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그리기만 하면 될 것 같은 만화도 개인과 일반 사이 어디쯤에 내 눈을 맞출 것인가를 고민하면 어려워지는 것 같다. 그렇게 전혀 이해 못할 만화가 탄생하기도 하고, 혹은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개성 없는 만화가 나오기도 한다. 김한조의 만화는 그 사이 어디쯤에 있을까? <유토피아> 에서 <오페라> 까지, 그의 만화들은 대상이 있는 듯 보이나 실은 거기서 살짝 벗어난다. 그리고 거기서 강박과 무기력 사이에서 머뭇거림과 고민하는 그를 엿볼 수 있다. ‘강박과 무기력이 직업으로서 작업에 장애물이 될지, 아니면 예술로서 창작의 깊은 샘물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Q. 요즘 어떤 작업 하시나요? 잘 풀리는지...?
A. 요즘엔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지원작인 <페르세포네> 와 역사 만화를 그리고 있는데, 두 가지 일의 일정이 겹쳐서 애를 먹고 있어요. 우선 역사 만화는 한 권 분량의 콘티를 다 끝내놓으려고 해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네요. 예민한 역사를 다루는 것이어서 좀 소심해지는 측면도 있고요. 그림 그리는 데 재미를 붙이려고 손을 움직이고 있기도 하고요.
Q. 무슨 그림을 그리면서 손을 푸시나요?
A. 일단 뭔가 지향점이 있어야 할 것 같아 <페르세포네> 에 참고가 될 만한 책을 뒤적거려 보고 있어요. 주인공인 코레가 미인이어서 예쁜 여인네를 그려 보려고 하는데, 손이 안 따라 주네요. 이전까지 그림을 그린다는 자체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반성하고 있지요.
Q. 그림 그린다는 거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게...?
A. 저는 만화 혹은 그림이라는 것을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쓰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결과적으로 그림은 일종의 숙제가 되어 버렸어요. 그림은 콘티 혹은 스토리 번역용으로 쓰게 되니 그림 그리는 게 재미없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작업의 한계로 돌아오는 느낌이랄까? 그림이 매너리즘에 빠지고, 데생력에 한계가 있으니까 엄청 지우개질을 하면서 연필을 굴려야 본래 생각했던 이미지의 내용이라도 재현하게 되는 거죠.
Q. 아마도 그런 지적이 주변에서도 조금은 있지 않았나 싶은데...
A. 평소에도 인식은 했는데, 얼마 전 새만화책 워크숍에서 피에르 뒤바의 강의를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지요. 드라마가 아주 강한 작업이 아니면, 그림 자체가 주는 표현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걸 슬슬 느끼면서 내 작업방식에 문제가 심각함을 절감하기 시작한 거죠.
Q. 말이나 글로 풀자면 긴 이야기를 만화는 이미지로 상당 부분 보여주니까요. 김한조 작가님은 뭔가 이야기가 많은 것, 혹은 설명식 아님 만담식의 어떤 걸 좋아하는 것 같은데, 이야기에 비해 이미지는 다소 구태의연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 면에서 <페르세포네> 는 기대해 볼 만한데요.
A. 그림 그리는 것 자체를 즐기지 않은 대가라고 생각해요. 아무튼 현재는 콘티 진행, 보완과 더불어 <페르세포네> 캐릭터를 잡고 있는 상황인데, <페르세포네> 는 그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좀 더 그림이란 거 자체에 집중해 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면도 있어요.


Q. 김한조 작가님은 만화로 무엇을 하고 싶은 건가요? 그리고 싶은 이야기나 혹은 그리고 싶은 이미지... 보통 그런 게 있잖아요...
A. 현재는 가장 내 무의식적인 취향에 가까운 만화를 그리고 싶어요.
Q. 무의식을 그리려면 결국 의식적으로 무의식을 의식해야 한다는 말인데... 어려운 일이군요. 무의식은 다작 속에서 겹쳐지는 어떤 것들을 통해 드러나거나, 아니면 개인 내면에 깊이 침잠하면 나오는 게 아닌가요?
A. 어려운 일이지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다 보면 좀 더 솔직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제가 강박이 많거든요...
