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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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송희 인터뷰

정송희의 ‘신체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을 보고 흠칫 놀랐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담임 선생으로부터 당한 미묘한 성추행에 대한 여자친구의 담담한 고백을 듣고, 반대로

2004-03-01 김대중









정송희의 ‘신체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을 보고 흠칫 놀랐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담임 선생으로부터 당한 미묘한 성추행에 대한 여자친구의 담담한 고백을 듣고, 반대로 옆집 꼬마에게 자신이 저질렀던 일을 회상하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은 흑백의 강한 화면 속 고해소로 나를 잡아끌었다. 이후 정송희의 만화를 훑어보면서 단순히 페미니즘의 소재를 넘어 사람의 마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섬세한 선을 발견하는 기쁨을 만끽했다. 
지난 몇 년간 그녀의 색이 드러나는 작품이 나오지 않아 궁금해 하던 차에, 새로운 마음과 계획으로 작업을 시작한다는 얘기를 듣고 반가운 마음에 연락을 했다.
   

Q. 늦었습니다.
A. 예, 괜찮아요. 요즘은 새벽 2시 정도에 자요.

Q. 작업하시는 건 얼마나 됐어요?
A. 흐음... 내일까지 끝내려고 했는데... 할 수 없죠.


Q. 간만의 단편 아닌가요?
A. 네. 그래서 좀 긴장하고 있어요.


Q. 몇 년도 생이세요?
A. 1971년생, 서강대 89학번입니다.


Q. ‘학생운동’이 한창 심할 때였겠네요. 안 하셨어요?
A. 만화 동아리 활동을 했어요.


Q. 서강대 만화 동아리요?
A. 예. ‘영상비평’ 이라고.

Q. ‘분뇨의 역류’라는... 걸출한(?) 만화가 있었죠. 왜 이름이 ‘영상~’인가요?
A. 영상에 만화도 들어간다고 할 수 있지만.시작은 88년도라고 알고 있어요. 영상매체 전반에 대한 비평을 함으로써, 자기 관점을 정립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대요. 만화가 소외된 예술장르이다 보니, 다른 시각매체들로부터 부족한 부분들을 관찰하고 습득할 부분들이 많았거든요.


Q. 그럼, 운동으로서 만화를 하신 거네요, 맞나요?
A. 예. 당시에 그렸던 것들은 주로 시사적인 만화들이었죠. 저는 그림 못 그린다고 구박 많이 받았어요.


Q. 보통 만화 동아리는 창작보다 운동이나 만화 보기에 바빴던 걸로 아는데 당시 대학 만화 동아리의 분위기에 대해서 좀 얘기해 주세요.
A. 개인적으로 학생회 활동을 통해 운동을 하다가. 3학년 때부터 부문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만화에서 다시 시작할 생각을 했죠. 주로 아침부터 출근, 수업이 비는 때마다 동아리 방으로 가서, 밤 10나 11시까지 작업하다가 퇴근.비평분과와 창작분과가 있었어요. 창작분과는 1년에 한 번씩 전시회를 하고, 작품집은 보통 2년에 한 번. 비평분과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애니메이션 영화제를 개최하고 비평집을 발표했죠. 그 때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본 것 같아요. 93학번 후배들부터 좀 분위기가 달랐어요. 그네들부터는 확실히 오타쿠라서.... 현실과 취향이 따로 갔죠. 그 전까지는 세미나도 많이 하고, 실천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했거든요.  제가 바로 93학번 세대네요. 입학해서 바로 만화 동아리에 얼굴을 내밀었는데, 전혀 기대 밖이어서 놀랐습니다. 벽에는 열사의 사진이 붙어 있고, 만화 실력은 생각보다 수준 이하고, 만화보다는 운동과 학습이 주를 이루는 살벌한 분위기랄까... 당시에는 대학 내에도 어떤 권위적인 분위기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비판을 하자면, 실제로 오늘날의 만화문화에 있어서 당시의 대학 만화 동아리가 그저 대중적인 독자 이상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거 아닌가 싶습니다.


