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이제 옛말? 문하생과 어시스턴트에 관하여
‘중쇄를 찍자’라는 일본 드라마가 있습니다. 원작은 일본 만화이고, 우리나라에서 ‘오늘의 웹툰’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던 인기작인데요. 이 드라마 속에는 무림 고수를 연상시키는 거물 작가, 개성 넘치는 젊은 천재 작가 등 다양한 작가상이 등장하지만, 정작 사람들에게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인물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누마타 와타루’라는 만화가 지망생 겸 문하생입니다. 청년 시절의 누마타는 대학교 만화 동아리에서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이름을 날리고, 신인상을 받은 적도 있던 슈퍼 루키였습니다. 금방 대단한 만화가가 될 줄 알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문하생 생활을 했지만, 데뷔를 못한 채 2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러가 버리고 맙니다. “언젠가, 언젠가는”을 반복하며 참고 또 참던 누마타는 마지막으로 단 한 명의 후배에게 자신의 만화를 인정받은 후, 미련을 떨쳐버리기로 하고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누마타의 스무 해의 세월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습작 종이가 흩날리는 장면은 아직도 명장면으로 손꼽히는데요. 전체적으로 유쾌한 톤인 작품을 보다가 여기서 펑펑 울었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문하생’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만화계에 존재하던 특수한 직책이었습니다. 만화라는 매체가 만드는 데 워낙 많은 노동력이 들어가다 보니, 만화가로서는 중요한 인물이나 장면을 그리는 것 외에 비교적 단순하게 할 수 있는 배경 작업이나 스크린톤, 밑색, 명암 작업 등을 해 줄 보조 인력이 필요해집니다. 한편, 만화 교육을 받거나 만화가로 데뷔할 수 있는 경로가 많지 않았던 종이 만화 시대에는, 유명한 만화가의 아래로 들어가 만화를 배우고 만화가가 되는 훈련을 받고 싶어 하는 지망생들이 많았습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생긴 이 ‘문하생’ 제도는, 하지만 득 못지않게 실이 많았습니다. 문하생이 데뷔를 하기 위해서 프로 만화가를 ‘선생님, 스승님’으로 모시는 관계가 되다 보니, 그야말로 공과 사를 넘나드는 개인 집사 같은 역할까지 떠맡게 되었던 것입니다. 종이 만화 시대에 문하생 생활을 해본 많은 이들은 ‘그냥 노예였다’는 식으로 그 시절을 회상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작가의 집이나 화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밥, 빨래, 청소 등 가사를 떠맡는 것은 물론, 일에 대한 보수를 주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잠을 못 자게 하거나, 아파도 병원에 못 가게 하거나, 폭언이나 폭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영혼까지 탈탈 털 거라면 대신 교육이라도 확실히 시켜주면 좋을 텐데, “감히 어디 너 따위가 신성한 원고를”이라고 눈을 부릅뜨며 펜에 손도 못 대게 하는 만화가들이 있었기에 문하생은 서러움만 삼켜야 했습니다. 물론, 문하생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주고 제자로 성심성의껏 길러주는 훌륭한 만화가들도 있었고, 실제로 걸출한 만화가 중 문하생 출신들도 존재하지만, 그 구조 자체가 갑을 관계가 형성되기 쉬운 위험한 구조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우선, 종이 만화에서 웹툰으로 주류가 바뀌면서 데뷔할 수 있는 경로가 다양해졌습니다. 웹툰 작가 지망생들은 공모전에 응모할 수도 있고, 플랫폼의 자유 연재란에서 무료 연재를 시작하면서 상위 리그로의 진출을 노려볼 수도 있습니다. 개인 SNS에서 간단한 컷툰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하기도 하고, 인터넷 카페에서 다양한 종류의 외주를 받아 활동하기도 합니다. 자유를 조금 포기하더라도 안정된 페이를 받고 싶을 때는 회사의 소속 작가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웹툰을 배울 수 있는 곳도 넘쳐납니다. 스토리 구상부터 그림 그리기와 피칭 기술까지, 동네마다 웹툰 학원이 있고, 웹툰학과를 개설한 대학이나 대학원도 흔하며, 밖에 나가기가 귀찮으면 안방에 가만히 앉아 온라인 강의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SNS를 조금만 뒤져보면 현직 웹툰 작가로부터 일대일 과외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복지와 자존심을 버려 가며 프로 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 보조 인력들이 거의 다 ‘어시스턴트’ 아니면 ‘보조 작가’, ‘서브 작가’의 직책을 가지고 만화가와 함께 하게 됩니다.
