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국내 극장가는 ‘연상호’(38)라는 이름 석 자로 뜨거웠다. ‘돼지의 왕’(2011), ‘사이비’(2013) 등 사회적 메시지가 짙은 독립 애니메이션으로 주목받아온 연상호 감독이 첫 실사 영화 도전에서 대형사고를 쳤다. 7월 18일 개봉한 ‘부산행’은 관객 1156만 명(9월 18일 기준)을 동원하며 역대 국내 흥행 9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연 감독은 8월 17일 극장판 애니메이션 두 편을 스크린에 걸기도 했다. ‘부산행’과 짝을 이루는 프리퀄로, 역시 연 감독이 연출한 애니메이션 ‘서울역’과 연 감독이 제작하고 ‘마리 이야기’의 이성광 감독이 오랜만에 연출한 ‘카이: 거울호수의 전설’은 각각 14만 6000여 명, 2만 4000여 명을 동원했다. 한편은 성인 애니메이션으로, 한 편은 가족 애니메이션으로 새로운 도전을 한 셈이지만 ‘부산행’의 엄청난 흥행과 비교하면 무척 아쉬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단맛과 쓴맛을 동시에 맛본 연상호 감독을 만나봤다.
△ 연상호 감독
Q. ‘부산행’의 대박은 예상했는지.
A. 어느 정도 대중성 있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반응이 열광적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너무 감사하다. 1000만이라는 숫자보다는 다음 작품 할 때 조금 더 새로운 것을 과감하게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Q. 어떻게 실사 영화에 도전하게 됐는지.
A. 원래는 ‘서울역’ 작업이 먼저였는데 투자 배급을 맡은 장경익 NEW 대표가 ‘서울역’을 실사로 리메이크하자고 제안했다. 굳이 같은 걸 실사로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좀 고민을 하다가 ‘서울역’과 같은 세계관을 바탕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열차를 타고 내려가는 이튿날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말을 꺼냈는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아역 캐스팅 과정에서 아버지와 딸 이야기로 바뀌었다.
△ 7월 20일 개봉한 연상호 감독 <부산행> 포스터 이미지
Q. NEW와의 인연이 깊어지고 있는데.
A. ‘돼지의 왕’으로 부산영화제 3관왕을 차지하며 많은 화제가 됐지만 이렇다 할 차기작 제안이 들어오지 않았다. 우연한 계기로 술자리를 함께한 이동하 레드피터 대표에게 보여준 ‘사이비’ 시나리오가 NEW에게까지 연결되며 지금에 이르게 됐다.
Q. 애니메이션 감독의 실사 도전, 국내에선 전례를 찾기 힘들다. 부담은 없었는지.
A. 부담이라기보다는 직접 연출하는 게 맞는지에 대한 고민은 있었다. 애초에 내가 연출하려고 기획을 제시했던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NEW에서 내가 맡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권유했다. 워낙 초반 스태핑도 좋았다. 대부분 내 작품들을 좋아해주던 분들이라 연출부 입장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감독인 연상호가 처음 실사를 하는 데 어려움이 없게 해줘야겠다는 분위가 강했던 것 같다.
Q. 애니메이션 연출과 실사 영화 연출이 다르게 느껴졌나.
A. 그렇지 않다. 아무래도 ‘부산행’ 자체가 세트 분량이 많다 보니 편했을 수도 있는 데 크게 다르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Q. ‘부산행’에서 애니메이션에서만 사용하는 기법 등을 활용한 게 있는지.
A. 애니메이션을 할 때도 독특한 앵글은 사용하지 않는다. 앵글 면에서는 평범한 스타일이다. 명확하게 던져줘야 하는 것을 던져주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특이한 미장센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원래 갖고 있지 않다. 영화 배경이 아주 좁고 반복되는 열차 공간이다 보니 그런 면에서 루즈해보이지 않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Q. B급 영화의 대명사였던 좀비물은 이제 할리우드에서 블록버스터로 만들어질 정도다. 국내 관객의 눈높이도 한층 높아졌는데 어떤 면에서 승산이 있다고 봤는지.
