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으로 북과 남의 다리를 놓고 싶습니다.”
탈북민의 남한 정착기를 다룬 웹툰 ‘로동심문’이 인기다. 지난 5월 아마추어 작가들의 무대인 네이버 도전 만화에 등장한 이 작품은 넉 달 만에 베스트 도전으로 승격하며 정식 연재의 꿈을 부풀리고 있다. 얼마 전에는 단행본이 나오기도 했다.
‘로동심문’은 실제 평양 출신 탈북자가 그리고 있어 더욱 화제다. 2010년 남쪽으로 내려온 최성국(36) 작가가 그 주인공. 그림체를 보면 만화 초보자가 그리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극화체로 그리는 작가의 말을 보면 깊은 내공이 느껴진다. 최 작가는 북에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조선 4.26만화영화촬영소에서 솜씨를 갈고 닦았다. ‘로동심문’이 북과 남의 벽을 허무는 밑거름이 됐으면 한다는 자칭 ‘6년차 자본주의 남자’인 최 작가를 만나봤다.
△ 최성국 작가의 〈로동심문〉[출처:네이버 도전베스트]
Q. 홍지민_Question. 북에도 ‘만화’라는 장르가 있는지 궁금하다.
A. 최성국_Answer. 북에는 조선 4.26만화영화촬영소라는 곳이 있다. 1980년대에 4월 26일 날 김정일이 와서 아이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라, 그리고 이걸로 혁명을 일으켜 외화벌이를 해보자, 우리 민족이 손기술이 좋고 뛰어나니 해보자 해서 그때부터 만화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쪽 하청을 받아서 돈을 많이 벌기는 했다. 일 년에 800만 달러 정도 벌었다. 모두 김정일 자금이다. 국내용 만화도 제작했다. ‘소년 장수’, ‘다람이와 고슴도치’, ‘영리한 너구리’ 같은 작품들이다. TV에서 50화, 100화 시리즈물로 보여준다. 북에서는 애니메이션을 아이들을 위한 영화, 아동영화라고 한다. 만화영화라고 하면 외국에서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처럼 마냥 재미있는 작품은 없다. 주제가 과학기술이나 전쟁, 투쟁, 혁명, 그런 것들이다. 항상 이기는 편은 우리 편이다. 적들은 더 센데 항상 진다. 또 부패하고 타락했다, 항상 이런 걸 아동영화에 담아 가르친다.
Q. 아동영화 말고 출판 만화책도 있는지.
A. 출판 만화도 만들고 있다. 대개 극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이다. 간첩 잡는 이야기가 많다. 또 김일성이 어느 학교를 방문했을 때 들려준 옛 이야기, 그런 식의 작품들이다. 김일성이 태어나기 이전 옛 이야기인데 전래동화 같은, 예를 들자면 ‘선녀와 나뭇꾼’, ‘호랑이와 곶감’, ‘심청전’ 등 그런 작품들이다.
Q. 북에는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게 만화 말고 다른 것도 있는지.
A. 북에는 만화영화 밖에 없다. 그리고 유희장이 있기는 하다. 남쪽으로 치면 놀이공원인데 돈이 없어서 잘 가지 못한다. 원체 돈이 없으니 노는 데 돈 쓰는 것을 아까와 하기 때문이다.
Q. 북에서도 인기 있는 만화가가 있는지.
A. 개인이 그렇게 될 수는 없다. 만화는 풍자인데, 만화로 김일성을 풍자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만화는 그냥 만화다. 누군가 수령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 헌신했다, 그런 건 만화에 싣는다.
