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외국에서도 한국 만화를 주목하는 움직임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지금껏 우리가 배워야 할 대상으로만 받아들여 왔던 일본 만화계에서도 『열혈강호』 수입, 『신·암행어사』 연재 및 많은 한국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추세다. 그 때문인지 한국 만화를 연구하고자 하는 모습도 많이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가와사키시 시민 뮤지엄이나 일본 최초로 4년제 만화학과를 설립한 교토 세이카대 등에서도 그러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한국만화박물관 개장과 관련하여 지난 9월 17일 부천만화정보센터를 방문한 일본의 만화 연구자 야마나카 치에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야마나카씨는 일본 오오사카대학 커뮤니케이션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연구자로, 특히 한국만화와 일본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 논문을 쓰고 있다. 일단 야마나카씨에게 일본의 만화 관련 자료 보존 실태에 대해 질문해 보았다.
"일본에서는 개인 소장가들의 만화 도서관이나 박물관, 또는 중고만화서점 등이 활성화되어 있어서 부천만화정보센터와 같은 관 주도의 기관은 사실 매우 적습니다. 가와사키시 시민 뮤지엄도 어디까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설립한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만화는 그 중의 한 파트로서 가끔씩 관련 전시회가 열릴 때에만 소개될 뿐 일상적인 대출이나 학술 연구를 위한 자료 제공의 의미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마나카씨에 따르면, 카와사키시 시민 뮤지엄의 경우 만화책은 대관실에 비치되어 있지 않아 일반인들이 열람할 수 없으며 만약 관심 있는 연구자가 대출을 원할 경우 만화 담당 큐레이터에게 부탁해서 거의 개인적으로 꺼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도서관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박물관으로서의 의미라고 해석되어야 할 것이고, 그것도 매우 제한적인 박물관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일본의 연구자들은 본인이 소장하고 있지 못한 만화를 어떻게 연구하고 있는가? 일본 국내의 작품이라면 일단 중고서점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일본은 세계에서도 유수한 중고서적 유통국이다. 거리마다 중고서점을 쉽게 찾을 수 있고, 그 중 상당수가 만화를 주요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다. 만다라케와 같은 대형 전문서점이 매장을 여러 군데 갖고 있기도 하며(*주1), BOOK-OFF와 같은 중고만화서점은 전국 수십 여 곳에 체인점을 두고 영업을 한다.
*주1 - 만다라케는 현재 도쿄에 3군데 (나카노, 시부야, 신주쿠), 기타 오오사카, 후쿠오카, 나고야에 지점을 두고 있어 일본 내에만 5군데의 대형 점포를 갖고 있다.
게다가 미국, 이탈리아에 이어 최근 한국에까지 해외 체인점을 만들어서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런 중고서점에서조차 구할 수 없거나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 너무나도 높은 프리미엄이 붙은 작품의 경우에는, 개인 소장가가 따로 설립한 만화도서관을 방문하는 수밖에 없다. 일부는 국회도서관에서 찾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개인 소장품에 대한 조사를 선호한다.
어째서 한국과 일본의 상황이 이렇게 다를까? 오히려 한국보다도 만화 산업이 훨씬 더 발전되어 있다고 일반적으로는 생각되곤 하는데, 만화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살펴보면 일본의 경우 한국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하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굳이 지원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충분히 발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으나, 전국민에게 추앙 받는 테즈카 오사무와 같은 작가가 이미 1950∼60년대에 등장했고 그때까지는 일본의 만화 산업도 현재와 같이 화려한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럼 왜 일본 만화는 국가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가? 그 일단은, 일본의 만화가들이나 만화평론가들이 대부분 좌익 성향을 지니고 국가의 간섭에 대해 대단히 배타적이라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과거 치바 테쯔야의 걸작 만화 『내일의 죠』가 학생운동권의 우상이었다는 이야기는 국내에서도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 당시 『내일의 죠』를 읽던 운동권 학생들이 나중에 만화잡지의 편집인력으로도 다수 유입되었다. 물론 만화계만이 아니라 애니메이션, 영화계, 기타 전문잡지 기자로도 많이 들어갔는데, 이 때문에 일본의 문화산업의 중추에는 1970년대부터 유입된 이런 좌익 성향의 인력도 상당수 존재한다. 만화가나 만화평론가, 기타 만화업계 종사자들 중에도 그 쪽 출신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대부분 만화 산업 자체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지원을 받다보면 아무래도 틀림없이 자유로운 창작 활동이 불가능하고 자신의 작품이 국가의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점과, 그 무엇보다도 그런 식으로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아야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고 비치는 점이 창피스럽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는다면 만화 산업이, 혹은 만화계가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으로 간주되어,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라고 치부되는 성향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아직 일본 만화계의 중추로 있는 지금까지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최근의 젊은 만화 인력은 그렇지도 않습니다만, 현재에도 상당수의 만화평론가들이 국가로부터 지원 받는 기관에 소속되거나 하여 특정한 직함을 갖는 것을 대단히 꺼리는 것만 보더라도 그런 성향은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당장 작년에 설립된 일본의 만화학회 구성원들의 프로필을 보십시오."
