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들어서도 자주 재조명 되는 원로 만화가를 꼽으라면 단연 명랑만화의 대가 신문수(78) 화백이 아닐까. 시대를 뛰어넘는 재기발랄한 아이디어가 여전히 빛나는 까닭이다. 그의 대표작은 ‘도깨비 감투’와 ‘로봇 찌빠’. 40~50대 만화 독자들의 어린 시절을 뜨겁게 달궜던 작품들이다. 아마도 두 작품에 얽힌 추억은 저마다 한두 개는 있을 듯싶다. 1970년대에 인공지능 로봇을 등장시키며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었던 ‘로봇 찌빠’의 경우 2009년 후배 웹툰 작가에 의해 ‘로봇 빠찌’로 리메이크 되어 웹툰 세대와 만나기도 하고, 2011년에는 26부작 TV애니메이션 시리즈로 만들어져 전파를 타기도 했다. 최근에는 ‘도깨비 감투’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2001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한국 명작 만화 복간 프로젝트인 한국만화걸작선 시리즈 스물세 번째 작품으로 출간됐다. 당대 인기를 고려하면 진즉 포함됐어야 할 작품인데, 2002년 바다출판사에서 새롭게 출간되며 늦어진 감이 있다. ‘로봇 찌빠’도 언젠가는 걸작선에 포함될 게 확실하다.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신 화백을 경기도 분당의 작업실에서 만나봤다.
Q. ‘도깨비 감투’가 최근 복간됐습니다. 올드 팬들이 반가워할 것 같습니다.
A. 어깨동무 연재가 끝났을 때 곧바로 5권으로 단행본을 냈고, 그 다음에 2002년 바다출판사에서 새로 찍었는데 그것도 벌써 15년이나 지났다. 그 때 찍은 책도 시중에는 남아 있지 않아 팬들이나 애호가들이 어떻게 구입할 수 없는 지 연락이 자주 왔었는데 정말 반가워할 것 같다. 지난해 12월 20일에 클로버문고의 향수 회원들이 복간 기념으로다가 조촐한 자리를 마련해 나와 이두호, 윤승운, 이정문 등 명랑만화 4총사를 초청했다.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사인회도 했다. 클향 회원들은 모두 마흔이 넘었는데 만화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사인하느라 팔이 빠질 뻔 했다. 허허허.
Q. 70~80년대 활발하게 활동했던 작가 중에 선생님 작품이 자주 재조명 받는 것 같습니다.
A. ‘도깨비 감투’는 1970년대 초 연재할 때도 어린이 독자들에게 크게 어필했지만 그 소재 자체가 신비감을 주는 것 같다. 과학이 발달하고 사회가 변해도 도깨비는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아이템이다. 그 왜 요즘 도깨비라는 드라마도 인기 있지 않나.
Q. ‘도깨비 감투’는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됐나요.
A. 1974년 5월에 연재를 시작했다. 그 시절 어린이 잡지는 새소년, 소년중앙, 어깨동무 경쟁체제였는데, 어깨동무에서 만화로 64페이지짜리 별책부록을 만들려고 했다. 당시 출판사 입장에선 제작비도 많이 들고 해서 모험이었다. ‘도깨비 감투’가 처음이었는데 반응이 무척 좋았다. 당시 충무로에 어깨동무가 있었는데, 잡지가 나오는 날이면 건물 입구를 책 사러 온 문방구 주인들의 자전거 부대가 건물 입구에 진을 치고 있을 정도였다. 당시엔 학교 앞 문방구에서 잡지를 팔았다. 64페이지씩 20개월을 하니 아이디어가 고갈됐다. 그래서 소재를 바꿔 ‘원시소년 똘비’를 그렸다. 그때가 참 재미있었던 게 핸드폰도 없지, 집에 전화도 없지, 그래서 집에서는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윤승운, 오원석씨와 셋이서 종로 5가에 있는 오피스 빌딩에 네 평짜리 닭장 같은 공간을 얻어 교환전화 하나씩 놓고 작품 생활을 했다. ‘도깨비 감투’를 6개월쯤 하니까 어깨동무에서 하나 더 해야겠다며 윤승운씨에게 원고 청탁을 했는데 그렇게 연재하게 된 작품이 바로 ‘요철 발명왕’이다. 그 만화도 인기가 정말 좋았다. 한 달은 ‘요철 발명왕’에 팬 엽서가 더 왔다면 다음 달은 ‘도깨비 감투’가 더 오고, 그렇게 서로 경쟁하고 응원하며 만화를 그렸다. 윤승운씨는 데뷔 때부터, 60년대 초부터 만난 사이다. 오십 몇 년을 함께했다. 만화계에선 실과 바늘이라고 한다. 윤승운이 있으면 그 옆에 신문수가 있고, 신문수가 지나가면 윤승운이 같이 간다고. 대개 신문, 잡지에 세트로 연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윤승운씨가 먼저 하면 내가 하게 되고, 내가 하면 윤승운씨도 하게 되고.