Q. 북에 있을 때 어떤 작품들을 접했는지.
A. 직업이 애니메이션이라 조금이 아니라 매우 많이 접했다. 유일하게 해외 애니메이션을 접할 수 있게 허락받은 곳이 4.26촬영소다. 외화를 벌어야 하니까. 시나리오까지 써서 팔아야 해서 외국 문화를 알아야 했다. 디즈니 만화를 많이 봤다. 그리고 일본 만화도 많이 봤다. 북에서 인정하는 건 미국 작품이다. 일본은 우리 보다 못하다 그런 생각이 많다. 물론 일본 만화도 작품성으로 보나 영화 전반으로 보나 영화답게 만들기 때문에 많이 참고 한다. 미국 작품은 ‘라이언 킹’, ‘뮬란’, ‘포카혼타스’, ‘미녀와 야수’ 등등 옛날 작품부터 100 다 봤다. 그대로 흉내 내서 만든 작품도 있다. ‘라이언 킹’이나 ‘포카혼타스’와 제목은 다르고 내용은 비슷한 그런 작품을 시리즈물로 만들어 해외에 수출하기도 했다. 하청을 주던 프랑스 관계자가 북한을 방문해 우리와 같이 공동작업을 한 사람이 그 경험을 만화책으로 그리기도 했다. (최 작가는 캐나다 퀘벡 출신 만화가 ‘기 들릴’이 2003년 펴낸 ‘평양’의 영문판을 보여줬다.)
Q. 요즘 한국 애니메이션은 3D가 유행이다. 북한은 어떤지.
A. 내가 있을 때는 주로 셀 애니메이션으로 작업했다. 물론 3D도 한다. 그런데 3D는 실력이 그다지 좋지 않다. 일단 컴퓨터도 좋지 않고…. 그래서 별로 잘하는 것 같지는 않다.
Q. 촬영소 이야기를 좀 더 해준다면.
A. 4.26촬영소는 북한에서 꿈의 직장이다. 남쪽으로 치면 현대, 삼성 대기업이다. 왜 그러냐면 북한의 배급 체제는 이미 붕괴됐는데, 그쪽에만 흰 쌀 배급 주고 돈 버니까. 그리고 매달 식용유 250g 한 병, 설탕 1kg, 소고기 1kg 주고, 해마다 연말 상품으로 TV, 자전거, 냉장고, 세탁기 중에서 하나씩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최고의 직장으로 친다.
Q. 들어가려면 경쟁이 치열할 것 같다.
A. 촬영소에는 어디에 있든 필요한 사람은 스카우트할 권한이 있다. 돈을 벌어야 하니까 김정일이 그러한 권한을 줬다. 북한은 중학교 6년이고, 졸업하면 17살이다. 나도 졸업하고 집에서 놀고 있는 데 어느 날 그쪽에서 와가지고 실력 테스트해보고 그 다음날부터 출근했다. 그래서 군대도 못 나갔다.
Q. 원래 그림 솜씨가 있었나보다. 학교 다닐 때 상을 받았다든지.
A. 그냥 장난 좋아하던 아이였는데, 6월 25일 즈음이 반미 투쟁 월간인데 그때마다 미국을 반대하고 미국을 나쁘다고 하는 그림 곧잘 그렸다.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 높으니까. 하하하. 중학교 3학년 때 그러한 그림을 그린 게 눈에 띄어 4학년 때부터 전문 미술교육을 받았다. 그 이후에 미제 반대, 김일성 생일 맞이 충성 특간어 그런 것들 많이 그리며 여기저기 소문은 났던 것 같다.
Q. 해외 문화를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계기는.
A. 아까 이야기한 프랑스 사람들이 촬영소에 와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 담배도 비싼 것 피우고, 지갑을 여니 백 달러 지폐가 가득했다. 너무 신기해 어디서 생긴 것인지 물어 봤더니 월급이라고 했다. 우리는 아무리 일해도 한 달에 1달러 정도 밖에 못 받는데 비슷한 일하면서도 그 사람들은 100달러짜리가 엄청 많으니까, 우리나라가 나쁘다 이런 생각이 아니라 나도 내가 일한 만큼 받을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촬영소를 8년 만에 나와 컴퓨터 장사를 시작했다. 일본 중고 컴퓨터, 중국 중고 컴퓨터 받아서 팔았는데 그 안에 외국 영화가 굉장히 많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그 외국 영화를 복사해서 팔았다. 그게 계기가 되어서 탄압받다가 잡히면서 탈북까지 이어지게 됐다.
