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작가님, 안녕하세요? 간단하게 소개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A. 안녕하세요. 만화가 나윤희입니다. 이렇게 서면으로나마 인사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 <손 안의 안단테>, 나윤희 (출처_네이버웹툰)
Q. 요즘 <손 안의 안단테>를 새로 연재하시잖아요? 많이 바쁘실 것 같습니다. 작가님, 근황 좀 이야기해 주세요.
A. 지난 작품 연재 당시의 경험으로 교훈을 얻어 세이브 원고를 많이 비축해놓고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아직은 워라밸을 수월하게 유지 중이에요. 요새는 수영을 배우고 있답니다.
Q. <손 안의 안단테>의 매 화마다 ‘피네’, ‘달세뇨’ 등, 그 화의 부제와 맞는 음악 용어가 있는데요. 작가님이 음악에 대한 관심이 보이는데요. 제가 생각한 게 맞는지요? 혹시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셨다거나, 잠시라도 배우셨다거나요? 음악에 대한 조예가 하나도 없다면, 이런 주제로 작업을 해 나가시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서요.
A. 저도 이전까지는 피아노라는 분야에 대해 완전히 문외한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렇듯 어렸을 때 동네 학원에서 딱 바이엘까지만 뗀 게 전부였는데요. 그마저도 다 까먹었답니다.
이번 작품의 소재를 피아노로 결정하고 나서야 배경 조사를 시작했고, 1년 전부터 피아노 개인 레슨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한 주는 피아노 레슨, 그 다음 주는 피아노와 클래식 업계에 대한 인터뷰, 이렇게 격주로 레슨과 인터뷰를 하며 배경 지식을 쌓았습니다. 세세한 부분은 선생님께 자문을 구하고 있고, 그 외에 피아니스트 분들께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제 피아노 실력은 현재 다시 바이엘 단계지만요. 재미를 느껴서 취미로는 계속 배우고 있습니다.
△ <손 안의 안단테>, 나윤희 (출처_네이버웹툰)
Q.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 주인공들의 감정선이 정말 섬세하다고 느껴지는데요. 캐릭터를 설정하실 때, 이런 감정선에 대해 중점을 두고 하시는지요? 캐릭터 설정하시는 방법이 궁금합니다.
A. 감정선 같은 경우, 어떤 상황을 설정해 놓고 그 안에 캐릭터들을 몰아 넣는 방식으로 도출해 내곤 합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인간으로서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 지당하겠지?’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하는 것 같고요. 나머지는 캐릭터 개인의 가치관과 성격, 다른 인물과의 관계성을 고려하여 살을 붙입니다. 같은 상황에서 사람마다 제각기 반응이 다르듯이, 창작물 속의 캐릭터들도 그들의 성향에 따라 저마다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런 부분을 보다 깊이 있게 표현해 낼 수 있도록 캐릭터의 가치관과 성장배경을 짜는 데에 많은 품을 들이는 편입니다. 심지어는 주요 캐릭터들의 경우, 정치성향까지도 일단은 생각해 두곤 합니다. 물론 작중에서 드러날 일은 없고 저 혼자만 알고 있는 설정이지만요.
여담이지만, 개인이 타고 태어나는 기질이 성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잖아요. 가령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한테 별명이 순둥이였는데요. 반면에 2살 터울 오빠는 징징이로 불리곤 했습니다. 지금은 둘 다 어른이 됐지만 오빠는 아직도 소리나 냄새 같은 감각에 예민한 면이 있어요. 같은 환경에서 똑같이 자랐는데 기질이 이렇게 다른 것을 보면 참 재밌습니다.
이런 부분도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 데에 참 재미있는 작용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얘는 원래 그래.' 라는 느낌으로요. 납득이 가게만 풀어 낼 수 있다면 지면 연출에서 많은 것이 절약되지 않을까 싶네요.