사실 종이가 인터넷 화면으로, 펜이 전자펜으로 바뀌었을 뿐, 웹툰을 만드는 방식 자체는 기존의 종이 만화 때와 크게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한 명의 작가가 주축이 되어 스토리를 구상하고, 스토리를 짜고, 펜선 작업과 채색 작업을 하고, 대사 작업과 최종 편집을 거쳐 하나의 회차를 완성해 냅니다. 그렇게 보통 백 회차 이상인 만화가 완결에 이를 때까지 몇 년간 이 작업을 하고, 또 하고, 또 하는 것입니다. 작가의 몸은 하나뿐인데 그려야 할 그림은 너무도 많다 보니, 어시스턴트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작가에 따라서는 배경뿐만 아니라 등장인물까지 어시스턴트의 도움을 받아 그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도라에몽’ 작가의 경우, 캐릭터 어시스턴트를 따로 두고, 어시스턴트가 그린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보완이나 수정을 지시하는 식으로 작업했다고 합니다. 마치 유명 레스토랑에서 헤드 쉐프가 직접 프라이팬을 잡지 않고 수 쉐프들의 요리를 관리 감독해서 내보내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즘은 잘 나가는 웹툰 작가들에게 여러 플랫폼에서 한꺼번에 작품을 요청하거나, 한 플랫폼에서 요일별로 복수의 작품을 주문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아예 웹툰 작가의 작업실이 공장처럼 대량 생산 체제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 작가는 여러 작품을 총괄하면서 주로 스토리를 짜고 최종 생산물의 퀄리티를 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그 밑에 실력과 연륜이 있어 믿고 맡길 수 있는 치프 어시스턴트들을 여러 명 두고, 그보다 훨씬 많은 어시스턴트들을 두고 콘티 전 각색, 콘티 제작, 밑색 채색, 그림자 채색, 배경, 펜터치, 보정 등을 세부적으로 단계화된 공정을 착착 진행시키는 식입니다. 이러한 제작 방식에 대한 견해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웹툰 시장의 성장과 함께 이러한 제작 방식도 더 보편화될 수밖에 없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하생’이 ‘어시스턴트’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 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화실이 기업처럼 운영된다고 해서, 보조 인력의 권리가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대한민국 웹툰의 역사가 3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어시스턴트로서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실태 조사에 따르면, 웹툰 보조작가들의 연평균 수입은 600만 원대로, 최저 임금 수준에도 턱없이 미치지 못합니다. 심지어 연간 100만 원 미만을 벌었다는 보조작가들의 비율도 적지 않았습니다. 또한 구직 경로가 주로 인터넷이나 지인 소개를 통하다 보니,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거나 부당한 계약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위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보조 작가들 중 70% 이상이 정식 계약서 없이 구두로 보조작가계약을 체결했고, 보수나 보수 지급일, 업무 범위, 업무 시간을 마음대로 바꾸거나 강요하는 등의 불공정 거래 행위를 경험한 보조 작가의 비율도 절반이 넘었다고 합니다. 보조작가의 지위를 근로자가 아닌 ‘프리랜서’로 설정하다 보니, 기본적인 휴게 시간이나 식사시간이 보장되지 않고, 유휴수당이나 초과근무수당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으며, 웹툰 작가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갑자기 휴재를 하거나 ‘잠수’를 타게 되면, 퇴직금도 못 받는 보조작가는 생계를 잃은 채 덩그러니 남겨지게 된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회사에 소속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육 기간’이라는 명목으로 페이를 지급하지 않고 일을 시키다가 실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내쫓는 경우도 있고, “메인 작가가 고용될 때까지만 잠깐”이라고 하면서 사실상 메인 작가의 업무를 몽땅 떠넘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웹툰 작가는 한국만화가협회나 웹툰작가협회가 있어 단체행동을 