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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일 합작 애니메이션 『황금박쥐』『요괴인간』 작화감독 모리카와 노부히데 인터뷰

최근 일본에서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방영되었던 애니메이션 『황금 박쥐』와 『요괴 인간』이 한국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당시 작화 감독을 맡았던 모리카와 노부히데[森川信英]씨에 의해 밝혀져 화제가 되었다. 국내에는 이 작품들이 한·일 합작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최근까지도 자세히 밝혀져 있지 않아 팬들 사이에서는 수수께끼의 애니메이션으로 통용되어 왔다.

2002-02-01 선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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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에서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방영되었던 애니메이션 『황금 박쥐』와 『요괴 인간』이 한국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당시 작화 감독을 맡았던 모리카와 노부히데[森川信英]씨에 의해 밝혀져 화제가 되었다. 국내에는 이 작품들이 한·일 합작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최근까지도 자세히 밝혀져 있지 않아 팬들 사이에서는 수수께끼의 애니메이션으로 통용되어 왔다. 『요괴 인간』은 일본에서 첫 방송 당시 그다지 인기가 좋지 못해 도중 하차되어버렸지만 거듭되는 재방송 때에 팬들이 늘어났고 최근에는 당시 일본의 주류 애니메이션과 일선을 긋는 색다른 작풍이 재평가되고 있다. 그런 『요괴 인간』이 사실은 일본에서 원화의 일부만을 받아 선화부터 채색까지 동화 공정 거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모리카와씨가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이다.

모리카와 노부히데씨는 1918년 교토 태생으로 9세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후 일본 쇼치쿠[松竹]영화사의 촬영소에 들어가 숙식을 하면서 아역 배우나 잡일을 했다. 그러다가 처분하는 필름 속에서 보게 된 『보스코』란 미국 애니메이션을 패러디한 작품을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회화에 재능이 있었다고는 해도, 겨우 12세에 혼자서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던 것은 놀라운 일로, 그 작품이 어른들의 눈에 띄어 극장에서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군대의 소집으로 당시 전쟁터였던 만주로 건너가 만주영화협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종전 탓에 2년밖에 되지 않았다고는 해도 모리카와씨는 현지 중국인들을 가르치며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해외 체재 경험 때문에 한국에 건너와 한·일 합작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임무가 모리카와씨에게 맡겨진 것이기도 했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4년동안 한국에 체재하면서, 일본에서는 이미 전설의 컬트 호러 작품으로 유명해진 『요괴인간 벰』과 『황금 박쥐』를 만들어낸 모리카와씨는, 그러나 일본측 회사의 무성의에 배신감을 느끼고 이후 히어로물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때문에 그 후에는 일본의 국민적인 인기 애니메이션 프로그램 『만화 일본 옛날 이야기』를 중심으로 활약하며, 무려 76세까지 현역을 고수했다고 한다. 이는 일본에서도 현역 최장기 기록이 아닌가 평가받고 있는 상황이다.

필자는 모리카와 노부히데씨가 현 거주지인 일본 사이타마현 란잔에서 이에 관련된 특별 강연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도쿄에서 특급열차로 약 1시간 거리를 찾아가 보았다. 모리카와씨는 8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직 예전의 기억을 그대로 갖고 있었으며 열정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당초 『황금 박쥐』와 『요괴 인간』의 제작 경위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어 새로운 시대를 위한 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한국과 일본 정부 차원에서 애니메이션 합작을 추진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한국의 민간 방송이었던 동양방송 동화제작부와, 동양방송에서 합작으로 일본에 세웠던 제작 프로덕션 제일동화가 공동으로 애니메이션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한국에 건너와서 놀란 것은, 애니메이션을 국가 차원에서 뿌리내리려고 생각하여 총력을 기울여 지원하고 있었던 점이다. 서울에 있는 동양방송은 한국 재계의 거두 삼성 그룹이 경영하는 당시 최대의 TV 방송국으로, 10층 건물의 거대한 사옥 빌딩 최상층 전체를 동화제작부로 만들어주었다. 게다가 당시의 정부 각료가 국장을 겸임하고, 제작부장은 삼성물산의 이사가 참가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게다가 한국민의 열의도 대단했다. 처음 내가 맡았던 작업은 애니메이터 지망생을 모으는 것이었는데, 매스컴을 통해 공모한 채용 시험에는 80명 정원에 900명이 지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열의를 보이며 몇 년간 한·일의 애니메이터들이 같이 고생하며 만들어낸 『황금 박쥐』·『요괴 인간』은, 그러나 『요괴 인간』이 일본 내에서 시청률이 하강 곡선을 그리자 갑자기 제작 중단을 결정해버렸다.

"처음에는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는 것이었는데 어느 샌가 기업간의 계약이 되어 버렸고 결국은 일본에서의 시청률이 낮아졌다는 이유로 제작이 중도에 중단되었다. 한국 측과의 계약도 파기되었다."

그 때문에 제일 동화 경영진들과 언쟁도 벌였으나 결국 4년간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떠나게 된 모리카와씨는, "마지막까지도 가족처럼 아껴주고 눈물로 작별 인사를 나눈 한국 스태프들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며 당시 동양 방송 (초기에는 중앙 방송) 동화제작부에서 일했던 애니메이터들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전했다.

그 후 수십 년간 한국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하청을 맡아왔고 다시금 합작에도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30년 전 『황금 박쥐』와 『요괴 인간』을 통해 한·일간 문화 교류에 힘을 쏟았던 애니메이터들의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모리카와씨는 곧 다가오는 월드컵 공동 개최 등 한·일간에 협력도 있지만, 그 와중에 당시 큰 문제가 되고 있었던 교과서 파동이나 일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또 다시 한국민을 배신하는 행동"이 40년 전 자신이 겪었던 일본측의 행동과도 동일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자신들 일본측의 애니메이터들과 한국측의 애니메이터들이 열심히 피와 땀으로 『요괴 인간』을 만들어 내었듯이 지금 세대도 다시금 한·일간에 미래를 향해 협력할 수 있도록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과거의 사정을 밝히려는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