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공서나 은행 같은 곳에서 잠시 짬이 생기게 되면 잡지를 뒤적거리게 된다. 처음 보는 홍보 책자에도 한두 쪽의 만화를 발견하게 된다.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작은 만화들은 만화가 참 많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하고, 작지만 좋은 만화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느끼게 한다. 마치 아스팔트를 비집고 나온 민들레처럼 보통은 존재를 인식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세계를 구성하고, 누군가의 마음에 새로운 감정과 생각을 불어넣는다.
만화가 신성식도 그런 ‘민들레 만화가로 노동자의 삶에 대한 작은 이야기를 5년 째 피워오고 있다.
Q. 신성식 작가님, 우만연 사무국장님으로 뵙긴 했지만, 이렇게 만화가로서 얘기하는 것은 처음인 듯합니다.
A. 네. 워낙 작업량이 적고, 제가 발표하는 공간이 대중적인 것은 아니다 보니 만화가로 인지도가 적어서요.
Q. 노동 운동 쪽에서 작업을 많이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A. 음... 그런 쪽의 만화를 많이 그리긴 했죠. 현재는 <노동자의 힘> 에 1쪽짜리 만화를 연재하고 있고, 민주노총이나 그 외 노조들의 홍보물의 일러스트 작업 등도 많이 해 왔으니까요. 올해에는 현대 자동차 노조의 1분 분량의 사내 방송물 애니메이션 작업도 진행했어요. 난 그림만 그린 거고, 시나리오와 편집은 ‘노동자 뉴스 제작단에서 했지만...
Q. 실제 현장의 경험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A. 1991년부터 94년까지 공단에 들어가서 일을 했었죠. 단순히 운동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어요. 전공에 맞는 것이었으니까요. 일했던 공장은 1,000명 정도의 규모였고, 어용 노조가 있었죠. 나름대로 가치관을 실현하고자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고민이 많았어요. 이상과현실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 이전에 개인적인 고민이 많은 시기이기도 했으니까요. 노동 자체도 만만하진 않았구요. 1994년인가, 3교대 근무 중에 야간조일 때인데 새벽 무렵이면 과로로 잠깐씩 기절하곤 했죠. 그때는 60kg 정도밖에 안 나갔어요. 현재 90kg 정도니까 저로서는 상당히 몸이 약해진 때였죠.
Q. 만화는 어떻게 시작하신 건가요?
A. 그 해 일을 그만두고, 현재 아내가 독려를 해, 그림을 그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림을 배운 건 아니지만 원래 즐겨했었고, 일러스트 작업도 좀 했었으니까요. 작업 중에 기억할 만한 건, 민중가요집인 <희망의 노래> 1~6권까지의 삽화가 아닐까 싶네요. 어쨌든 다시 시작하면서그림의 장르 중에서 뭘 하는 게 좋을지는 새로 정하기로 했었죠. 회화, 일러스트레이션, 만화... 1994년 9월 30일 회사를 퇴사했고. 1995년 한겨레문화센터의 출판만화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만화는 처음 해 보는 것이었고, 배우는 게 즐거웠어요. 그 시기에는 삶에 대한 고민보다 만화에 대한 고민만 했었습니다. 나로서는 가장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8편의 단편을 작업했는데, 한 편 한 편 물어 보고 배워 가며 그 즐거움에 빠졌죠... 그 만화들은 지금도 기억이 새로워 왜 이 칸은 이렇게 그렸는지 설명하라면 밤새라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같이 다니던 동기들 중 어린 시절부터 만화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하던 다른 학생들을 보면, 내심 열등감도 있고 그랬어요.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만화 속에서 커 온 건 아니었으니까요. 당시엔 한계였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또한 가능성이었던 거 같아요.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는 면이 있었으니까. 이제는 편하게 하기로 맘먹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개성적이라는 생각도 들고. 차별화도 된다고 생각해요. 장점과 단점은 양면이 아니라,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Q. 만화가로서의 계획은 어떤 것인가요?