Q. ‘로동심문’에 나오는 밀수 에피소드는 실제 경험담인지.
A. 아, 해외 영화를 팔았던 것은 밀수가 아니다. 북에서는 중국에서 신의주로 매주 국제열차가 들어온다. 보위부 세관에서 검열하고 들여보내는 데 하드디스크를 검열 안해서 놓치는 게 있는 거다. 그러면 PC 안에서 든 것을 복사해 팔곤했다. 한류가 퍼지기 거의 초창기 때였는 데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북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거의 다 한국스러워졌다. 그런 격변기 중심에서 그걸 팔면서 자체 편집하기도 하고, 격변기의 중심에 있었던 것 같다.
Q. 당시 어떤 작품이 인기가 있었나.
A. 영화는 ‘어린 신부’, 드라마는 ‘줄리엣의 남자’, 노래는 이정현과 룰라가 인기가 있었다. 나름 PC방도 했다. 컴퓨터를 팔아야 하는데, 북한에서 그냥 꺼진 상태로 진열해 놓으면 아무도 안 사간다. 북한 최초 PC방게임으로 ‘카운터 포스’라는 게 있는데 그거 켜놓고 아이들한테 한 시간에 돈 조금 받고 하게 하다가 누가 사러 오면 곧바로 팔곤 했다.
Q. 촬영소는 순탄하게 그만 뒀는지 궁금하다.
A. 아니다. 탄광 보내겠다고 했다. 거기 들어가서 3년 지나면 안 내보낸다. 한 명 키우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계속 그러다가 마지막엔 방광염 진단서를 냈다.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아프다고 나간다고 하니까 믿지를 않는다. 자다가 실례도 하고 했는데 창피해서 입 다물고 있다가 지금에서야 공개한다고 했다. 오줌싸개 대접 받으며 나왔다.
Q. 탈북 이후 남쪽에서는 어떻게 지냈는지.
A. 2010년 탈북해서 하나원 등에서 6개월 지낸 뒤 프로그램 개발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한 2년 정도 근무했다. 유명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2개월 정도 일 해보려고 했는데 한국 문화와 웃음 코드가 달라 당황했다. 무슨 놈의 만화가 간첩 잡는 거 없고, 애국심도 없고, 전쟁도 없더라. 장난하다 웃고 떠들고 그런 내용이라 정말 황당했다. 내가 실력도 없는 것 같기도 해서 만화를 접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대북방송국에 입사해 정말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기자에서부터 아나운서 PD 역할까지 했다. 그 이후에는 안보 강사를 했다.
Q. 남쪽에 내려와서 낯설었던 순간은.
A. 매순간 당황했다. 남녀 사이에 친구하자고 한다든지, 길을 걷는데 국회의원 하겠다고 굽신굽신하며 명함을 주고 그럴 때 당황했다. 그 때 당시 탈북자 눈에는 위풍당당한 사람이 더 눈에 들어왔다. 어디 가서 이야기 하면 가까운 사이도 아닌 사람들이 웃으면서 말을 거는 것도 당황스러웠다. 나한테 붙어서 무언가 빼내려고 하나 의심이 들었다. 또 신기한 것은 싸움을 안 하는 게 신기했다. 북한 사람들은, 싸울 사람이면 딱 보면 안다. 얘가 세다, 안세다 그런 것을.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다 세 보이는 데 안 싸우더라. 하하하.
Q. 그래도 같은 민족이라고 느꼈던 순간도 있을 것 같다.
A. 당연하다. 정서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다. 만화를 시작한 것도 그래서다. 다른 것은 조금 밖에 안 된다. 달라도 별거 아닌 게, 생활하는 데 조금도 문제가 안되는 게 다르다. 고거만 벗어나면 다 똑같다. 속담도 같다. 어릴 때 엄마에게서 듣고 자란 말도 또 같다. 그것을 보면 조금도 다른 나라라는 생각이 안 든다. 그냥 완전히 자기 나라다.
Q. 만화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고 했는데 웹툰을 그리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A. 기자 생활하다보니 사회, 경제 등 여러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또 어떤 사건들에 대한 국민 반응도 알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부터 보였다. 남쪽 만화도 웃기기 시작했다. 또 방송국에서 여러 가지 시사, 콩트 프로그램을 만들고 진행도 하면서 모르는 것을 조금씩 알아 갔는데 한 번 터지니까 확 보였다. 그날부터 남북이 70년 이상 갈라졌는데 양쪽을 아우를 수 있는 매개체를 하나 만들어야 하는데, 다른 것들은 심각하고 진지하고 그러니까 만화로 좀 어떻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꼬레아우라 출판사 대표님을 만났는데 마음이 같더라. 대표님이 후원을 해주겠으니 한 번 도전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됐다.
