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자주 과거를 잊어버리고 산다고들 이야기하지만, 만화만큼 과거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분야도 드물다. 하지만 사실 기억하고 싶어도 그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바로 과거를 기억할만한 근거들이 상당수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만화가 받은 억압은 분서갱유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같은 시간 속에서 서정철의 작품들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제목으로만 기억될 정도로 그 흔적들이 사라졌다.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없는 현실은 그저 ‘사라져버렸다’고 하기엔 사실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동물 드로잉에 대한 책을 발간했던 이현세가 어느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동물화는 본인보다 10배 이상은 꼼꼼하게 그렸다”라고 지적한 이가 바로 서정철. 그만큼 서정철의 데생력은 대단했던 것이다. <다시 보는 우리만화>에서 ‘현실을 이기는 비극의 힘’이라는 주제아래 전통극화의 선두주자로 김종래, 박광현 등과 함께 서정철을 소개한 바 있는 한영주 역시 “사실적인 그림체로 승부한 작가”로 그를 설명한다. 또 한영주는 “1950년대부터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서봉재나 이병주, 그리고 서정철 등도 독특한 작품세계를 전개했을 것으로 짐작되었지만, 남아있는 작품이 많지 않다.”며 서정철의 작품이 대부분 소실된 현실을 개탄한 바 있다.
1950년대 중반 <동굴의 여왕>으로 데뷔한 이래, 1970년대까지 <흑난초>, <백팔염주>, <자화상>, <황금부채>, <동굴 속의 비밀>, <흑진주의 비밀>, <풍운의 백운성>, <부평초>, <술법 10대 1>, <오형제 별>, <시계탑의 비밀>, <성난 햇불>, <태자검>, <우리 엄마>, <빛나는 햇불>, <0시의 별장>, <야광주의 비밀> <황금봉> <태양소년>, <비밀지령>, <북국만리>, <불타는 전선>, <비밀전쟁>, <팔광주> 등 무려 5백여 작품을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에 이르러 그 실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작품은 극히 적다. 이들 작품 가운데, 특히 <태자 검>, <성난 햇불> 등은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외세에 대항한 우리 민족의 투혼을 보여주던 작품들이어서 당시 어린이 독자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었다.그는 2005년 만화의 날에 황금펜촉상을 수상함으로써 다재다능했던 그의 창작력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젊은작가모임에서 원로만화가들에 수여하는 황금펜촉상의 의미를 짚어본다면, 그의 작품 활동에 대한 후배들의 애정이 각별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 참고자료 : <다시 보는 우리만화>, <한국만화인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