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1, '외계에서 온 펀자이씨'의 엄유진 작가 ]
< 외계에서 온 펀자이씨 >
Q. 인스타그램에서 연재를 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육아를 하면서 일이 기약 없이 끊겼던 것이요. 그 전까지는 바쁜 것이 잘 나가는 것인 양 늘 쫓기면서 일을 했는데, 일 년 이상 일이 끊기고 딱히 돌아갈 곳도 없다고 생각되니 어마어마한 불안감이 엄습하더군요. 공백이 생기고 나서야 제가 이 일을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그리고 앞만 보고 달리는 동안 뭐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영국에서 책을 내고 아티스트라고 불리웠고, 한국에 와서도 방송과 출판 계통에서 삽화를 그리는 일을 하면서 쉬지 않고 달려왔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멈춰 서서 뒤돌아보니 저는 무명이었어요. 애써서 그림을 그린 책의 주인은 글작가였고, 방송이나 신문지면에 화려하게 그림을 그려도 화료를 지급받고 시간이 지나면 버려졌으니 '내 그림의 주인이 내가 아니었고, 나는 대체가 가능한 작가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우울감이 찾아왔어요. 복귀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았어요. 그즈음 친구가 우편으로 한 권의 책을 보내줬어요. 반 정도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고, 반 정도 공란으로 비어 있던 책이었는데 안에 "언니가 이 책의 주인이 됐으면 좋겠어."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어요. 뭉클하면서 설레더라고요. 그 책의 빈 공간에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몇 번 끄적이다가 인스타그램에 공유해 보았어요. 첫 번째 그림을 올리고 이내 몇 개의 ‘좋아요’가 눌리는 것을 보니 엔돌핀이 확 돌았어요.
Q. 이야기는 '외계에서 온 펀자이씨'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현실로 확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A. 결혼 후 정보 공유 목적을 가입했던 비공개 국제커플카페에 ‘펀자이씨의 펀펀펀’이라는 제목으로 생활 칼럼 연재를 했어요. 결혼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생활을 합치는 과정에서 초기 기싸움과 갈등이 장난이 아니잖아요. 힘든 일이 있어도 상대가 안쓰럽고 마땅히 풀어낼 데가 없어서 제가 즐겨 보던 시트콤처럼 칼럼란에 희화화하여 각색해서 써내렸어요. 그걸 보고 사람들이 웃고 공감해주거나 미처 몰랐던 상대의 입장을 헤아려주고 방법들을 제시해주면 안 좋은 기운들이 확 풀리고, 도움도 되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저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별 것 없는 일상들을 드라마적 관점으로 보는 재미를 알게 되었죠.
Q. 보통 '콩깍지가 씌웠다'라고 하잖아요. 이제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연애가 서로에 대한 환상과 장점들을 극대화하는 과정이라면, 결혼 생활은 서로의 적나라한 단점들을 겪어나가면서 조율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입체적인 우정 지수를 높여오는데 이런 경험들이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골수 인문학도들 사이에서 자랐는데 예상치 못하게 공학도에게 끌렸어요. 계획성과 실천력이 강한 성향, 미사여구 없는 담백함이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어려움이 있어도 자기가 뱉은 말은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과 자존심 내세우지 않고 항상 옆에 있는 느낌이 투명했어요. 하지만 모든 장단점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맞닿아 있죠. 그가 본 저의 장점도 순식간에 단점이 되었을 것이고요.