Q. ‘도깨비 감투’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나요.
A. 설화가 모티브였다. 저걸 시작하며 도깨비 감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 지 더 신비하게 만들어야 했는데. 괴팍한 몇 대 조 할아버지가 귀신들하고 싸우면서 싸울 때마다 귀신들의 머리카락이나 수염을 뽑아 그것을 엮어서 감투를 만들었다고 설정했다. 238가지 귀신이라고 했는데 처음에 귀신 종류를 우물귀신, 달걀귀신, 몽달귀신 등 가짓수를 채우려면 끝이 없을 것 같아 대충 열 몇 개 정도 나열했던 것 같다. 허허허.
Q. ‘도깨비 감투’는 해리 포터 못지 않은 한국적인 판타지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A. 영화계 쪽에서 ‘도깨비 감투’를 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사 영화 기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해리 포터에 보면 벽을 뚫고 지나가고 그런 장면이 있는데 옛날 만화에서 다 했던 거다. 병풍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사실 ‘도깨비 감투’를 그릴 때 감투를 쓰면 안 보이는 것으로 표현하려고 사람을 점으로 그렸는데 정말 고생 했다. 요즘엔 촬영 기법이 발달해 어떻게 표현될지 기대가 되는 부분도 있다.
Q. 나중에 ‘신판 도깨비 감투’도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A. 어깨동무에서 20개월 하고 끝났는데 소년한국일보에서 연재만화를 해달라고 했다. ‘도깨비 감투’라는 타이틀이 너무 아쉽기도 해서 ‘신판 도깨비 감투’를 그렸다. 오리지널은 어깨동무다. 그런데 신판을 그리면서 오리지널만큼 크게 의욕이 나지는 않았다.
Q. 또 하나의 대표작 ‘로봇 찌빠’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A. 쑥스런 이야기지만 신문수라면 연재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작가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1979년에 소년중앙에서도 64페이지짜리 별책부록 만화를 한다고 요청이 왔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도깨비 감투’하고는 상반된 이미지의 작품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로봇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로봇이라고 해봐야 산업 로봇 정도 개념이었는데 앞으로는 생활 로봇에 인공지능 시대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일본에는 아톰이나 마징가Z가, 우리에겐 태권브이가 있었는데 그런 큰 스케일의 로봇이 아니라 아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느끼는 로봇을 만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팔팔이를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외로운 아이로 설정하고 찌빠를 친구로 보내줬다.
Q. 찌빠와 팔팔이가 이별할 때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A. ‘로봇 찌빠’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정말 길게 연재했다. 1979년도에 시작하고 소년중앙이 1994년 폐간할 때까지 별책부록에서 하다가 본지로 들어가서 하다가, 또 아이디어가 궁해지면 1년 정도 다른 작품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독자들이 ‘로봇 찌빠’를 연재해달라고 요청하는 엽서를 보내오면 다시 시작하고 그랬다. 오리지널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엔딩이었는데 ‘로봇 찌빠2’는 업그레이드 하러 간다고 끝냈던 것 같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허허허.
Q. ‘도깨비 감투’나 ‘로봇 찌빠’를 그릴 때 이미 중년이었습니다. 아이들 마음을 콕콕 짚어내는 아이디어를 어떻게 찾았는지요.
A. 그때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아이디어를 어떻게 어디서 찾느냐고. 아이들의 평범한 행동도 보통 사람이 보는 것과 우리 만화가들이 보는 게 다르다. 만화가들이 보면 다 소재다. ‘로봇 찌빠’를 그릴 때 쌍문동에서 살았는데 동네 골목에서 학교 앞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면 아이들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을 보고 낄낄 웃는지 유심히 지켜봤다. 우리 아이들도 고만고만할 때였다.