Q. 그 강박을 안 보여주려고 다소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맞추는 작업을 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A. 강박 그 자체가 자꾸 작업을 노멀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Q. <페르세포네> 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이란 어떤 거죠? <오페라> 와 같은 작업을 보면 그러니까 뭔가 두려워하는 게 있는 거 같은데...
A. 개인적으로 꿈을 많이 꾸는 편인데, <오페라> 는 꿈을 만화로 활용해 본 첫 만화이지요. 아마도 죄의식에 관한 게 아닐지... 제 강박의 원류라고 생각해요.
Q. 죄의식이라... 그건 어디서 오는 걸까요? 박찬욱 감독 인터뷰 보니까 기독교적 죄의식이란 사실 한국인에게는 이젠 전통이 되어 버린 거라고 하던데요...
A. 죄의식의 원류는... 친할머니 계통으로부터 내려오는 참고 사는 유전자와 결벽증적 강박이 어릴 때부터 주입된 기독교적 죄의식이 결합한 거죠. 특히 기독교 신앙에 몰입하던 시기에는 내 유전자 특성이 좀 더 금욕적인 삶에 대한 강박을 극대화시켰던 것 같아요.
Q. 저도 제 스스로를 보면서 그런 걸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실상 사고가 그렇지는 않은데, 남처럼 자유롭게 뭔가 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땐, 내가 그런 인간이라 걸 알게 돼요.
A. 사실 대학교 1학년 때까지 욕을 입 밖에 내뱉는 걸 두려워했는데, 그걸 자연스럽게 하게 되니 왜 그리 쾌감이 느껴지던지, 괜히 으쓱해지는 기분이더라구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으쓱함이 사실 일종의 역 강박이인 거죠. 그런 점에서 체스터 브라운의 <너 좋아한 적 없어> 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Q.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개인적으로 김한조 작가님이 그런 만화하고도 잘 맞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A. 직접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대신 꿈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살을 덧붙여서라도 많이많이 하고 싶어요.
Q. <오페라> 를 놓고 봤을 때 이야기를 다소 고전적으로 푸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좀 더 포스트모던한 이야기 방식, 그러니까 풍부한 서사가 있지만, 그렇다고 딱히 맥락이란 게 필요가 없는...
A. 최소한 읽기에 난해함은 없기를 바라는 면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내가 그리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필요가 절실히 느껴지는 거죠. 내용이 아니라 그림 자체로 할 수 있는 이야기(혹은 개념)들을 너무 많이 놓쳐 왔다고 반성 중이에요.



Q. 만화는 언제 하려고 맘 먹었나요?
A. 직접적으로는 미술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 막막해서 부여잡은 게 만화예요.
Q. 미대에는 어떻게 들어간 건가요?
A. 고등학교 다닐 때 무기력증에 빠졌는데, 유일하게 집중하던 게 그림이어서... 근데 미술학원에 다니니 그 집중하던 것도 희미해지더군요. 이 무기력증 또한 역사가 깊은데, 고 1때부터 시작해서 일시적인 편차는 있었지만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지금은 탈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성과를 조금 보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조금 방심하면 원점이 되기 십상이지만요.
Q. 저도 꽤나 무기력한데 ... 억지로 일을 만들어서 그걸 극복해 보려고 하는 스타일이죠.
A. 전 습관적으로 명확한 목적성이 결여되어 있거든요. 그 점이 차이인 것 같군요.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나사 풀리듯 모든 게 희미해져요. 차라리 그 부분에 있어선 강박이기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진짜 습관적인 목적성 결여가 문제예요. 강박이든 무기력이든 암튼 현재 진행 중인 작업들이 그런 축적된 문제를 푸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Q. 작업량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A. 네.