△ <손 안의 안단테>, 나윤희 (출처_네이버웹툰)
Q.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 따뜻함이 느껴지곤 합니다. 색감 때문인가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작품을 그리실 때 주로 신경 쓰시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A. 요새는 톤앤매너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작업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형태적으로 어긋남이 적은 그림을 지향하며 많은 신경을 기울였는데요. 그러다 보니 형태를 구현하기에만 급급한 만화를 그려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막상 그림실력이 아주 훌륭한 경지는 아니기 때문에, 형태에 그렇게까지 집착할 필요도 없었던 것 같아요.
이 부분 오해가 있을 수 있어 덧붙이자면, 제가 그럴싸하게는 그림을 충분히 그린다는 것을 알고 있답니다(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글과 그림, 연출이 하나가 되어 만화라는 형태로 엮여 나왔을 때에나 '괜찮게 그린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 장의 그림만으로 서사가 되고, 그 자체만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어떤 경지'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지요. 예를 들면 굿브러쉬, 이노우에 타케히코, 관웨이싱, 故김정기 작가님 같은 경지를 말하는 것인데요. '이분들처럼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다른 부분을 채우자!‘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오로지 작화만으로 곧 작품의 가치가 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고서야, 완벽하게 구현되지 않는 형태력에만 얽매여 있는 것이 오히려 작품적으로 손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런 집착이 오히려 작품을 더 정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고요.
그런 많은 고민 끝에, 잘 조성된 톤앤매너가 정제된 작화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매우 잘 그린 작화는 그 자체로 작품성에 큰 플러스 요소가 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가 자신이 이 작품의 방향성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의도를 작화의 톤으로 표현해 낼 수 있다면 그게 진정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저도 불과 얼마 전에야 느꼈습니다.
톤앤매너의 중요성을 알게 된 후로는 스스로 작품과 화풍의 방향성을 파악하고 이끌어나가는 데에 굉장한 노력을 쏟고 있습니다.
또한,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아직까지도 드로잉적으로 부족한 것이 사실인데요, '어떤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앞으로도 계속 수양해 나가야 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배워야 할 점이 너무나 많네요.
Q. 작가님의 작품은 한 회의 분량이 매우 많은 것 같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들지 않으세요? 그리고 이렇게 많은 분량을 보여 주시는 이유는 뭘까요? 독자로서 정말 행복하나, 팬으로서 작가님의 손목이 걱정됩니다!
A. 이것은 사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요. 제가 컷 낭비가 심한 스타일인 것이 가장 큰 원흉인 것 같습니다.
한 화에서 전개해야 하는 내용은 10만큼이 있는데, 10만큼의 (연출적으로) 지면 안에 그 내용을 담아 내지 못할 경우엔 한 15만큼 더 그려야 하는 것이지요. 더 세련되고 좀더 영리하게 관록이 갖춰진다면, 적은 지면 안에서도 충분히 효과적인 연출이 가능해질 것 같습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연출상의 흐름을 확대, 집중시키는 경우도 있어요. 그럼으로써 얻게 되는 효과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강약을 조절하는 능력은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화마다의 내용이 삼삼한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내용이 강렬하게 딱 때려 주면 컷 수가 적어도 본 내용이 많다고 느껴지는데, 그게 아니니까 일단 서사의 용량 자체를 늘리게 되는 것 같아요.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고 손도 빠른 편이라서 그럭저럭 매번 차력쇼를 하고 있습니다.
Q. 많은 분량과 섬세한 작화로 주간 연재에 힘드신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만의 컨디션 관리 방법이 있을까요?
A. 운동의 중요성을 깨달은 다음부터는 주기적으로 운동을 하려고 하고 있어요.
원래는 몇 년 전부터 헬스장을 꽤 오래 다녔는데, 그 다정하고 친절하신 헬스장 관장님들이 코로나로 사업을 접으시고 나서, 대체 운동시설을 찾아 많은 방황을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다른 헬스장을 몇 번 가 봤는데 재미가 없어서 포기하고 복싱으로 갈아탔다가 이제는 수영으로 정착했습니다. 아직 잘하진 못하지만 재미있습니다.
바쁘더라도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면 몸도 건강해지지만 작품 활동에도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잡생각이 안 들고 기분도 좋아지거든요.