서로의 성향 차에서 오는 어려움도 있지만, 국제결혼 자체에 어려움이 많아요. 국제연애는 함께 난관들을 이겨내야 하는 낭만적 동지 관계이지만, 국제결혼 생활에는 수많은 전투고지들과 지뢰밭이 숨겨져 있고 때때로 서로가 적이 되기도 하죠!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달라지는데, 혈기왕성할 때에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아요. 국제 결혼을 하면 최소 한쪽은 자신의 고향과 가족을 떠나 살게 되는데, 연애할 때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미리 알기가 어려웠어요. 후에 아이를 낳고 부모님 연세가 드시면서야 점차 자신이 할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게 되거든요. 이방인으로서 홀로 떠나온 사람과 그 배우자는 다른 종류의 어려움을 안게 되는데, 서로 자신의 어려움이 더 크다고 생각될 때 문제는 증폭되어요. 결혼상담 전문가로 활동하셨던 어머니는 국제결혼에 얼마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많을 것인지 짐작하고 계셨기에 걱정을 많이 하셨었지만, 노력에 운을 더해 지금까지 어떻게 열심히 잘 꾸려가고 있네요. 각자 다른 입장에 처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서, 국제결혼커플은 부부 간에 늘 더 많은 대화와 조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그림 2, "그렇게나 많은 차이들 속에서도 우리가 서로를 좋아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여전히 신기한 일이다" ]
Q. 여기에 아이를 키우면서도 또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아요.
A. 두 사람이었다가 세 사람이 되는 과정은 단순히 한 사람이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조에 완전한 변화가 생기는 일이었어요.
젊은 시절, 저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두려워도 아이와의 관계에 대한 상상은 자주 했었거든요. 하지만 남편은 이미 한국에 와서 큰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더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 했어요. 저희 부부는 오랫동안 서로가 원하는 것과 두려워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결국에는 더 늦기 전에 아이를 가지기로 했어요. 이 에피소드를 그리면서 유사한 고민과 갈등을 겪는 부부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경우마다 이유가 다르겠지만, 제 남편이 아이를 낳기 두려워하는 이유들의 대부분이 신념보다는 오히려 강한 책임감과 막연한 불안에서 온다는 것을 이해했어요. 아이가 2개 국어를 해야 하는 상황이나, 학교 가면 받게 될 고통들 때문에 걱정 같은 것들이요. 저는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가 굉장히 더 풍요로운 관계로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고, 우리를 찾아온 아이를 사랑할 자신이 있었어요. 결국 고심 끝에 꼭 가져야 한다거나 절대 안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찾아오는 아이를 소중하게 여기고 오지 않는다면 미련 가지지 말자, 라고 합의를 보게 되었어요. 막상 그렇게 합의를 보았는데 생각보다 아이를 가지는 것이 쉽지 않자, 저보다 남편에게 오기가 생겼죠.(웃음) 아이의 존재는 우리에게 큰 사랑과 특별한 추억들을 안겨주었어요. 이 가정을 소중히 해야 하는 이유들을 찾아주었지요.
남편은 가끔 딸아이가 쉽게 즐거워하고 잘 웃는 모습을 보면서 “왜 행복하지?”하고 의아해해요. 저는 짐짓 “아이가 나를 닮았다면 당연히 쉽게 행복해할 것이고 당신을 좋아하겠지. 내가 처음부터 그럴 거라고 말했잖아.” 라며 너스레를 떨죠. 남편도 웃고 말아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아이에게 '네가 와줘서 고마워', '네 덕분에 행복해'라는 말을 자주 해주었어요. 진심이기도 하고, 그런 말들이 제가 닿지 않는 곳에서도 아이가 험난한 세파를 헤쳐나갈 힘을 키워준다고 믿거든요. 지금 아이와 아빠는 각별히 다정한 관계가 되었어요. 아이를 키우면서 저희도 계속 배우고 성장하는 기분입니다.
[ 그림 3, '외계에서 온 펀자이씨' ]
Q. 작품 속에 부모님이 자주 등장하십니다. 작가님의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신가요.
A. 시트콤적 연출을 위해 등장인물들에게 호칭을 붙이는 과정에서 아버지를 철학자로, 어머니를 소설가로 소개하니 독자분들께서 강한 호기심을 보이시더라고요. 철학자와 소설가 부부 간에 어떤 대화가 오갈지 궁금해 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 다음부터 한 일은 제가 어린 시절부터 들어오던 농담 퍼레이드들을 기록하는 일이었어요. 그리면서도 많이 웃었는데, 그 웃음 포인트가 공감을 얻으면서 빠르게 전해지는 느낌이 즐거웠어요. 두 분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큰 소리로 잘 웃으세요. 유쾌하고 엉뚱하시면서 위기 돌파력도 강하시죠. 인문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한 대화가 많고, 호기심과 앎에 대한 기쁨이 크신 분들이셔요.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고요, 두 분간에 통하는 대화 코드와 티키타카의 순발력은 따라갈 수가 없으니 자식들은 여전히 관객 모드로 두 분을 바라보며 웃네요.