Q. 즐기는 만화와 해야 할 만화의 괴리는 어땠나요? 
A. 즐기는 만화는 고등학교 때까지 무의식적으로 반성 없이 수용해 온 기성세대와 사회의 영향으로 생각되었고, 그래서 재고의 대상, 접어두기, 서랍 속에 넣어 둘 존재로 다루어졌던 것 같아요. 그것과 단절되니까, 더더욱 맨바닥에 헤딩하는 듯한 정치적 현실 소재의 만화를 그려야 했죠.대체로 삶 속에 운동을 받아들이려 한 사람들은 매 순간, ‘이것이 운동에 의미가 있는 건가, 운동에 도움이 되려면...’ 하는 고민들을 했지만, 나중에는 너무 굳어져 부서지는 조각처럼,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고 회의의 과정을 거치고, 정리하는 거지요. 좀 가슴이 아픕니다. 가장 열정적인 힘이 끓어오를 때 차가워져야 했으니까.만화에 겨우 입문한 수준으로 조악한 선동그림을 그리려고 발버둥친 상황을 생각하니 슬픈데요. 학생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저도 혼자서 계속 만화를 그리지 않았을까...


Q. 다른 돌파구가 존재하지는 않았나요?
A. 당시 미술판에서는 만화운동이라고 있었는데, 대학 내 만화 모임들과 연계는 없었나 봅니다. 실제로 그런 연대가 있었다면 ‘만화를 통한 운동’, 반대로 ‘운동을 통한 만화의 확장’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드는데, 당시 학생들의 만화에 대한 이해와 제작 능력이 수준 미달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미술운동 내부에서도 ‘글쓰기로서의 만화’, 그러니까 ‘언어로서의 만화’에 대한 제대로 된 정의를 갖지 못했던 거 같아요.  예, 그게 아쉬워요. 또 하나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익히고 사용하는 과정들이 미흡했죠. 제대로 익히고 사용하지도 못하면서 주제에 휘둘리고, 어린아이가 도깨비 방망이를 다루려고 할 때처럼 문제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Q. 운동으로서의 만화활동에 대한 생각은 졸업 후에도 변함이 없는지...?
A. 졸업 후에는 만화를 도구로 운동에 사용한 적은 없어요. 만화라는 언어 자체를 익히고 거기에 저를 담아 보려고 애쓰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만화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한겨레 만화학교 때부터인 것 같아요.


Q. 현재 자신에게 만화란 뭔가요?
A. 좋은 질문이 아닙니다만, 답을 줄 만한 분이시라. 저를 표현하는 언어,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중의 하나- 이전에는 유일했지만...),그리고 여기까지 저를 이끌어온 원동력이자 계기...


Q. 그게 본질적인 건가요, 아니면 살면서 생긴 건가요? 만화를 사랑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 것 같습니까?
A.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그림을 그리면 하루의 네다섯 시간은 그냥 지나갔지요. 집안의 언니들이 모두 만화광인지라 글을 배우면서부터 만화를 보기 시작했죠. 재능은 결과가 성공적일 때 입증된다고 보는데... 저는 재능에 앞서 마음이 가는 대로 표현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Q. 미술은 왜 안 하셨어요?
A. 슬프지만 돈이 없어서. 입시 학원비가 장난이 아니었잖아요. 미술 입시 학원비를 감당할 만한 형편이 안 됐어요. 다채로운 매체로 작업에 집중해 보고 싶다는 욕망은 여전합니다.


Q. 졸업 후 바로 만화가가 되려고 준비하셨나요?
A. 학교를 5년 다녔어요. 94년도에 졸업하면서 계속 만화를 그리고 싶었지만 돈을 벌어야한다는 강박이 심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요. 공무원의 마인드는 이렇게 만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루했어요. 그러다가 지원했던 문하생 공모에 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서관을 박차고 나왔죠.