그리고 가끔씩은 세이브를 쓰고 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라, 원기옥 모으듯이 원고를 해 낸 다음에 그 보상처럼 며칠간 짬을 만들곤 해요. 그렇게 하면 동기부여도 되면서 가끔씩 저 스스로를 환기시킬 수도 있더라고요.
Q. 작업 환경도 궁금합니다! 집에서 작업하시는지, 혼자 하시는지 등도 궁금하고요. 주로 밤에 작업하시는지 등등이요.
A. 원래는 가족들이랑 다 같이 사는 집, 제 방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 달에 드디어 작업실을 구해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10분 거리라서 여전히 집세권이기는 하지만요.
작업을 할 때는 방에서 혼자, 가끔씩은 친구들과 화상통화를 하면서 합니다. 콘티 단계에서는 머리를 써야 하기 때문에 떠들면서 그리지 못하지만, 그 이후 단계부터는 간단히 수다를 떨면서도 작업할 수가 있거든요.
되도록이면 낮에 일하고 밤에는 쉬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콘티 같은 경우엔 밤에 더 작업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조용한 데다 기묘하게 감성이 자극되는 시간이라서 그런 걸까요?
△ <고래별>, 나윤희 (출처_네이버웹툰)
Q. 작가님하면 <고래별>을 빼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고래별>에서는 인어공주를 한국적인 해석을 통해 보여 주셨는데요. 인어공주를 모티브를 삼은 계기가 있으신지요?
A. 원래는 인어공주를 모티브로 한 로맨스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심지어 초반에는 아예 덴마크를 배경으로 생각하고 있었구요. 로맨스에 초점을 맞추어 할리퀸 요소가 강하게 두드러지는 톤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이미 많이 있기도 하고, 제가 기존에 나와 있는 작품들보다 더 잘할 자신이 없었어요.
나만의 색깔을 녹여서 인어공주를 재해석할 수는 없을까 고민하다가, ‘이웃나라 공주가 사람이 아니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왕자가 사랑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거대한 신념이라면 어떨까? 인어공주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무형의 상대라면?
이런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배경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Q. 역사적인 배경으로 그린 작품 때문인가요? 작가님은 역사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은 평소에 역사물에 관심이 많으신가요?
A. 역사물을 아주 좋아합니다. 저는 매사 지난 역사에서 위로를 받는 편이거든요. ‘이보다 더한 일을 겪은 조상들도 다 어떻게 살았지 않냐?’ 뭐 이런 느낌으로요. 어떻게 보면 좀 고약한 심보인 것 같긴 하지만, 그런 일종의 동병상련 정신(?)으로 현재의 괴로움을 이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가령 우리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주는 사건을 목도하면 많은 사람들이 큰 탈력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요새 정말 세상이 말세다 등등...... 우려 섞인 이야기를 보면 그 심정에는 공감을 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세상이 더 나쁘게 변화하고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 한 걸음 퇴보하면 다시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그런 식으로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나아갔던 인류 역사를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생각할 때, 지난 일을 아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큰 위로가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역사물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그 지점에서 오기도 하고요.
Q. 단순히 사람과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면 조금 더 쉬울 것 같은데요. 작가님은 <고래별> 속 역사적 배경, <고래별> 속 일본어, <손 안의 안단테>에서는 음악과 의학적 이야기까지, 작업을 하시는 데에 정말 많은 준비 과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혹시 힘들지만 이런 방향으로 하시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걸까요?
A. 다양한 이야기를 보여 드리고 싶다는 욕심이 가장 큽니다. 한번 다뤘던 소재보다는 또 다른 소재를 계속해서 시도하고 싶어요. 다만 그런 욕심과는 달리, 구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품 준비 과정에 품이 많이 들게 되는 것 같습니다.