Q. 작가님 작품을 자주 봐서 그런지 뵌 적은 없지만 작가님 부모님에 대해 내적 친밀감이 생기더라구요. 아마 보시는 분들 모두 그러시지 않을까 싶어요.
A. 실제로 길에서 우연히 만나셔도 친근한 느낌을 받으실 것 같아요. 한창 자랄 때엔 수직 관계로 지내 부모님에 대해 면면이 알지 못했던 것 같은데, 오랫동안 집을 떠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돌아온 후 집에서 만난 두 분은 너무 독특하고 흥미로웠어요.
어린 시절 저는 사람들이 어머니의 직업을 물으면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했고, 아버지 직업을 물어 '철학자'라고 대답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웃곤 했던 것을 기억해요.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아버지가 ‘철학자’라고 하면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것저것을 묻더라고요. 그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 부모님께 더 많은 질문을 하게 되기도 했고, 지금은 만화를 그리면서 두 분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가고 있지요. 두 분은 당신들의 발전과 성취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시면서도, 저희 형제들에게는 최우선순위는 너희들이다라는 인상을 주셨던 것 같아요.
Q. 반대로 시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신가요.
A. 태국은 미소의 나라라고 배웠는데요. 제가 살면서 접해본 가장 무뚝뚝한 분을 태국에서 만났어요.(웃음) 시아버지는 키가 훤칠하신 미남이셨지요. 엄격하고 권위적이시라는 명성을 남편으로부터 익히 듣고 나서 뵈었기 때문에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어요. 인사를 드리니 들고 계시던 망고를 제 손에 딱 쥐어 주셨어요. 웃음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묘하게 저는 환대 받았다라는 느낌을 받았고, 그 첫느낌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아버지를 떠올리면 늘 감사하고 애틋한 마음이 들어요. 아버지는 척추와 뇌 관련 담당 의사이시고 미소가 화사하신 어머니는 간호사의 인연으로 아버지를 만나셨다고 해요. 어머니는 자주 한국에 오셔서 아이를 봐주시는 과정에서 저와 친해지셨고, 타고난 이야기꾼처럼 주변의 이야기들은 저에게 재미있게 들려주시죠. 아버지는 손녀와 친해지면서 단단하던 무표정과 카리스마가 무장해제되고 미소가 흐르는 일반 할아버지가 되고 마셨어요. 그 모습들을 보는 과정이 즐거워서 틈틈이 일상툰으로 기록했어요. 지금은 한국이 주 거주지이지만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태국에서 지내면서 또 즐거운 에피소드들을 많이 그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Q. 인스타그램에 연재하다가 단행본으로 출판하는 작업은 어떠셨나요.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A. 즉흥적으로 이야기들을 이어가다가 한 권의 책으로 묶으려니 구성하는 부분이 가장 어려웠어요. 디지털 작업이 대세인 시대에 종이에 연필로 손그림 작업을 했으니 담당자분들께서 그 그림들을 모두 스캔 받아 다듬고 재작업하는 부분들도 수고스러웠죠. 하지만 고생한 만큼, 그동안 떠돌아다니던 이야기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 기분은 감개무량하였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펀자이씨툰 시리즈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들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번역 작업을 통해 소소한 한국의 가족 문화와 일상 이야기를 해외에 소개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일상툰이 K-일상툰이라는 장르로 뻗어나가면서 그 영향력을 키워나가고 사랑받는데 기여할 수 있기를 당돌하게 꿈꿔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