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진석 작가의 프로필을 살펴보면 모 대학 ‘산업공학과’라는 전공이 눈에 들어온다. 언뜻 생각해보면 만화 작업에 어울릴만한(?!) 예체능 전공도 아니고, 스토리 작가에게 어울릴 법한 인문학 전공도 아니다. 스토리 작가라는 직업으로부터 공학도와의 관련성을 찾기란 그리 용이하지 않다. 여기서 궁금한 것 하나. 공학 전공자가 스토리를 쓸 때 다른 이에 비해 유리한 점이 있다면? 혹, 미분 적분에 인수분해 및 행렬, 수열의 공식으로 다져진 논리가 스토리에 녹아든다면 완벽한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통해 감정의 비약을 막고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낼 수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감정을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완벽한 스토리 라인을 창조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의 초기 작품들을 살펴보면 일단 남성적인 냄새가 짙다. 데뷔작인 <화룡검>(1998년, 박지홍 작화)에서부터 <건비트>(2000년, 고병규 작화), <컴뱃 바이블>(2003년, 박지홍 작화) 그리고 스토리 집단 ‘혼’의 멤버로서 공동 작업한 <라스트 환타지(Last Fantasy)>(2002년, 권용완 작화)까지 액션물이 주를 이룬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품들의 시대적인 배경이 과거와 미래 그리고 가상의 시간대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 라스트 환타지 (Last Fantasy)
그림 : 권용안, 대원씨아이㈜
시간적인 구성에 대한 자유로움이 이야기 구성의 자유로움으로 이어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사례로 최근 그의 활동을 살펴보면 눈에 띄는 한 가지가 있다. 아마추어 만화행사인 ‘코믹월드’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오은지(필명 도짱) 작가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 새로운 장르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코믹월드 시장이 활성화 되어 있기는 하지만, 유통(1대 1 판매방식)과 편집(자비 출간)의 흐름상 주류가 아닌 비주류에 가깝기 때문에 프로작가들 역시 ‘만화를 즐긴다.’다는 개념으로 참가하는 경우가 많다. 요컨대, 직업적인 강박관념보다는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작품을 할 수 있는 공간인 셈. 전진석 역시 이러한 무대를 통해 만화를 즐기면서도 스토리에 대한 실험과 연구를 끊임없이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 천일야화 (千一夜話)
그림 : 한승희, (주) 서울문화사
이 같은 실험을 주류무대로 옮겨온 것이 <천일야화>다. 성역할 교환은 현실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설마 ‘아라비안나이트’ 속 이야기꾼의 성별을 바꾸려는 상상을 누가 할 수 있었을까? 왕이 남성이므로 성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으레 수청을 드는 이는 여성이어야 할 것이다. 헌데 전진석의 상상력은 이를 뒤집었다. 왕의 수청을 남성이 들 수 있다는 것. 이 간단한 사실에도 기존 가치관을 무너뜨릴 수 있는 파격이 존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파격을 통해 그는 아마추어 동인시장에서나 가능할 법한 코드를 주류 만화의 세계로 끌어들이는데 멋지게 성공한다. 게다가 ‘처용에 관한 이야기’나 ‘선녀와 나무꾼’처럼 우리 전래민담을 혼합 교배시키는 기교란 참으로 유쾌하다.
애초의 예상이 틀린 점이 있다면 그는 인물들의 감정 비약을 막는 것뿐만 아니라 되려, 치밀한 구성을 통해 섬세한 감정선을 이끌어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재해석하여 주인공들을 새롭게 배치시킨 전진석‘식’ <천일야화>. 대만, 미국, 프랑스 등으로 수출되었다고 하니, 그네들 나라에서는 <천일야화> 속 ‘선녀와 나무꾼’이 어떻게 이해될지 자못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