Q. 문하생 공모요?
A. 순정만화 작가 문하생이었습니다. 예전엔 잡지에 만화를 싣고 나서 작품 뒤에다 문하생 구함이라는 광고를 실었는데, 지금과는 달리 꽤 많은 사람들이 지원했어요. 그래서 공모죠.


Q. 당시 조건 같은 건 어땠나요?
A. 작업실에 입주해서 펜선 연습 좀 하다가, 배경 그리기를 하고 그랬는데, 한 달에 10만원 정도 받았던 거 같아요. 거의 용돈도 안 되죠. 청소랑 빨래도 하고, 요리도 하고 그래야 돼요.


Q. 만화가가 되는 다른 가능성은 없었나요?
A. 그냥 작업해서 공모전에 내는 건데... 메이저 출판사의 입맛에 맞는 원고 형태란 게 정해져 있잖아요. 그래서 그걸 알고 익히기 위해 대부분 문하생으로 들어가거나, 그럴 기회가 안 되는 사람들, 혹은 안 맞는 사람들은 만화 학원에 다녔어요. 학원에서는 대체로 잡지사 취향대로 펜선, 스크린톤, 배경 그리기 등을 가르쳤죠. 그것도 한 달에 25만 원 이상 들여서 다녀야 했어요.


Q. 90년대 초반부터 언더그라운드 만화의 움직임이 있었고, 95년쯤부터는 본격적으로 언더 만화가 출판되기도 했는데요. 그런 흐름들에 대해서는 인지를 하셨나요?
A. 자극을 받긴 했지만, 제 작업 방식과 바로 연결시켜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냥, 신선한 시도와 실험들로 받아들이고 관심 있게 봤죠. 좀더 재미있으면 좋겠다 하는 정도...


Q. ‘코믹스’에서 활동하셨던 걸로 아는데...
A. 97년 한겨레 만화학교 다니던 무렵, 신일섭 씨가 영어번역 좀 해 달라고 하면서부터였어요. 그리고 졸업 후 <오즈>에서 작품을 발표하고 나니까, <코믹스>에서도 권유받은 거죠.


Q. 94년부터 97년 한겨레 만화학교에 다니기 전까지의 상황들을 얘기해 주세요.
A. 94년도에 문하생 생활을 4개월하고 교육 쪽에 종사하다가, 95년에 애니메이션 제작과정을 6개월간 배우고 완성된 작품을 SICAF에도 출품했죠. 첫 단편이 본선에 들어서 굉장히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만난 친구들과 작업실을 만들면서 작업을 계속 했어요. 그러다가 원래부터 가고 싶었던 한겨레 만화학교에 간 거죠.


Q. <오즈>의 작가군은 어떻게 마련된 것입니까?
A. <오즈>의 실장님이 돌아다니면서 섭외했죠. 한겨레 만화학교 수업에서 합평회를 청강하고,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스타일과 표현능력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만화가 선생님들, 특히 이희재 선생님께서 괜찮은 학생들이 있으니 섭외해 보라고 권하셨던 것 같아요.


Q. 현재까지 송희 씨의 중심적인 작업들은 모두 <오즈> 시절(98년)부터 2000년 이전에 나왔던 것들이고, 이후에 딱히 창작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작가로서 작업 매체도 바꾸고, 스타일이나 형식도 바꾸려고 하는 시도들이 보입니다. 최근의 일러스트 작업도 단순히 일거리 이상의 새로운 도구를 경험하려는 의도였던 거 같은데, 맞나요?
A. 일러스트의 매력은 한 컷의 그림에 공을 들일 수 있고, 그게 충분히 편집에서 보여지도록 한다는 점이죠. 저는 개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풀어가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림 그리는 걸 너무 좋아하거든요.


