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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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산의 『스카이 레슬러』

지금 20대 중, 후반인 분들은 혹시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다. 90년대 초반 한국을 강타했던 미국 프로레슬링 WWF의 열풍을. 헐크 호건을 필두로, 얼티밋 워리어, 밀리언 달러맨, 데몰리션등등 WWF의 수퍼스타들이 벌이는 박진감 넘치는 시합은 소년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었다.

2002-06-01 하성호

지금 20대 중, 후반인 분들은 혹시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다. 90년대 초반 한국을 강타했던 미국 프로레슬링 WWF의 열풍을. 헐크 호건을 필두로, 얼티밋 워리어, 밀리언 달러맨, 데몰리션등등 WWF의 수퍼스타들이 벌이는 박진감 넘치는 시합은 소년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었다. 


만화가 당대의 유행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매체 중의 하나인 만큼, 저들 스타들을 지면에서 만나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아이큐 점프」에 연재된 장태산의 『스카이레슬러』는 김철호의 『액션 헐크』와 함께 당시 프로레슬링 붐을 타고 나온 한국 만화들 중에서 가장 높은 지명도를 지닌 작품이었다. 연재 초기에는 노을이라는 스토리 작가가 따로 있었던 것 같으나, 이내 장태산이 글, 그림을 모두 맡게 되었던 것 같다.


퇴역한 명 레슬러 아놀드 팜머는, 16인의 양자들의 부양을 위해 프로모터 던킹의 위험한 제안을 수락하여 멋진 복귀 전을 선보이지만, 신예 레슬러 프레드릭과의 승부중 약물의 부작용이 원인이 되어 사망한다. 그의 양자였던 백만은, 팜머 사후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을 다시 모으기 위해 악역 레슬러 양성기관 타이거 홀에 입문하여 수업을 쌓고, 마침내 프로레슬러 복면 X 로서 복귀한다. 그러나 오랜 동안 헤어져 있던 가족들의 마음에는 메울 수 없는 골이 패어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타이거 홀은 도망자 백만을 처단하기 위한 자객 레슬러들을 보내오기 시작한다는 것이 기본 줄거리인데,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액션 헐크』가 비교적 가벼운 코믹터치의 작품이었다면 이 『스카이 레슬러』는 장태산 특유의 하드보일드한 드라마를 선보이고있다. 과거에는 가족이었으나, 애정과 우애라는 갈림길에서 결국 다른 길을 선택한 형제 백만과 석찬의 갈등은 링 위에까지 이어져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 만다. 장태산의 만화들에서는 미국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의 이야기가 곧잘 다루어지곤 했는데 『스카이 레슬러』뿐 아니라 미식축구 만화였던 『터치 다운』,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길거리 농구를 소재로 한 만화도 존재했었다. 일종의 아메리칸 드림을 소재로 삼은 셈이지만,『스카이 레슬러』에서 출세를 위해 피도 눈물도 던져버린 석찬의 모습에선 소년지에서는 드물게 미국 사회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인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중견 만화가들 중에서도 힘이 넘치기로 정평이 나있는 장태산의 작화는 프로레슬링 시합장면에서 그 진가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치열하게 맞부딪치는 육중한 근육은, 별다른 기술의 묘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격투시합의 박진감을 확실히 느끼게 한다.(이 부분에 대해 프로레슬링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프로레슬링 자체가 갖고 있는 매력과 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의견도 존재하는데, 프로레슬링의 묘사만을 놓고 본다면 『액션 헐크』 쪽이 앞선다는 평도 있다.)

이런 무게있는 드라마와 박력있는 작화는 『스카이 레슬러』에 대한 독자들의 지지에 충분히 납득이 가도록 만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리는 부분이 존재한다. 전술한 스토리 다이제스트를 읽고 올드 만화팬들 이라면 떠오르는 이름이 있을 것이다. 바로 프로레슬링 만화의 영원한 고전 『타이거 마스크』다. 고아를 위해 돈을 모은다는 점등은 제쳐두고라도, 타이거홀(호랑이굴)과 자객 레슬러들의 도전 등등은 명백히 『타이거 마스크』의 모방이다. 이외에도 카지와라 잇키의 『프로레슬링 수퍼스타 열전』에서 차용해 온 에피소드등도 간혹 엿보이니, 설정의 독창성면에서는 그리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왠만큼 운이좋지 않으면 보기도 힘든 작품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나온지 고작 10년 정도밖에 안 된 만화의 단행본(게다가 다른 출판사에서 재 출간 된 적도 있으니 실제로는 4,5년이다.)조차 구입하기 힘든 이 땅의 현실은, 추억을 돌이켜보고자 하는 만화 애호가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하다. 2001년 가을 무렵 나돌았던 클로버 문고 복간 계획은 꿩 구워먹은 소식이니, 그것을 계기로 재간 행이 활성화되기를 기대했던 입맛은 씁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