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은 미디어다음에서 2012년 1월부터 매주 2회씩 연재되고 있다. 횟수로만 따져도 100회를 훌쩍 넘겼다. 이야기가 더해감에 따라 많은 이들이 서사적 재미에 빠져들고 있으며, 누군가는 주인공 장그래의 입장에서 정서적 감응을 보이기도 한다. 댓글을 읽다보면 등장인물에 감정이입이 된 독자들이 한둘이 아닌 듯하다. 독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작품이 그만큼 사실적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터인가 독자들 사이에서는 <미생>을 영화 혹은 드라마로 만드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면 원작의 아우라에 흠집이 생겨서는 안 되는 일이니 차라리 만화로만 보았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보인다. 이러한 기대와 우려 속에서 바야흐로 <미생>은 독특한 컨셉의 영화를 선보이게 되었다.
2013년 5월에 모습을 드러낸 <미생 프리퀄>은 모바일을 통해 드라마처럼 매주 한편씩 공개되는 방식의 영화다. 모바일 무비라고 했으나 주간단위로 새로운 내용이 공개되는 것이니 드라마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또한, 이번 얘기가 다음 이야기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한편, 한편 독립적인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으니 옴니버스라 하겠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이 배급과 투자를 맡은 것 또한 눈에 띄는 대목이다. 즉, <미생 프리퀄>은 기존의 일반적인 연출, 제작 그리고 배급방식에서 벗어난 독특한 형태의 옴니버스 드라마인 셈이다. 물론 그 출발점이 웹툰 <미생>에 있다는 점을 놓칠 수 없다.
웹툰 <미생>을 알면 더 재밌다!
총 여섯 편으로 구성된 <미생 프리퀄>은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이 저마다 다르다. 즉, 웹툰 <미생>에서 주요역할을 담당한 캐릭터들이 이번에는 각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마치 ‘내 인생의 무대에서 주인공은 나’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제각각의 사연을 풀어간다. 그리고 모든 사연은 웹툰이 보여주었던 현재보다 앞선 시기를 조망한다. 즉, 장그래를 비롯해 안영이, 한석율, 장백기 등 신입사원들의 경우 원인터내셔널에 입사하기 이전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물론, 유년기로부터 청소년기 그리고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인물별로 나타나는 과거의 시간대 역시 제각각이다. 웹툰에서 장그래의 최측근이었던 오 팀장과 김 대리 역시 과거의 시간으로 회귀했다. 웹툰처럼 두 인물은 넥타이를 매고 사무실에서 등장하지만, 각각 차장과 노련한 대리의 직함 대신 대리와 신입대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과거로 돌아간 등장인물들의 시간은 프리퀄(prequel)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여진다. 6편 모두 ‘전편보다 시간상으로 앞선 이야기를 보여주는 속편’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부합되는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사연은 다시 원작을 알아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원작을 몰라도 무방한 에피소드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원작을 알아야 영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는 에피소드는 장그래, 안영이, 한석율 편을 꼽을 수 있겠다.
장그래의 경우 에피소드가 지닌 주요 테마는 역시 바둑이다. 입단에 실패하면서 프로기사의 꿈이 좌절되고 방황하는 시절의 장그래 모습이 담겨있다. 아파트 단지를 돌며 우유배달을 하면서도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해 바둑에 얽매인 모습도 함께 보여준다. 엘리베이터 문을 바둑판 삼아 매일 상대해주던 이가 수위아저씨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제 바둑은 세상과 두게”라는 언급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일종의 반전이리라. 즉, 인생에 대한 노련미가 보이는 나이 지긋한 인물의 등장을 통해 이 에피소드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해진다. 혹, 웹툰을 통해 장그래의 캐릭터를 이미 알고 있는 이라면 새삼스러운 느낌이 드는 전개일 수도 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원작의 장그래를 알지 못하면 영상 속의 장그래 만으로는 어쩐지 부족한 느낌일 수도 있다는 얘기도 된다.