데뷔작인 <눈먼 정원>과 <고래별> 같은 경우에는 특정한 시대 배경이어야만 하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주제와 내러티브였기 때문에, 역사적 고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친 부분이 많다는 것은 아직도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현대물인 <손 안의 안단테> 같은 경우, 제게 보다 더 친숙한 소재로 접근할 수도 있었을 것 같지만요. 그러나 이번 작품 역시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주인공들에게 특정한 배경을 부여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주인공', '인생에서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과 몰락을 모두 겪은 또 다른 주인공' 이라는 요소는 반드시 가져가야 하는 부분이었고요. 그 둘을 엮을 수 있는 소재로는 클래식 음악을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 다울이가 또 다른 주인공인 유원이처럼 피아노를 잘 치게 된다든가, 그런 전개는 아니지만요.
자세한 것은 작품 내에서 충분히 보여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고래별>, 나윤희 (출처_네이버웹툰)
Q. <고래별>의 배경은 역사적 배경이 중점이잖아요? 역사를 소재, 주제, 배경으로 다루는 것은 굉장히 어려울 것 같습니다. 모두가 좋아하는 키워드지만, 또 조금만 왜곡되더라도 모두가 예민하게 받아들이기도 하고요. <고래별>을 그리실 때 역사과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 어떤 준비, 과정을 거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주로 답사와 자료수집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행이라면 다행히도 <고래별>은 한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답사를 다니기도 쉬웠는데요. 서대문 형무소, 군산 역사관 등을 비롯한 박물관 투어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거리와 건물들을 느껴 보기 위해 테마파크 등을 찾기도 했고요. 특히 이야기의 첫 번째 무대가 된 군산의 경우, 여러 번 방문해 그 모습을 실제로 체감해 보기도 했습니다. 군산은 예로부터 옥토였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 유난히 수탈을 많이 당한 도시이기도 한데요, 그 때문에 아직까지도 군산에는 당대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여러 박물관이나 역사적 장소가 남아 있습니다.
Q. 많은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저 역시나 “내가 불어 넣은 숨으로 다시 얻은 생이라면 그 삶으로 나를 사랑하기를.”이라는 대사가 정말 명대사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이 좋아하는 작가님 작품 속의 대사나 장면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A. 저 역시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대사는 있는데요.
윤화가 죽기 전에 남긴 독백, 그리고 수아가 해수에게서 인간성을 발견하는 장면에서의 독백이 그렇습니다.
윤화의 독백은 쓰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계속 기억에 남습니다. 몇 번을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했는지를 모르겠네요.
윤화는 복합적인 캐릭터입니다. 소수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득권이기도 했지요. 그런 정체성들을 모두 포함하면서도, 윤화의 고통과 갈등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대사를 쓰고 싶었습니다. 식민지 여성으로서 입장과 더불어, 친일파 유지의 딸로서의 입장 역시 짚고 넘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구구절절 지나치게 설명조가 아닌, 딱 절제된 톤을 찾고자 많은 고민을 했던 게 떠오르네요.저를 너무 고생시킨 부분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인 것 같습니다.
산중의 절로 피신한 수아와 해수가 난투극(?)을 벌인 끝에, 해수에게서 인간성이 드러나는 장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아의 복합적인 감정을 모두 아우르는 대사를 생각해 내느라 참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수아가 느낀 감정, 대사는 제게는 몹시 와 닿는 부분이었습니다.
현실에서도 그렇지 않나요?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인간성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도 결국 사람이구나 하는 감상을요. 아무리 감정과 인지가 별개라지만, 결국 인지가 감정을 침범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게는 그 장면이 강렬한 기억이기도 해요.
Q. 앞서 말씀드린 명대사외에도 <고래별>에는 뭔가 심금을 울리는, 혹은 저장하고픈 예쁜 대사가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평상시 작가님께서 이런 글쓰기 성향이 자연스럽게 녹여든 걸까요? 아니면 작품 내에 명대사를 녹여 내겠다고 계획하시고 쓰신 걸까요?
A. 진솔하게 쓰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배경과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이렇게 느끼겠구나, 라는 생각을 가장 큰 골자로 두고 있습니다. 물론 같은 말을 하더라도 어떻게 다듬느냐에 따라서 멋있는 대사가 될 수 있겠지만요.