Q. 만화는 다양하게 많은 능력이 요구되니까, 양이 아니면 풀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요. 그림도 그렇고. 작가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작업을 쉽고 가볍게 하지 못하는 거 같아요. 쉽게 하는 게 정말 좋은 작업이 되게 하는 건데 말이죠.
A. 결국 모두가 강박이 있는 거죠. 그러고 보니, 우리의 강박은 단순히 종교와 가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국가적인 문제, 교육의 문제와도 상관이 있는 거 같네요.
Q. 그래서 한편으로 드는 생각이 결국 필요한 유려함이란 연륜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A. 축적된 뭔가가 없으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아예 순수한 상태라면 모를까... 그 시기는 진작 지난 게 아닐까 싶어요.



Q. 현대사 만화를 그리면서 나름의 주관은 어떤가요?
A. 동아시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글쎄... 최소한 민족감정에 빠지지 말고 기술하자, 일단은 그 정도입니다.
Q. 각 나라마다 나름의 역사 인식의 수준이 다른 것 같아요. 일본의 경우 진보라도 한국의 일반적인 이해와는 상당히 다른 거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독도 문제만 해도 그렇고요.
A. 얼마 전 동아시아 3국의 학자들이 모여 만들었다는 <미래를 여는 역사> 를 읽어 봤는데, 중국은 관의 입장이 많이 반영된 것 같고, 한국은 민족주의적 중도, 일본은 철저히 비주류들...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 비주류 사학자들이 제일 흥미로웠어요. 일본의 특징답게, 한번 인정하면 자존심에 구애받지 않고 철저히 반성하지만. 한편으로는 일본 우익의 논리를 감정적으로는 이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말로 표현 못하는 일본스러움이 재미있어서...
Q. 음... 궁금하네요. 한 번 읽어 봐야겠습니다....우리가 꽤나 모호한 얘기를 오래 했던 듯한 느낌이네요. 독자들을 위한 다소 정보성의 이야기도 좀 나눠야 했는데... ㅎㅎ
A. 죄송하네요, 제 머리가 워낙 막연하다 보니 정리가 잘 안 돼서...
Q. 아니에요. 저는 새로운 면을 발견한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강박과 무기력 사이에서 어떤 만화가 나올지 궁금하네요. 자칫하면 강박이 무기력을 키워갈 수도 있겠지만, 강박이 만들어내는 집착과 무기력의 나른함이 어울린다면 신선한 작업이 완성되지 않겠어요? 에도 여유가 된다면 작은 작품들도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A. 아마도 깨달음이 필요할 듯싶은데, 저한테 그런 순간이 온다면 번쩍하는 법은 없고 찔끔찔끔 조금씩 어느샌가 달라지는 방식으로 올 거란 생각이에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직까진 예쁜 여인을 그리려 해도 힘을 뺀 방식으로 기존의 고정관념과 다르게 그려지지가 않더란 말씀이죠. 손을 움직이는 수밖에...

|| 김한조 프로필 ||
1974년 생(처녀자리)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1997)
한겨레 출판만화전문과정 수료 (3기, 1997-1998)
연재 : 탐구생활(오즈 , 1999 - 2000)
유토피아(박카스 1999 - )
스포츠맨(스포츠서울, 2000)
동물농장(웹진 바카스 2004)
시사 토크(경향신문 펀, 2004-2005)
사과볼 이야기(콩나무, 2004- )
단편 : 뱀장어 (1999)
오페라 (2003)
아주오래된연인들 (2004)
일러스트 : 동화 열무를 재우는 건 너무 힘들어 (바오밥나무, 글 황혜영, 2003)
기타 : 아리수 한글(아리수미디어, 2002), 아리수 수학(아리수미디어, 2004)
게임 애니메이션 참여
블로그:http://blog.naver.com/sanjo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