할 수 있지만, 웹툰 보조작가는 위 협회들에 가입할 수 없어 하소연할 곳도 없습니다. ‘만화 단행본 1권 이상 출판 또는 데뷔를 해 3개월 이상 웹툰을 연재’한 프로 작가들만이 협회 가입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웹툰 작가는 웹툰 보조 작가에 있어서는 고용자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이해 관계가 충돌하는 상황이 생기기 쉬워 보조 작가의 권익을 보호하기에 적합한 단체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에 서울시에서 웹툰 보조작가의 권익 보호를 위해 업무 범위, 근무시간, 임금 기준 등 노동조건과 작품 내 이름 표기에 관한 내용이 반영된 ‘서울형 웹툰 보조작가 표준계약서’ 개발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아직 노동환경 파악을 위한 구체적인 실태조사 중인 것으로 보이며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빨라도 올해 하반기쯤 배포가 되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서울시에서 상당한 비용을 들여 개발한 이 표준계약서는 웹툰 제작사나 협회를 비롯해 웹툰 작가와 보조작가가 많이 이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배포할 예정이고, 서울시 홈페이지에도 게시하여 무료 다운로드 가능하도록 할 것이라고 하니, 보조작가 계약을 체결하셔야 하는 분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시면 매우 좋겠습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표준계약서가 배포되지 않은 현 시점에서는, 보조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반드시 계약서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서로 믿음이 있으면 되지, 뭐 번거롭게 계약서를 쓰냐고 하는 곳은 가차 없이 거르셔도 됩니다. 보조작가를 필요로 하는 곳은 또 있습니다. 카카오톡으로 대충 적은 계약 조건을 보내주면서 동의하라고 하거나, 반쪽도 안 되는 종이쪽지를 계약서랍시고 내미는 곳도 가지 말아야 합니다. 계약서에는 기본적으로 업무의 내용과 구체적인 범위, 완료된 업무에 수정이 필요할 때 수정 요구 방식과 수정 의무의 범위, 기본적인 보수와 지급일, 지급 방식, 보수 지급이 사전 동의 없이 지연되었을 때의 손해배상, 정해진 업무 외의 일을 맡기게 되었을 때의 추가 보수 지급, 휴게시간과 휴일, 작업물의 권리 귀속, 개인정보 보호의무 및 이를 위반했을 때의 손해배상, 계약의 종료 및 해지, 계약의 중도 해지 시 해지 시점까지의 보수 정산 방식 등이 들어가야 합니다. 위와 같은 내용들이 ‘그때그때 당사자 사정에 따라’ 같은 막연한 말이 아니라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제대로 된 계약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열정페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근로자로서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보조작가가 근로자로 인정받을 경우, 최저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휴수당, 휴게 시간, 초과근무수당, 퇴직금은 물론이고 4대 보험의 혜택도 받을 수 있습니다. 2024년 1월 우리나라 대법원에서는 바로 이 ‘무늬만 프리랜서 계약’의 당사자가 근로자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주었는데요. 바로 그룹 신화 멤버 앤디의 배우자인 이은주 아나운서가 KBS를 대상으로 근로자지위를 인정해달라고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원고의 승소 판결을 확정해준 것입니다. 대법원은 이은주 아나운서가 프리랜서 기상캐스터로 입사해 ‘인력 충원 또는 프로그램 개편 시까지’ 근무하는 것으로 계약하고 3년간 일하는 동안 1) 배정된 방송 편성표에 따라 지휘 감독을 받았고 2) 정규직 아나운서와 함께 사무실을 사용하며 동일한 업무를 했으며 3) 회의 참석, 사내행사 진행 등 직원이 할 만한 업무도 했고 4) 다른 방송국 프로그램에는 출연하지 않고 KBS에 거의 매일 출퇴근한 점을 보면 KBS에 전속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고, 2년이 지났으므로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도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 혹시 내가 ‘무늬만 프리랜서’인 것은 아닌지, 이 글을 읽으시는 보조 작가님들은 한 번 꼼꼼히 따져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