Q. 웹툰 시대입니다. 네이버 한국만화거장전에 작품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웹툰 작업에 대한 생각은 없는지요.
A. 70대 후반이다. 솔직히 감이 떨어진다. 20대 신인과 어떻게 겨루겠나. 웹툰 생각은 없다. 그래도 특별히 올드 팬들이 찾아주고, 내 만화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 요새는 육군3사관학교에서 충성대 신문이라고 월간으로 나오는 게 있는 데 거기 만평을 그리고 있다. 그쪽 편집하는 분들이 군인 만화(‘카이젤 상사’)도 했으니 만평 그려주면 좋겠다고 연락이 와서 2년째 하고 있다. 여기 저기 원고 요청이 들어오는 데로 양이 많지 않은 건 한다. 요즘은 빨리빨리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양이 많은 건 감당하지 못한다. 원고료가 많고 적은 것을 떠나 만화로 평생을 먹고 살았고, 만화 덕을 많이 봤기 때문에 만화로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 때문에 재능기부 형식으로 벽화도 그려주고 또 자선 사인회도 갖는 경우가 더러 있다. 시간이 남으면 원고가 아니라 그저 내가 좋아서 조그만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려 갖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자체가 재미있다.
Q. 어린 시절에 어떤 만화를 즐겨 봤나요.
A. 김용환의 ‘코주부 삼국지’가 생각난다. 초등학교 다닐 때 반에서 서로 빌려서 보고 그랬다. 누가 학교에 갖고 오면 빌려달라고 줄서곤 했다. 그림이 굉장히 따뜻했다. 또 캐릭터에 딱딱 맞게 표현이 잘 되어 요즘 우리가 갖고 있는 유비, 관우, 장비 이미지의 바탕은 거기서 온 거다.
Q. 김용환 선생님이 명랑만화의 시초인가요.
A. 김용환 선생님은 역사 만화나 극화 쪽으로 봐야 한다. 명랑만화의 원조는 길창덕 선생님이다. 우리나라 명랑만화의 창시자나 다름없다. 나나 윤승운씨나 모든 명랑만화 작가들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길 선생님의 작품이 그렇게 불처럼 인기가 있으니 명랑만화 후배로서 힘이 났다. 60~70년대는 대개 명랑만화였다. 극화체가 많지 않았다. 신문, 잡지 쪽은 극화가 없었다. 신촌 만화, 단행본 만화 쪽에 극화하는 분들이 있었다.
Q. 흔히 만화가들은 한 만화가의 문하에 들어가 도제식 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A. 그 당시 신촌 만화 쪽으로는 만화를 배우려면 선생님 밑에 가서 일을 도와주고 교육을 받다가 나중에 독립하고 그랬는데 명랑만화가들은 좀 달랐다. 다들 개성을 가지고 혼자 데뷔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어떤 선생님 밑에 가서 도제식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Q. 동양화를 공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화가로 어떻게 마음을 바꾼 것인가요.
A. 지금이니까 1억원에 팔리는 그림도 있지만 그 시절에는 동양화로 밥을 먹기 힘든 시기였다. 박수근 그 양반도 돈이 없어서 그림을 내다 팔아 쌀을 살 정도로 가난한 시절이었다. 중학교 은사님이 유촌 김화경 선생님이다. 우리나라에서 초가집을 최고로 잘 그리는 분이었다. 그래서 나도 초가집을 많이 좋아하고 즐겨 그린다. 만화가 중에서는 내가 초가집으로는 ‘왔다’다. 허허허.
Q. 요즘 건강은 어떠신가요.
A. 나이가 있으니까 당뇨하고 혈압은 있는데 당장 힘들 정도는 아니고 약 먹으며 잘 조절하고 있다. 사지는 멀쩡하게 아픈 데는 없다. 아직까지 이동 능력이 있어서 좋다. 지난해 9월에 마음이 맞는 명랑만화 작가끼리, 나랑, 박수동, 이두호, 이정문, 윤승운 이렇게 다섯 명이 일본 종주 열차 여행을 다녀왔다.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7박 8일 기차를 탔다. 정말 좋은 여행을 했다. 원래는 스케치북도 준비해 가서 다섯 명이 기행 만화를 한 번 해보려 했는데 일정이 빡빡해 그림 그릴 시간이 없었던 게 아쉬웠다. ‘꽃보다 청춘’ 같은 TV프로그램이 있지 않나. 우리처럼 개성 강한 캐릭터를 그린 만화 작가들의 여행을 조명해도 대박일 것 같은데?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가 토크쇼처럼 굉장히 다양하고 재미있거든. 허허허. 또 함께 어디를 다녀올지 생각 중이다.