A. 내가 최초로 재미있게 본 좀비물은 잭 스나이더 감독의 데뷔작인 ‘새벽의 저주’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작품을 리메이크했다. 잭 스나이더 감독답게 스타일리시하고 리얼했다. 최근에는 블록버스터 좀비물인 ‘월드워 Z’가 나와 신선하기도 했는데 기본적으로 열차라는 공간과 좀비, 그 안에 탄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콘셉트만으로도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 모티브로 삼았던 작품은 코맥 맥카시 원작의 ‘더 로드’와 스티븐 킹 원작의 ‘미스트’였다. 그 영화들처럼 작은 예산으로, 한정된 공간에서의 스릴을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나중에 예산이 불어나고 블록버스터급이 되며 액션 부분이 강화됐다.
Q. 철저한 상업 영화라고 했지만, 애니메이션에서 그랬던 것처럼 메시지를 담았을 것 같다.
A. 제일 공들인 씬은 15호 칸으로 넘어온 주인공 일행이 내쫓기는 장면이다. 가장 좋아하는 한 컷을 뽑으라면 공포심 때문에 방금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까지 소리를 지르는 광경이다. 불안과 공포 때문에 혐오가 일상화가 된 한국 사회의 모습을 우화적으로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등 우리 사회가 겪었던 재난 상황이 떠오른다는 평가도 많은 데 어떤 특정 사건이라기보다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공통의 기억, 불신과 공포가 주 모티브였다.
△ <부산행>의 스틸컷
Q. ‘부산행’의 성공이 국내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의 활성화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주변에 있을 것 같다.
A. 그런 분위기가 없지 않아 있다. 애니메이션 쪽으로도 무엇인가 계속하긴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국내 애니메이션 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애니메이션은 영화와는 별개 산업이라 그 산업대로의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Q. ‘부산행’을 뒤따른 ‘서울역’과 ‘카이’는 기대에 못 미쳤는데.
A.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가 어디에 있는지 고민이 많다. 솔직히 이번 결과를 어떻게 봐야 하는 지 상당히 혼란스럽다. ‘카이’가 특히 잘 안 된 것은 개인적으로는 충격이다. 작품 내적으로, 외적으로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전체를 성우 작업을 했는데 영화 내적으로는 그게 맞는 것 같지만, 배우를 참여시킬 때와는 달리 조금이나마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부분이 없어서 마케팅이 쉽지는 않았다. ‘서울역’도 기대보다 안 됐다. ‘사이비’ 같은 저예산 작품이 제대로 마케팅 됐을 때 관객이 얼마나 볼까 그런 의문이 있었는데, ‘서울역’도 마케팅 비용을 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부산행’과 연결되며 마케팅 효과를 내서 기대가 많았던 게 사실인데 그게 양날의 검이었던 것 같다. 어찌 보면 ‘서울역’이 가진 내러티브의 한계였을 수도 있고, ‘부산행’과 연결되는 지점들에 대해 마케팅 한 것이 독이 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사이비’나 ‘돼지의 왕’보다는 여섯 배나 많이 본 거라 그 자체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고민도 있다. 어쨌든 이번 결과를 발판 삼아 다음번에 보완을 해나가야 하는 데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이 많다.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지금 시장 상황에선 저예산일 수밖에 없어서 저예산 애니메이션의 방향성이 무엇이냐는 고민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저예산 영화들도 대부분 잘 안되거나 손익분기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이라 단순히 애니 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고 본다.
△ 8월 개봉한 애니메이션 <서울역>, <카이 거울 호수의 전설> 포스터 이미지
Q. 한국에서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 같다.
A. 한두 달 뒤에 스튜디오 다다쇼의 작품 하나가 더 나온다. 성인용 애니메이션 ‘졸업생’이다. 극장판이 아니라 IPTV로 바로 넘어가는 IPTV 전용이다. 그 결과까지 보고 방향성을 천천히 잡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극장에 한 번 걸려면 DCP(디지털 상영용 영화 파일)를 만들어야 하는 등 마케팅을 안 한다 해도 들어가는 비용이 많다. 저예산은 스크린을 잡기 힘들고 잡더라도 상영회차가 보장이 잘 안 되기 때문에 꼭 극장으로 가는 게 맞는지, 차라리 디지털 플랫폼을 최대한 이용을 잘해서 어떻게 할 방법은 없는지 그런 것까지 같이 고민해보고 있다.
△ <카이 거울 호수의 전설> 스틸컷
Q. 애니메이션 작업 때 전문 성우보다 배우를 캐스팅하는데.
A. 작업을 할 때 선 녹음을 하는 편이다. 그림 그리기 전에 먼저 녹음을 할때 좋은 점이 있다. 후시 녹음을 하면 미리 정해진 것밖에 못하는 데 먼저 녹음을 하면 배우들이 할 수 있는 해석과 뉘앙스가 많이 들어갈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배우 분들의 표현력을 빌리고 싶은 거다.