한편, 안영이의 에피소드는 첫사랑의 두근거림과 성장기의 아픔이라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 일요일의 조용함이 감도는 학교에 등장한 소녀는 자신의 책을 챙겨 교실을 나가려다가 한 남학생의 이름이 적힌 자리에 앉아 자주 전학을 다녀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다. 이때쯤 관객들은 그녀가 짝사랑하는 남학생을 두고 전학을 가려나보다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바로 다음 장면에 그 남학생과의 만남이 그려진다. 이어 “내일 보자”라고 인사하는 남학생에게 웃으며 ‘그래’라고 답하는 소녀의 모습으로부터 전학이 아니라 그저 책을 가지러 온 것이구나 예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군 지프에 몸을 실은 그녀의 모습이 보이며 그녀의 전학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사춘기 소녀의 풋풋한 첫사랑을 테마로 다루고 있지만, 그 주인공 소녀의 이름이 ‘안영이’가 될 때, 이야기의 이해는 좀 더 깊어질 수 있다. 무엇보다 웹툰을 보았던 독자들은 그녀가 장그래에게 장난을 쳤던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언제나 냉정하며, 이성적이어서 팀 선배들마저 설설 기게 만들었던 그녀가 장그래에게 장난으로 인사를 받아내는 장면은 안영이 캐릭터에서 의외의 모습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 모습의 출발은, 실은 학창시절에 자신이 좋아했던 남학생이 자신에게 장난쳤던 모습 그대로임을 프리퀄은 보여준다. 이는 곧 직업군인인 아버지로 인해 자주 전학을 다녀야 했던 원작 속 안영이의 성장기 아픔을 고스란히 담아낸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웹툰이 보여준 안영이를 기억한다면 영상이 담아낸 두근거림과 아픔은 더욱 명확해진다.
한석율의 에피소드는 여섯 편의 프리퀄 가운데 웹툰 속 캐릭터와 시간적인 편차가 가장 크다. 사춘기와 청년기의 모습을 담아낸 안영이나 장그래와는 달리 한석율의 경우 유치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눈 내리는 겨울밤, 아이들이 가득한 유치원에 산타클로스가 방문한다. 많은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선물을 기대하고, 그 속에서 어린 한석율의 모습도 보인다. 부모님들이 준비했을 선물들이 하나, 둘 주인을 찾아가는 동안에도 석율은 자신의 선물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끝내 그의 선물은 드러나지 않는다. 기대가 안타까움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석율의 아버지와 삼촌들이 등장하고, 공장에서 준비해온 선물이 모든 아이들의 주목 속에서 공개되면 석율의 꿈도 커나간다. 눈 내리는 겨울밤, 아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한 아버지 모습. 훈훈하다. 그리고 그 훈훈함은 웹툰에서 ‘현장’을 중시하는 상사맨 한석율을 길러낸 토대다. 인턴시절, 왜 그렇게 공장에 파묻혀 있었는지에 대해 수긍이 가게 만든다. 그러니 원작을 알아야 프리퀄에서 보여지는 석율의 모습에 대한 이해가 구체적일 수 있으며, 프리퀄을 통해 원작의 이해 또한 깊어진다.
웹툰 <미생>을 몰라도 상관없다
한편, 원작을 보지 않아도 이해하는데 큰 무리가 없는 에피소드는 장백기, 김동식, 오상식 편이다. 특히, 김동식과 오상식의 경우는 전체 에피소드 가운데 유일하게 원작의 주요 배경인 회사 사무실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긴 하지만, 굳이 원작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영상을 받아들이는데 큰 무리가 없다.
우선, 김동식의 경우 ‘사내연애’를 테마로 다루고 있다. 이제 갓 대리로 승진한 김동식, 하지만 연애에 대해서는 웹툰처럼 젬병이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하루하루가 이어지던 어느 날, 인턴으로 들어온 여사원의 친절을 경험하고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된다. 출근길에 마주친 담 위의 꽃송이도 새삼스레 아름답게 보이는 시절이다. 하지만, 김동식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퇴근길 골목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김동식의 뒷모습에서 쓸쓸함이 번진다. 짧은 스토리지만, 트랜디 드라마처럼 두근거림과 반전이 담겨 있어서 눈길을 모으는 내용이다.