그냥 "보고 싶어." 라는 말도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게."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요. (소설 <렛미인> 中)
상기한 대사는 뱀파이어 소녀가 인간 소년에게 건네는 말이었는데요. 낮에는 활동할 수 없는 뱀파이어로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낭만적인 대사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문자 그대로만 보면 다소 의아하게 들리지만, 등장인물들의 상황이 맞물리면 감동을 줄 수 있는 말이야말로 정말 좋은 펀치라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간결할수록 더 세련미가 느껴지는 것 같고요.
Q. 에피소드가 끝날 때 보여지는 그림 역시 감상하는 재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을 함께 보여 주겠노라 생각하신 계기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A. 이건 앞선 답변과 맥락이 이어지는데요, 작품의 톤앤매너에 대한 일종의 선언이었달까요.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모티브로 전개되는 작품임을 명시함과 동시에, 이 작품은 어떠한 톤으로 전개될 것임을 암시하는 장치였습니다. 때문에 충분히 동화적이면서도 앤틱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작풍을 선택하였고요. 특히 아서 래컴(1867~1939)과 윌터 크레인(1845~1915)의 아트웍에서 많은 참고를 했습니다.
Q. <고래별> 오디오 드라마 제작과 드라마화 소식! 정말 축하드립니다. 작가님께서는 드라마로 나오게 될 <고래별>에서 가장 기대되는 부분이 있으세요? 혹은 우려되는 점? 아니면 이것만큼은 꼭 보여지길 원한다거나요?
A. 저는 영상화 작품의 경우, 필연적으로 원작 작품과는 다른 문법을 가져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만화의 작법과는 전혀 다른 영상문법으로 재탄생하는 형태가 기대되고 궁금합니다.
원작을 고스란히 재현해 주길 원하시는 독자분들도 계시겠으나, 문법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일 것 같아요. 다만 작품을 관통하는 정서의 경우, 매체가 바뀌더라도 꾸준히 이식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의 바람일 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 생각하지만요.
△ <고래별>, 나윤희 (출처_네이버웹툰)
Q. <고래별>은 단행본, 컬러링북, 오디오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로 제작되었는데요. 이렇게 다양한 콘텐츠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A. 아무래도 우리 정서에 친숙한 배경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상업 작품으로서는 도전이 될 수 있는 시대 배경이지만, 한편으로는 여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기에 용이하다고도 생각합니다.
Q. 다양한 콘텐츠로 제작되는 것뿐만 아니라, <고래별>은 2021 대한민국 콘텐츠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하기까지 했습니다. 작가님께 <고래별>이라는 작품은 어떤 의미일까요?
A. <고래별>은 제게 참 감사한 작품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상을 받는 것처럼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성과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제게 정말 많은 깨우침을 준 작품이에요.
정말 부끄러운 표현이지만 <고래별> 이전의 작품에서 저는 아직 아마추어였던 것 같습니다. 뭔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은 있는데 그걸 정제해서 세련되게 풀어 내는 데에는 관록도 능력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표현하고 싶은 것들은 산만할 정도로 많은데, 그걸 한 데 모아서 아다리를 맞춰 하나로 엮어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에 대한 기술이 없는 상황에서 일단 지르고 봤달까요?
물론 그 작품들을 해 내면서 얻은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아, 다음부터는 이걸 이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정도의 교훈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초기작이다 보니, 이때가 아니면 언제 이런 실수들을 해 보겠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부끄러운 건 어쩔 수가 없어서 떠올릴 때마다 저도 모르게 악!하고 소리를 지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래별>에서는 마찬가지로 똑같은 교훈과 더불어, 제가 앞으로 갈 방향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부족한 것은 부족했다고 받아들이되, 이제 제게 이정표가 생겼으니 그걸 토대로 저만의 색을 갖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래별>은 저를 비로소 작가로 만들어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Q. 지금은 많은 작가들의 워너비 작가님이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작가님도 예전에 작가님만의 워너비 작가님이 계셨겠지요? 혹시 어떤 작가님이셨을까요? 혹은 작가님에게 영감을 준 인생작은 있는지 궁금합니다.
