록물들을 순차적으로 공개하며 우리가 읽고 즐기는 ‘완성된 이야기’인 만화까지 함께 보여준다. 얄미운 캐릭터의 숨겨진 슬픈 사연이 밝혀지면 미워하던 마음도 측은함으로 바뀌듯, 대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넓이와 깊이도 달라진다. 이 전시는 말끔한 완성작 뒤에 숨은 치열한 고민의 흔적들을 보면서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조금 더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보고 이해하게 될 수 있는 기회의 장이다.
 

 
 
 
 
 
 
 
 
 
 
 
 
 
 
 
 
 
 
 
 
 
[이미지_02] 작가들이 그들의 비밀을 살짝 공개한다. 콘티와 설정집, 자료서적과 취재자료 원본들.
 
1층에서 한 층을 건너뛰어 3층으로 올라가면 또 다른 전시가 이어진다. 3층의 주제는 ‘영화 제작된 만화원작’. 최근 개봉한 <설국열차>를 비롯해 한국 만화계의 두 거목인 이현세, 허영만 작가의 작품 다섯 편과 김혜린, 강풀, 이종규·이윤균, HUN, 윤태호 작가 등의 원작만화가 각각의 영화 스틸컷과 나란히 전시 되어 있다. 해외에서 영화의 원천 스토리를 주로 제공하는 역할은 다양한 장르의 대중소설이 맡고 있지만 요즘 한국에서는 대중소설 보다는 만화 쪽이 보다 충실하게 그 역할을 이행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 소설이 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기발하고 독창적인 개인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인물과 이야기가 지금 한국에서는 분명히 대중소설보다 웹툰에서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개성적이고 기발하며,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끔 하는’ 작품들이 언뜻 생각해도 사람마다 몇 편은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돈이 소요된다. 때로는 시나리오를 뽑아내기 위해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수년이 흘러가버린다.
 
만화는 어떨까?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 때 시작하는 인물과 설정을 이미 이야기와 플롯으로 발전시킨 ‘원작’이 이미 나와 있다. 여차하면 이 이야기의 주인인 만화가가 시나리오로 발전시키는 과정에 직접 참여해 만화를 영화 시나리오로 옮길 때 발생하는 갭을 줄여주고, 시나리오 속 이야기의 흐름에 당위를 부여할 수도 있다. 일이 비교적 쉬워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디까지나 ‘비교적’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두 매체는 같은 이야기를 한다 해도 각자의 화법이 있기에 영화적인 화법으로 다시 고치는 과정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XXX 만화 원작으로 만들어진 ’이란 타이틀이 붙은 영화를 볼 때 이제는 “내가 원작을 정말 좋아하는데 왜 그 장면은 뺐어? 만화 장면만 그대로 옮겨 놔도 저 정도는 아니겠다.”는 발언 대신, 그 영화의 바탕을 단단히 다져준 원작 만화의 깨알 같은 퀄리티를 한 번 더 생각하자.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 만화들은 한정된 러닝타임의 영상으로 모두 담아내기엔 너무나 넓고, 깊다. 그리고 비슷해 보이지만 결코 같을 순 없는 만화와 영화의 화법의 차이에 대해서도 인지하자. 이 전시는 좋은 원천 스토리가 갖는 엄청난 힘을 이야기한다.
 

 
 
 
 
 
 
 
 
 
 
 
 
 
[이미지_03] 이번 주제전시에 참여한 작품들. 왼쪽부터 이종범 <닥터 프로스트>, 김혜린 <비천무>, 이종규 이윤균 <전설의 주먹>
 
원작과 영화의 비교전시 사이에 흥미로운 연대표가 보인다. 3층 전시에서 어쩌면 가장 눈에 띄는 정보일 지도 모르겠다. ‘만화 원작의 영화들’. 한국과 세계에서 만화가 언제부터, 어떤 작품들이 영화의 원천스토리로 활약해왔는지를 한눈에 들어오게끔 정리했다. 한국 최초의 만화 원작 영화가 무엇인지 혹시 알고 있는가? 1924년 조선일보에서 연재를 시작한 <멍텅구리 헛물켜기>라는 작품이 무려 1926년, 동명의 무성영화로 제작됐다. 아쉽게도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필름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일제강점기 때도 한국 땅에 누군가는 만화를 그리고 있었고 또 이것을 재미있고 번뜩이는 이야기로 인식하여 영화로 만들 생각을 했다는 것이 이채롭다. 두 번째로 제작된 만화 원작 영화는 2013년 상반기에 등록문화재로 등재된 김성환 화백의 만화 <고바우 영감>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고바우>다. 1959년에 만들어졌는데, 한국전쟁이 끝난 지 십 년도 되지 않은, 모든 게 부족하고 절대 다수가 그저 ‘생존’만을 생각했던 시절이다. 세 번째는? “안알랴줌.” 아직 축제는 끝나지 않았으니,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하시길 바란다.
 
 
[본 기사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과 만화전문 매거진 에이코믹스의 협력을 통해 제작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