반전은 오상식의 에피소드에도 있다. 눈이 벌게지도록 열심히 일하는 캐릭터로 자리잡은 원작의 모습처럼 영화에서도 오상식은 등장하자마자 사무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모습으로 피곤함이 묘사된다. 과장에서 차장으로 진급해도 변함없이 뻗어있는 웹툰 속 헤어스타일은 대리시절을 연기한 배우의 모습에서도 여전하다. 전화를 받고 다급히 회사를 빠져나온 오 대리의 손에 들려있는 서류봉투가 중요한 계약 건이 있을 것 같은 예상을 유도한다. 도로에 가득한 차들은 오 대리가 탄 택시를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막고 있으며, 빨리 가기 위해 들어선 샛길에서도 교통상황은 최악이다.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택시에서 내려 달려가는 그의 손에는 김동식의 권유에 이끌려 산 꽃 한다발이 들려있다. 이때쯤 영상을 보는 관객들은 ‘대체 누구와 약속한 자리기에 장마 한 다발을 들고 달리는 것일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그 궁금증은 땀범벅이 되어 도착한 병원에서 꽃다발을 건네는 장면에 이르러 풀린다. 그가 사무실에서 그리고 현장에서 발에 땀나도록 뛰어야 하는 이유도 함께 드러나는 장면이다. 한 회사의 대리에서 한 집안의 가장으로 변신하는 장면은 굳이 원작의 아우라가 없어도 감동이 묻어나온다.
장백기 에피소드의 경우는 그 내용에 있어서 웹툰과 가장 무관한 내용인 듯 싶다. 무엇보다 장백기 편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에피소드와는 달리 ‘공포’ 장르의 구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우선, 대학생 시절의 장백기를 보여주면서 그가 얼마나 ‘준비된 인재’인지를 드러낸다. 최근의 취업난을 반영하듯 ‘취업 하지 못하고 죽은 귀신’이 등장하고, ‘도서관의 특정 자리에서 공부하면 합격할 수 있다’는 미신도 함께 한다. 그리고 귀신과 미신이 교차할 때 공포는 구체화되어 다른 다섯 편의 에피소드와는 구별되는 섬뜩한 느낌을 선사하기에 이른다. 원작에 대한 이해 없이도 한편의 공포담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장백기의 선배가 언급한 ‘원인터내셜널 합격’은 웹툰을 본 이들에게는 원작의 오마주로 받아들여져 가벼운 미소를 선사할 것이다. <미생>, <미생 프리퀄>, 그리고...
모두 여섯 편으로 구성된 <미생 프리퀄>은 매회 오프닝에서 ‘미생’의 의미를 자막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미생세대’를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이 시대 젊은이들’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팍팍한 현실에 내몰린 현재의 청춘들에 대해 어떤 이들은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로 정의내리기도 하지만, 누군들 인생에서 소중한 가치들을 포기하면서 살고 싶겠는가. 다만 그렇게 만드는 현실이 있고, 그 현실 속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생 프리퀄>이 보여주는 여섯 편의 사연들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면 ‘희망’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한다. 안영이나 장그래처럼 힘겨운 과거나 고달픈 현실을 마주하고 있을지라도, 혹은 장백기처럼 끝이 없는 노력을 선택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어린 석율의 모습에서처럼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있기 때문에 김동식처럼 아름다운 연애를 꿈꿀 수 있는 권리도, 혹은 오상식 대리처럼 진정한 가장이 되는 무게감도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미생>을 보며 공감하고 <미생 프리퀄>을 통해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우리는 필시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섯 편이 보여주는 사연만으로는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든다면, 인물들이 간직한 사연을 더 공유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장그래의 미래와 조금 더 함께 하고 싶고, 안영이의 상처를 조금 더 나누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장백기의 성실함을 조금 더 배웠으면 하며, 한석율의 꿈에 조금 더 다가가고 싶은 생각인 것이다. 김 대리의 사랑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지며, 오상식 대리에서 오상식 과장이 되기까지 어떤 경험이 축적되었을지 정말 궁금한 것이다. 그렇게 모두와 다시 한 번 동기화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