야마나카씨가 말한대로 실제로 2001년 7월 29일에 설립된 일본 만화학회의 구성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학의 교수나 연구원의 직함을 가진 학계 인력을 제외하면 참여하고 있는 전문 만화평론가들 전부가 평론가만을 공식 직함으로 가지고 있다. 거기에 더불어 몇몇 대학의 비상임 강사 정도를 겸임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일본에도 최근 들어 학계 인력 중에서 만화를 연구하라는 명목으로 국가가 고용한 연구원이 생겼다. 하지만 일본 전체를 통틀어 아직 단 2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토 세이카대학이 추진하고 있는 만화연구소 계획은 상당히 고무적이지만, 그래도 이 역시 일개 사립대학에서 설립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지금까지 카와사키시 시민 뮤지엄이나 개인의 도서관·박물관을 제외하면 처음인 교토 세이카대의 만화 연구소가 설립될 예정인데, 학문적 연구가 주된 목적일 대학 연구소가 만화라는 장르에서 어떤 기능을 발휘하게 될지 관심을 끌고 있다고 한다. 그런 일본의 상황에 비해, 물론 만화계 내부에서 볼 때에는 여타 산업이나 특히 관련 분야인 애니메이션에 비해 미약하다는 느낌이 강하겠지만 한국의 만화 산업 지원 상황은 결코 나쁘지 않다. 다만 더 큰 문제는 규제를 완화시켜주는 것이 다른 어떤 지원보다도 가장 시급하다는 것이다. 현재 만화에 대한 규제가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외국에서는 적고 한국에서만 특별히 많다고는 볼 수 없겠으나, 어쨌든 한국에서 만화가 청소년에 유해한 매체라는 등의 잘못된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의 만화계에서 바라보는 한국 만화의 저력이란 무엇일까.
"일본 만화에서 느낄 수 없는 것들이 보이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정적인 묘사로 일관되는 일본 학원물에 비해 한국에서는 학생들의 생활이 그려져 있기도 하고, 순정만화에서도 일본과는 다른 방식의 시도가 자주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최근 일본에서 한국 만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는 해도, 대개가 소년·청년 만화에 무게중심을 싣고 있는 모습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저는 순정만화를 중심으로 한국 만화가 일본과 다른 부분을 비교·분석해보고 싶습니다. 제 연구 주제 또한 거기에 초점을 맞출 생각이고요."
야마나카씨는 한국 만화 연구를 위해 연세대 어학당에서 1년 가까이 한국어 연수를 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자료 조사를 실행했다. 그러면서 특히 한국과 일본의 만화 평론의 차이점, 만화 시장이나 출판 시스템에 관련된 사항을 중점적으로 알아보았다고 한다. 그 성과는 올 연말쯤에 연구 논문으로 발표될 예정이지만, 단순히 한국에는 일본 만화를 표절한 이런 작품이 있었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다 새로운 방식의 소개를 시도해보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한국에서 일본 만화의 표절이 있었던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그 경우 동일한 내용을 한국적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한국만의 특성이 드러나고 있다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소년·청년 만화 이외에 사실 한국 만화만의 더욱 큰 강점인 순정만화에 대한 비교를 자세히 하고 싶다는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만화는 천계영의 『오디션』이라는 야마나카씨, 앞으로도 자료열람 차 부천만화정보센터를 찾아오고 싶다면서 새롭게 개장될 부천 만화박물관에도 관심을 표했다.
"한국에서는 이왕 어떤 방식으로나마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이 시작된 것이니, 일본의 과거 상황에만 너무 집착하지 말고 보다 새로운 만화산업·문화로서의 입지를 굳히도록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점점 한국 만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본. 한국 만화가들의 일본 잡지 연재, 한국 만화 단행본 출간에 이어 연구 부문에서도 한국을 찾고 있는 것이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