Q. 네이버 베스트 도전에 머물고 있지만 정식 연재도 생각하는지.
A. 당연하다. 하지만 이미 ‘로동심문’이 유용하게 쓰이고 있어 뿌듯하다. 여기저기서 북한에 대해서도 관심 가지고 북한을 어떻게 봐라봐야 하느냐, 우리 머리 위의 반쪽이 저렇게 하고 있으니 언젠가 통일이 되어야 하는 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그런 고민들과 이야기를 많이들 하는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제 역할하고 있네,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내 만화에서는 인권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안하는 데, 북한 인권에 대한 현실을 느끼는 분들도 있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니까 가능하다고 본다.
Q. 매회 독자들의 질문을 받아서 답해주는 작가의 말에도 굉장히 공을 기울이고 있다. 사실상 작품 하나를 더 그리는 것으로 보이는데.
A. 고거는 다른 만화하고 다르게 정말 힘들다. 하나 더 만드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소통을 하는 만화가 되고 싶은 거다. 대개 혼자 나가는 작품들이 많더라. 그런데 나는 소통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
Q. 본편을 극화체로 그릴 생각은 안 해봤는지.
A. 내게는 작가의 말이 좀 더 빠르고 쉽다. 본편을 극화체로 그리는 것은 정말 힘든 작업이 될 것 같다. 작가의 말은 구성이고 화면 연결 없이 그리는데 본편은 구도, 구성을 고민해야 하고 이야기도 연결해야 하고 무엇보다 컷수가 많다. 그걸 다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런데 그리다 보니 본편도 조금씩 극화로 변해가고 있다. 힘들어 죽겠다. 처음부터 지금처럼 할 걸, 그런 생각이 들더라. 처음엔 괜히 습관도 안된 만화체로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북한엔 만화체가 없다. 사회주의에서는 모든 게 신성화고, 김일성이 창조한 거라. 풍자는 말도 안 된다. 그래서 풍자한다면 남한이나 미국이 대상이다. 사람들이 풍자하려고 안하고 다 극화로 하려 한다.
Q. 남쪽에 내려와서 공부 차원에서라도 만화체의 작품을 많이 봤을 것 같다.
A. 기안 84의 작품이 우선 생각난다. 최근에는 ‘유미의 세포들’이 있다. 여러 가지 작품들을 봤다. 그런데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작품들도 있다. 하하하.
Q. 남쪽에서는 국가정보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큰데, ‘로동심문’에서는 일부분 긍정적으로 비쳐지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A. 긍정적으로 그린 게 아니라 경험한 그대로다. 국정원 내용은 되도록 안 그리고 탈북자 이야기만 보여주려 하고 있다. 사실 국정원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어도 누가 시켰나, 강요했나, 그런 댓글이 달려서 좀 그렇다. 몇 년 전부터 댓글 문화에 익숙해져서 상처 받지는 않았지만 좀 놀라기는 했다. 물론, 힘을 주는 댓글이 더 많다. 북한에 대해 몰랐는데 관심을 갖게 됐다, 통일을 준비해야 겠다 그런 반응이 많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발전하려면 북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Q. 주변 탈북자 분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A. 재미난다고들 한다. 남쪽 분들보다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본다. 작품을 그릴 때 주변에 많이 물어보며 에피소드를 모으기도 하는 데, 지난날을 돌이키는 추억이 있는 셈이다.
Q. 하나원 이후의 탈북민의 삶이 더 관심이 간다. ‘로동심문’은 언제까지 그리게 될는지.
A.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지만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만화 속에서 제대로 정착할 때까지는 그리고 싶다. 구경하는 사람들과 똑같아지면 만화가 재미가 없어지지 않을까.
Q. 언젠가 극화체 작품을 그리고 싶은 꿈도 있을 것 같은데.
A. 머릿속으로 몇 개 구상하고 있는데 비밀입니다. 하하하. 아주 흥미로울 만한 소재다. 일상, 누구한테나 다가갈 수 있는, 남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두 가지가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