A. 좋아하는 작가님이 너무나 많아서 열거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다만 저의 워너비라고 한다면, 만화가는 아니지만 봉준호 감독님을 꼽고 싶습니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탄탄히 구축하면서도,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은 아티스트란 모든 창작자들의 우상이리라 생각합니다. 너무 거장이셔서 제가 감히 워너비라고 말씀 드리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네요. 또한 겸손하면서 인품까지 훌륭하신 것 같아서 더욱 존경스럽습니다.
좋아하는 작품은 정말 여러가지가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제게 영향을 준 작품이라고 한다면 <데스노트>와 <불가사의한 소년>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좋아하고 닮고 싶은 많은 작가들과 작품에서 조금씩 영향을 받고 있지만, 제 학창시절부터 저의 성향 자체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라고 한다면요.
<데스노트>는 자극적이면서 흥미로운 전개와는 반대되는 담백한 연출과 감정선이 어린 나이에도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요소는 극단적으로 절제하고, 대신 휘몰아치는 듯한 전개로 독자를 끌어들인다는 것이 정말 신선했지요. (물론 이 작품을 접한 게 초중학생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 나이에 이 정도의 감상을 하진 못했습니다. 그냥 그때 피부로 느꼈던 바를 지금 와서 정리해 보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담백하고 절제된 감정연출이 비로소 세련미가 된다는 것을 어린 나이의 저에게 알려준 작품인 것 같아요. 물론 <데스노트>의 주요 관전 포인트는 그 지점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 시절의 저는 그렇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불가사의한 소년>은 작가인 야마시타 카즈미 작가님의 인문학적 소양을 그대로 지면에 담아 낸 듯한 옴니버스 형식의 작품입니다. 어린 나이의 저에게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다양한 라이프 스토리가 얼마나 많은 감동을 주는지를 느끼게 해 주었던 것 같아요. 이 작품은 제가 군상극을 좋아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밖에는 이와아키 히토시 작가님의 <기생수>, 나기타 케이코 작가님과 이가라시 유미코 작가님의 <캔디캔디>, 양영순 작가님의 <1001>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런 작품, 이런 작가님들에 비하면 저는 갈 길이 한참 멀다는 것을 언제나 느끼고 자극을 받습니다.
Q. 지금 이미 새로운 작품은 연재 중이신데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도전해 보고 싶은 장르가 있으신가요?
A. 판타지 정극을 그려 보고 싶어요. 모든 작가들에게 한두 개쯤은 '이건 내가 더 좋은 작가가 된 후에야 꺼낼 거야.'라는 아이디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제게는 그런 아이디어가 바로 이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제 두 번째 작품인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이 굳이 분류하자면 어반판타지 장르이긴 했는데요. 다음에는 제가 세계관의 모든 법칙을 만들어 낸 하이 판타지 장르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지금은 가닥으로만 있는 아이디어를 열심히 다듬고 살을 붙이는 중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작품으로 선보여 드릴 수 있는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이건 제 작가로서의 과업이 될 것 같다는 예감입니다.
그밖에는 고딕 스릴러 장르, 배틀물(액션물) 등을 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근대 역사물에 살인이나 범죄 같은 요소를 섞어, 아주 어둡고 긴장되는 이야기를 그려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태까지는 정적인 연출이 두드러지는 작품만 해 왔기 때문에, 배틀물 같이 흐름이 빠르고 동적인 작품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제가 배틀물의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편인데, 이렇게 될 경우에는 더 능숙하신 작가님으로부터 콘티를 받아서 작화만 담당해 보고 싶기도 합니다. 저변을 넓힌다는 의미로요. 만약 이루어진다면 이거야말로 정말 도전이 될 것 같네요.
Q. 지금 연재 중인 <손 안의 안단테>와 앞으로 드라마로 만나게 될 <고래별>까지, 작가님의 행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응원하겠습니다. 작품들 통해서 더 많이 작가님의 이야기를 만나길 기대하며, 마지막 인사 부탁드리겠습니다.
A. 정말 솔직하게 써 내려 갔습니다! 오랜만에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네요. 이런 즐거운 환기의 시간을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긴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좋은 일들만 함께하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Q.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