Q. 언제부터 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꿨는지.
A. 좀 웃기는 이야기인데, 어렸을 때는 뭐랄까 특별한 사람, 잘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있었다. 검사, 치과의사 이런 거였는데 공부를 해보면 깨닫게 되지 않나. 내가 그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에 일종의 열패감에 젖기도 했다. 애니메이션을 매우 좋아했는데 중학교 때쯤 엄청나게 각광을 받는 일본 감독이 있었다. 그게 미야자키 하야오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을 잘하면 유명한 사람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미술학원에 다니게 된 게 중학교 3학년쯤이다. 그 뒤로도 생각이 자주 바뀌긴 했지만.
Q.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이 아닌 오일 페인팅(Oil painting) 전공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A. 고등학교에 진학해선 국내에선 애니메이션으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걸 알고 마음이 시들해졌다. 그래도 미술을 하니까 명문대는 가야지 싶었는데 입시에서 기대만큼 결과를 내지 못했다. 재수도 고민했는데 애초에 애니메이션을 하려고 학원에 다녔으니 차라리 애니메이션을 해보자 싶었다. 대학을 다니며 단편 서너 편을 만들었는데 상도 못 받는 등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재능이 없다는 생각에 졸업 즈음엔 취업으로 방향을 돌렸다.
Q. 스튜디오 다다쇼는 어떻게 창업했는지 궁금하다.
A. 애니메이션 해외 외주 업체에 취직해 일 년 반 정도 다니다가 독립했다. 회사에 다닐 당시엔 난 엄청나게 과한 열정에 주변 사람을 짜증나게 만드는 신입이었다. 타성에 젖어 작업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정말 애니메이션을 잘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에 회사를 나오게 됐다. 스물아홉 살 때 내린 나름 큰 결정이었다. 부모님 입장에서 보면 회사도 착실하게 다니고 장가도 가고 그랬으면 했는데 멀쩡한 회사를 관두고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겠다고 해 많이 혼났다.
Q. 출판 만화 쪽으로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인지. 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A. 애니메이션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키라’를 좋아할 것이다.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이나중 탁구부’ ‘두더지’, ‘낮비’ 등을 그린 후루야 미노루다. ‘두더지’나 ‘낮비’ 같은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돼지의 왕’은 그런 생각으로 만들게 된 작품이다.
Q. 앞으로도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오가며 작업을 할 계획인지.
A. 그렇다.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실사 영화의 언어로 할 수 없는 이야기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언어로 스토리텔링을 했을 때 더 힘이 생기는 이야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단순하게 장르가 판타지냐 아니냐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 <서울역>의 스틸컷
Q. 어떤 연출가가 되고 싶은지.
A. 경계하는 부분 중 하나가 너무 빨리 개성이 규정되어버리는 것이다. 될 수 있으면 여러 색깔의 작업을 하고 싶다. 사실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수식어도 꺼려진다. 아주 시간 많이 지나서 작품이 많이 쌓였을 때 어떤 성향을 보인다면 규정될 수 있는 것이지 내가 작품 몇 편 했다고 여기서 개성을 찾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영화에 내 인장을 찍어야 한다는 강박은 위험한 것 같다.
Q. 차기작은 실사인지, 애니메이션인지.
A. 실사 영화다. 우연히 초능력을 얻게 된 평범한 아버지와 딸에 대한 이야기다.(‘서울역’을 함께했던 류승룡과 심은경이 캐스팅된 상태다) 제목은 ‘염력’이다. 블랙 코미디에 액션과 드라마를 섞은 히어로 영화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작년 8월 ‘부산행’ 촬영이 끝나고 후반 작업에서 내가 할 게 많지 않아 틈틈이 시나리오를 써왔다. 그간 실사에서 잘 안 하던 시도, 장르적으로도 새로운 작품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A. ‘돼지의 왕’으로 부산영화제 3관왕을 차지하며 많은 화제가 됐지만 이렇다 할 차기작 제안이 들어오지 않았다. 우연한 계기로 술자리를 함께한 이동하 레드피터 대표에게 보여준 ‘사이비’ 시나리오가 NEW에게까지 연결되며 지금에 이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