A. 이제 만화한 지 10년이 되어가네요. 좋은 만화를 하고 싶고, 성공한 작가가 되겠다는 욕망이 있었는데 아직도 고민 중이네요. 만화가로서 30대가 배움의 시기였다면, 40대에는 모색을, 50대에는 작가로서 꽃을 피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방향은 어쨌든 노동자의 삶, 노동자의 문화를 그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긴 이야기를 하기에 무리가 있는 상황이지만, 짧더라도 현재보다는 분량을 늘여서 작업을 하고 싶어요. 우만연 사무국장 일도 있긴 하지만, 우선 1년에 1~2달 정도의 여유를 내어 짧은 작업이라도 해 보고 싶습니다.
Q. 길게 하고 싶은 얘기들이 있으신가요?
A. 블루컬러 얘기를 안 할 수 없겠죠. TV 드라마를 보면 재벌 2세와 이쁜이들 얘기 뿐이잖아요.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아직 구체적으로 진행하지는 않았어요. 개인적으로 그렇고, 제가 연재를 할 수 있는 매체도 마땅치 않으니 우선은 작업을 길게할 만한 여건이 안 되지만...
Q. 현재 우리만화연대 사무국장으로 계신데요. 우만연이 신성식 작가님 세대 이후의 젊은 작가들을 끌어당기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A. 우만연은 1992년 바른만화연구회, 민미협 만화분과, 작화공방, 보리풀, 몽당연필 등이 모여서 우리만화협의회로 시작되었고, 이후 서울무비 등 애니메이션 하던 분들과 평론가 협회가 함께 하여 ‘우리만화 발전을 위한 연대 모임으로, 이것이 다시 우리만화연대로 변모하였습니다.이런 과정 속에서 회원들 간의 결속력과 친분이 강화되다 보니, 외부에서 새로 들어오는 경우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나 싶어요. 세대가 많이 바뀌면서 전과 같이 협회에 구속되기보다는 개인적으로 활동하기를 즐긴다고 볼 수도 있을 테고요. 반성을 하자면 우선은 우만연이 새로운 회원 확보에 적극적이지 않아서가 이유일 테고, 관행적인 단체의 역할에만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내부적으로 지쳐 있고, 밖에서도 번듯한 게 없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우만연 스스로도 조직 재생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변화하고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고, 창작이 해결책이지 않나 싶어요. 구체적인 계획들을 준비하고 있고요. 이전의 사업이 만화계 전체 틀에서 행해졌던 것이라면, 기존에 한국만화가협회의 업무와 겹치는 부분을 줄이고, 만화 포럼과 같이 만화 문화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과 회원들의 창작을 도모하기 위해 출간 사업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
Q. 내년까지 사무국장직을 하실 거라고 들었습니다. 이후 계획은...
A. 조직적으로는 우만연이 더욱 발전하여 건강한 조직으로 나아가는데 조금이나마 일조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구요, 개인적으로는 아무래도만화를 그려야겠지요. 앞서 조금은 무거운 주제들에 대해 얘기했는데 실은 상업적인 작품도 하고 싶거든요. 이제 곧 두 아이의 아빠가 되다보니 돈도 좀 벌어야겠고...하하하.
작가 프로필
1967년 생
1991~1994년 안양의 한 공장에서 3교대 근무.
1995년 3월에 문을 연 한겨레문화센터 출판만화학교에 1기로 1년 내내 다님.
1996년 저예산독립만화지 <월간 화끈> 창간 동인
1997년 <타임버드 동물탐정단> (웅진출판)...... 이 망한 뒤 3년간 잠적.
2001년 한겨레문화센터 출판만화학교 강사.
2002년 (사)우리만화연대 사무국장
2003,4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만화전문가 과정 강사.
<행성이야기> (월간 화끈)
<만화로 보는 과학사(테크사이더)
<만화로 아이들 만나記(우리교육)
<23세기 바리공주(과학쟁이)
<만화과학사신문(김지훈 공저,아이세움, 2001년 대한민국만화대상 학습만화상 수상)
제목이 없었던 2쪽만화(경향게임즈) 일명
<살아남기> 시리즈(아이세움) (노동자의 힘)
<남극점 정복하기> (아이세움) 등
현재 (사)우리만화연대 사무국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애니메이션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