Q. 요즘 웹툰을 그리는 후배 작가들은 많이 알고 있는지요.
A. 조석, 주호민 정도만 알고 있다. 예전에 만화의 날 행사에 가서 놀란 적이 있다. 사인회를 하는 데 나나 윤승운, 이정문씨 부스에는 사람이 없고, 주호민, 조석 쪽에 줄을 길게 서있는 거다. 세월이 참 무상하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Q. 그림 그릴 때 태블릿도 사용하는지요.
A. 태블릿은 쓰지 않는다. 종이에 그린다. 포토샵은 할 수 있다. 컴퓨터로 색칠하는 거. 일장일단이 있다. 한참 하다 보면 싫증이 난다. 그래서 다시 수채화처럼 색을 입히기도 한다.
Q. 요즘 고래가 그랬어나 개똥이네 놀이터 등에서 어린이 만화가 연재되기도 하지만 명랑만화의 명맥이 끊어진 것 같아 아쉽습니다.
A. 정말 아쉽다. 내가 지금 20대 작가라면 명랑만화를 그리겠다. 지금 시대 이 상황에서도 명랑만화는 된다고 본다. 정치고, 시사 문제고 소재도 많지 않나. 요즘 웹툰에서는 제대로 된 명랑만화가 없는 게 답답하다. 만화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1980년대 후반부터 명랑만화가 안보였던 것 같다. 일본 그림체가 들어오고, 명랑만화 그림체가 잘 안보이니까, 자꾸 봐서 맛을 알아야 하는 데 맛도 모르고 눈에도 안보이니 이렇게 됐다. 요즘 웹툰은 대동소이한 그림체가 많다. 개성 있게 해야 한다. 조석의 그림도 개성이 뚜렷한 그림체이지 잘생긴 캐릭터는 아니지 않나. 그래도 스토리가 좋고 아이디어가 좋고 그 그림을 자꾸 보게 되니 익숙해진 것 아닐까. 시추에이션 단막 같은 작품을 그렇게 십 몇 년 오래 연재하고 있다니 그 친구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자기 작품을 관리할 줄 알고 아끼는 친구다. 만화가가 되려면 그림에 개성이 있고 자기 영역이 있어야 한다. 비슷비슷하게 경쟁하면 개성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후배들이 지금쯤 명랑만화를 한 번 해볼 만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물론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요즘에 맞는 새로운 방식이 있을 거다. 자유스럽고 선도 꾸불꾸불하고 자유분방하고 여백이 있는 만화가 명랑만화다.
Q. 명랑만화도 한창 인기 있을 때도 검열 대상이었는지요.
A. 있었다. 본지에 그리는 그림은 미리 심의 받지 않았는데 별책부록은 심의를 받았다. 소재를 마음대로 그리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항상 마감에 쫓기기 때문에 ‘빠꾸’나면 안됐다. 그래서 자기 검열이 심했다. 검열이 한국 만화 발전에 장애가 된 것은 분명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만화에는 시대상이 깔려 있다. 어떤 시대, 상황이 만화 소재로 안 들어갈 수는 없다. 당시 땅굴, 간첩 이야기가 많았다. 그래서 소재로 쓰기도 했는데, 지금 평론가들이 반공 만화라는 식으로 평가하는 게 아쉽다. 정권에 아부하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 그 당시 세태가 그랬다.
Q. 바람이 있으시다면.
A. 우리 만화 발전의 한 장을 차지한 명랑만화인데, 기념관 하나 정도 있으면 좋겠다. 주변에 친한 작가들을 보면 작품과 자료들을 자기들이 갖고 있다. 한 시대 명랑만화를 부흥시켰던 작가들이다. 명랑만화 기념관이라도 생기고 작품을 기증받아 잘 관리해줬으면 좋겠다. 만화영상진흥원이 박물관도 만들어 잘하고 있지만 거기엔 모든 만화가 다 들어가지 않나. 잘 보관하겠지만 수장고에서 잠자기 십상이다. 우리가 언젠가 죽으면 이 많은 귀중한 자료들이 어떻게 되나 싶다. 이두호씨도 교수 정년퇴임하고 밖에 있던 작업실을 정리하고 집으로 다 갖고 들어갔다고 한다.
Q. 후배들에게 조언해준다면.
A. 각자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개인적이 되지 않았나 싶다. 옛날에는 마감하고 원고료를 받으러 잡지사에서 만나면 더치페이로 막걸리도 마시고 했다. 같은 만화계에 몸담고 있으니까 자주 만나 동료 의식을 키우고 인간관계도 돈독하게 그렇게 함께 살아가면 좋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