Q. 만화와 회화, 일러스트레이션과의 경계란 모호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용어로서 구분을 하지만 말이죠. 모든 이미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고, 만화는 양식적으로 가장 정교해진 형식이라고 보는데, 어떤가요?
A. 현재 상업적으로 제작되는 만화들은 대체로 이야기에 치중하고 있죠. 그래서 이미지 자체는 오히려 좀 소홀해진 감이 있어요. 저는 동화 그림의 질과 만화의 이야기가 만났으면 합니다. 하지만, 만화 출판의 현실을 감안해서 이야기에 무게를 둔 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지요.


Q. 서구적 대안만화의 상황을 보면 흑백과 가벼운 드로잉을 통해 이미지에서 서사로 넘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미지에 들이는 시간보다 이야기에 치중하는 효율성을 중시하는 거죠. 그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고요. 일본만화의 성공 또한 비슷한 지점이 있다고 보는데요...
A. 예, 유럽은 자기의 역사성 속에서 그런 새로운 흐름들이 아시아 만화의 영향과 맞물리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가고 있지만, 아시아나 한국은 사정이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너무 편향된 이미지들을 선호해 왔고, 그래서 좀더 이미지들을 풍성하게 만들어가는 노력도 계속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Q. 이미지 중심의 만화는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아니면 역동적인 연출에서 벗어나 마치 고전적인 그림소설 같은 양식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A. 길이보다는 사고의 깊이, 표현의 방식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정적인 그림을 좋아해요. 가만히 들여다보는 풍경의 이미지들이 좋습니다. 우리 만화에서 부족한 건 이미지의 다양함과 깊이말고도, 반대로 서사의 부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이야기의 위기라고도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서 저 개인적으로 송희 씨에게 기대하는 건 이미지보다 이야기에 더 치중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미지에서 이야기로 나아가는 작가들도 있지만, 송희 씨의 경우는 이야기로 시작해 그걸 지속적으로 이끌어가야 할 사람이 아닌가 하는 거죠.  어떤 점에서 그런 기대를 하시는지... 궁금하네요.


Q. 송희 씨가 부족할 거라는 생각에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대부분 만화가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지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이야기의 문제죠.
A. 흐음... 사회적인 시각과 판단이군요. 결국엔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라고 봅니다.


Q. 지금까지 해 온 작업들은 성(性)을 소재로 여성주의적 시각을 담은 것들이었는데요. 성을 다루는 방식이 충격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상 속에 숨어 있는 매우 은밀한 체험 같은 것들이죠. 여성의 문제는 지속적인 소재, 주제인가요?
A.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은밀함은 관계 맺은 사람들 간의 진솔한 대화로 교류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터부시하는 한국의 관습과 편견들이 그것을 삐뚤어지게 한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드러내고 보여줬죠. ‘이것이 당신들이 그렇게 숨기려던, 사실은 별것 아닌 것들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근데, 다른 매체들에서는 이미 다루어진 것들인지라 갑자기 김이 빠져 버렸죠, 어느 순간부터...


Q. 저는 만화를 통해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좀더 확장된 이야기로 진행되길 바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A. 2년 전쯤 어느 프랑스 큐레이터가 제 작품을 보고 설명을 듣더니, 시큰둥하더군요. 그래서 전 제가 말하려 했던 게 한국에서만 의미 있는, 그것도 만화에서만... 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전 좀 더 보편적이고, 개념적인 작품을 원했거든요. 작가로서의 욕심이라면, ‘좀 더 오래, 좀 더 많이, 넓게’잖아요.


Q. 한국에서 의미 있다면 그걸로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틀로 담아내야 하는 건 작가의 몫이구요. 그렇다고, 개별적인 부분들을 넘어 버리면 문제가 아닐까요? 그게 현실보다는 손에 쥘 수 없는 것을 좇는 게 아닌가 합니다. 작가의 ‘영원에 대한 욕망’은 근대적인 작가관이 아닐지...
A. 아방가르드적 움직임 속에서도 작품의 영속성에 집착하는 흐름이 있지요. 작가란 결코 그 욕망을 버리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행위 예술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되고, 지시문들도 출간합니다.


Q. 요즘에 구상하는 작업들은 어떤 건가요?
A. 현실에서 출발하더라도 환상이나 개념을 많이 담고, 환상이나 신화에서 출발하더라도 현실을 담는 그런 거요. 저는 곧이곧대로 현실을 그리려고 하면, 좀 힘들어해서요. 보르헤스의 <알렙>을 좋아하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폐허의 도시 이미지들은 환상적이에요. 그런 걸 이미지화하고 싶어요.


Q. 이전의 작업들은 보르헤스적이진 않았습니다.
A. 예, 그래서 좀 더 건조한 쪽으로 가기 위한 정지 작업을 몇 년간 나름대로 하려고(원래 제가 좀 건조하지요.)...

Q. 전에 김수박 씨에게도 물었던 건데... 요즘은 이야기와 이미지가 너무 넘친다는 생각입니다.나에게 의미 있어도, 대중에겐 지나가는 것들이죠. 그런 면에서 자신의 작업에 대한 희망이 있나요?
A. 예, 동감. 그래서 그냥 하나의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좀 더 본질에 가까이 가서, 독자들에게 자기 정체성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주고 싶어요. 많은 경험과 이야기들을 자기에게 맞게 정리정돈하는 기회...


Q. 현실적으로 그런 작품의 모델 같은 게 있을지, 아니면 구체적인 상이 있다면?
A. 지난 해 <오노 요코> 전시와 부산영화제에서 ‘파로허저드’의 다큐를 보고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파로허저드는 이란의 시인이자 다큐 감독인데, 정체성에 대한 질문들을 많이 한 작가이지요. 제목은 검은 집 혹은 집은 검다입니다. 이란에서도 가장 소외된 사람들, 문둥병 환자들의 집을 방문하죠. 그들은 아침마다 예배를 드리며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할 수 있는 손과 발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근데 그 손과 발이 다 문드러져 있거든요.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내용의 기도를 하면서 소외됩니다. 작가는 그들을 위해 시를 짓는 법을 가르쳐 주지요. 그들의 언어를 복원하려는 것이죠. 그들에게 집이라는 소재를 주면서 시구 하나를 지어 보라고 합니다.


Q. 단순한 관찰자적 입장은 아니군요.
A. 남자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그들이 사는 집 대문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말하죠, 집은 검다. 느낌이 오나요? 저는 굉장히 감동받았어요. 작가가 직접 나레이션을 넣었는데, 그녀의 음성이 너무 고요하고 깊이 울리거든요. 시인의 목소리입니다. 음유시인이에요.


Q. 오노 요코의 경우는 어떤 건가요?
A. 그녀 역시 새로운 작품을 하나 더 얹기보다는, 관객이 작품과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 조망할 수 있도록 했죠. 그리고 무언가를 만들더라도, 그것을 경험하면서 생각을 하게 했을 뿐, 작품을 제거해 버리려 했어요. 실체란 없다는 거죠. 굉장히 선불교적 작품들입니다. 보는 눈만 높아져서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어요.


Q.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 계획이나 궁리가 있으신가요?
A. 주로 요즘은 인터넷 동화 일러스트를 하고 있고, 가끔 웹진에 작가론·작품론, 기사 등을 씁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는 없지요. 몇 년째 건강이 안 좋아서 치료비도 많이 나갔구요. 그래도 올해부터는 건강도 좀 나아지고 해서 작품을 많이 해 볼 생각입니다.


Q. 장편도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A. 예, 장편으로 하고 싶어요. 지난 2, 3년간 계속 생각한 것들이니까요.


Q. 멋집니다. 앞으로의 작업에 대해 설명 좀...
A. 하나는 인도의 샤자한의 사랑 이야기이고요, 다음은 여행기입니다. 그리고, 북유럽 신화, 나무 이야기... 등등이 있습니다. 북유럽 신화의 개념들이 잘 잡히지 않아서, 그리스 신화나 인도 신화 쪽을 먼저 다룰까도 생각하고 있죠.

 

Q. 신화는 무슨 의미가 있나요? 아까 말씀하신 현실과 환상, 신화를 섞는다는 게...
A. 신화는 개념과 현실을 이어주는 매개입니다. 마치 설화나 민화처럼, 단순한 골격의 이야기를 기초로 개념과 현실 모두를 다룰 수 있죠. 한국 신화로는 제주도 신화를 다루고 싶습니다. 가장 외따로 있었기 때문에 원형을 그나마 유지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모계사회라는 재미난 점도 있고요.

Q. 스타일의 변화도 예상됩니다.
A. 그림은 최대한 프리하게 가거나, 단순하게 갈 생각입니다. 말하고 보니 할 게 정말 많네요.이번 부천만화정보센터 웹진에 내는 작품은 ‘여행기’의 첫 시작인지라 많이 긴장되고, 그리고 싶은 것들에 대한 욕심 때문에 단순하게 처리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요.


Q. 작가적 욕심은 무엇인가요? 의지나 포부도 괜찮고...
A. 저는 삶과 예술은 같이 간다고 봅니다. 작품이 어느 순간 더 이상 성숙하지 않을 때, 작가는 삶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지요. 잠시 동안 그런 노력을 해 왔어요. 그리고 다시 길을 따라 계속 나아가고 싶어요. 그래서 제 본성의 핵심에 최대한 다가가 삶과 작품이 일치되는 느낌을 보고 싶어요. 감사하네요. 좋은 작가를 만나서... 깊이가 있는 작가요. 아직은 말이라서... 결과로 보여드리도록 노력할게요.


기다리겠습니다.


1999년~2000년
⊙ 작가 약력 ⊙
1971년
전라남도 강진 출생
  서강대 불어불문학과 입학
1989년
서강대 만화동아리 영상비평 가입
1994년
졸업 후, 만화가 문하생으로 4개월간 입문
1995년
한겨레 애니메이션 제작과정 6개월 과정 수료
1996년
월간 축구잡지 <축구넷> 에카페 바그다드’ 연재
2000년
여성 포탈사이트 <마이클럽>에 ‘워킹걸 도도’ 연재
2001년
웹진 <코믹스>에 ‘새벽’ 발표/전시
2001년~2002년
<한글 탐정 둘리>의 캐릭터 ‘열무’ 디자인, 카드 애니메이션 작업
  한글 교재 ‘열무 카드’ , ‘열무 만화’ 작업(아리수 미디어)
2003년
동화책 <열무는 치과가 너무 무서워> 일러스트 작업(바오밥나무)
  <바카스 9호>에 ‘바카스에 관한 관찰기록부’ 발표
2004년
<바카스 10호>에 ‘버드나무 숲에 부는 바람’ 일러스트 발표
아리수 미디어에서 인터넷 동화 일러스트 작업


2000년  여성 포탈사이트 <마이클럽>에 ‘워킹걸 도도’ 연재  
 2001년  웹진 <코믹스>에 ‘새벽’ 발표/전시 
 2001년~2002년  <한글 탐정 둘리>의 캐릭터 ‘열무’ 디자인, 카드 애니메이션 작업 
   한글 교재 ‘열무 카드’ , ‘열무 만화’ 작업(아리수 미디어) 
 2003년  동화책 <열무는 치과가 너무 무서워> 일러스트 작업(바오밥나무) 
   <바카스 9호>에 ‘바카스에 관한 관찰기록부’ 발표 
 2004년  <바카스 10호>에 ‘버드나무 숲에 부는 바람’ 일러스트 발표 
   아리수 미디어에서 인터넷 동화 일러스트 작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