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유학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 (下)
‘프랑스’에서 그림 그리며 살아가는 삶

▲ 임성민의 〈다시 돌아오는 곳(Point Zero)〉 표지
임성민의 작품 역시, 만화를 배우러 프랑스로 떠난 유학생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정우’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그런데 유학생활이 만만치 않다.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벽에 부딪친다. “프랑스에 온 지 일 년 반 남짓. 프랑스 중남부 발랑스에 있는 미술학교에 입학”(임성민, 『다시 돌아오는 곳』, 이숲, 2022, 51쪽.)하지만 사실상 많은 것을 배우지 못한다. 그 이유는 발랑스에 있는 미술 대학 소속 교수가 만화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수가 직접 “만화를 그리겠다고 하면, 우리 학교는 도와줄 수”(위의 책, 60쪽.)없다고 말하니, 정우는 파리에 있는 다른 학교로 편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어렵게 편입한 학교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흥미가 떨어진다. “유럽 만화의 철학과 미학을 배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국의 입시 미술학원에서 배우는 것들을 가르치니”(위의 책, 60쪽.) 실망만 쌓여간다. 이러한 이유에서 정우는 자연스럽게 자주 학교에 빠지게 되고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 이처럼 프랑스 유학 생활은 여러 가지로 그에게 실망만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 유학 시절 정우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하나의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객관적인 시선과 태도이다. 이 작품은 큰 틀에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나는 프랑스에 정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이탈리아에 가고 싶었다. 유학원이 적은 탓에 헤매다가 프랑스에 왔다. 게다가 불어 점수가 낮아 지망 학교엔 원서도 못 넣었다. 절차는 촉박하게 진행됐고, 나는 내내 갈팡질팡 했을 뿐, 비행기 안에서 계속 생각했다. 내가 왜 프랑스에 가고 있지?”(위의 책, 29쪽.)
위 인용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는 유학을 위해 고려되지 않은 나라였다. 그래서 그가 만화 공부하러 온 프랑스는 “‘어쩌다 보니’”(위의 책, 32쪽.) 오게 된 나라였다. 자신이 가고자 했던 나라가 아니었던 탓이었는지 정우의 유학 시절은 많은 시간 흔들린다. 게다가 한국에서 온 아시아 ‘이방인’으로서의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고독하고 외로웠다. 그래서 그의 가슴 속에는 허전한 마음이 컷고 이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사랑을 하고 사람을 만났다. 정우의 워딩으로 적자면 “타지에서 편히 기댈 상대가 있다는 것은, 퍽 따스한 위안”(위의 책, 89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그가 외롭고 높고 쓸쓸함에 처했을 때, 당당하게 돌파하려고 하기보다는 불만을 품거나 도망치거나 매번 기댈 상대를 찾았다는 것이다. 물론, 기댈 사람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것이고, 기대는 과정에서 힘 있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대는 것에 익숙해졌고, 이런 익숙함 속에서 정작 소중한 것을 놓치게 된다. 다른 방식으로 말해 임성민의 이 텍스트는 소중한 것을 어떻게 잃게 되는지를 서술한 텍스트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이곳에서 내 생활은 너무 형편없었어요. 왜 여기 왔나 생각해 봤는데, 너무 막연했던 것 같아요. 그냥 만화를 배우려고... 막연했기에 생각했던 것과 다른 광경이 보이면 그저 불만만 가졌어요. 그리고 계속 도망치곤 했죠. 무섭거나 복잡한 상황을 만나면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도망...그게 안전해 보였거든요. 뒷일은 하나도 생각 안 하고. 게으르게 살면서 해야 할 일에 책임감도 못 느끼고 쓸데없는 고민에 사로 잡혀 기회와 사람을 놓쳤어요. 순간의 감정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필요 없는 용기를 내다가도, 정작 용기가 필요할 땐 아꼈어요. 그러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리고 이제 다시 용기가 필요할 때임을 느껴요. 이번에는 제대로 된 용기 말이에요. 늦었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위의 책, 226~227쪽)
프랑스 유학 생활이 너무나 형편없었다고 고백하는 이 장면에서는 자신이 왜 만화를 그리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남들보다 그림은 잘 그렸을지 몰라도 정작 만화에 대한 확신과 고집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매번 도망쳤다. 자연스럽게 만화에 대한 열정도 잃어버리고 소중한 유학 생활 동안 상당히 많은 시간을 허무하게 소비하게 된다. 프랑스 발랑스에 있는 미술학교에 자퇴하고 파리의 다른 학교로 편입해서도 동료 학생들이 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학교에 자주 결석했다. 그때 그의 친구 중 한 명은 “그래도 학교는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 비싼 돈 들여서 유학 왔잖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아깝지 않아? 이 새끼 배가 불렀네. 남들은 꿈도 못 꾸는 프랑스 파리 유학”(위의 책, 112~113쪽.) 이라고 강조한다.
친구의 이 말을 틀린 말이 아니다. 유학을 간다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탁월하게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국가장학금으로 유학 가는 것이 아니라면, 젊은 청년이 직접 등록금을 지불해 가며 그곳에서 생활하는 것은 만만치 않다. 어떤 방식이든지 지원을 받아야 생활이 그나마 편리해진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친구는 정우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라며 다소 비아냥거리듯 비판한다. “무책임하게 살 거면 한국으로 돌아가....어중간하게 할 거면 뭐하러 여기 왔냐. 어중간한 새끼니까 만화나 그리고 있지”라고 말이다. 이 친구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유학 생활이니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만화’ 따위가 무슨 예술이냐고 비판한다. 모든 것을 걸고 그림을 그리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동경일일』(2024)에 등장하는 편집자와 만화가들의 입장에서는 이 발언이 기분 나쁠지도 모른다. 정우에게도 만화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점에서 불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니 어떻게 하랴. 만약에 정우가 프랑스 유학 시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동료들에게 보여주었다면, 만화를 그리는 사람 역시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의미 있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인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가가 되고 싶었어. 알다시피 나는 여기서 태어났잖아. 부모님이 파리에서 자리를 잡으려고 열심히 일하셨는데도 항상 형편이 어려웠어. 그림 그리는 직업을 갖고 싶어도 배울 기회가 없었지. 결국 지금의 나를 봐 식당 매니저나 하고 있잖아. 그냥 네가 조금 더 열심히 했으면 해, 공부할 수 있는게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말야(위의 책, 113쪽)
그가 만난 또 다른 사람이 있다. 파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 만났던 식당 지배인이다. 그 역시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해 응원한다. 그것이 비판이든 애정 섞인 목소리든 정우가 공부하는 유학 생활이 특별하다는 의미일 테다. 프랑스 유학이 특별하다기보다는 온전히 자신에게만 시간을 쏟는 시간 자체가 값지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건
그러던 정우에게 우연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 사건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가 프랑스 유학 시절 겪었던 과정에서 찾을 수 있었던 소소한 흔적들이었다. 우선, 정우는 프랑스 발랑스에 있는 미술 대학에서 자퇴하고 프랑스 파리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을 때, 발랑스에서 함께 예술을 하던 친구를 만나게 된다. ‘마르탱’과 ‘부루노’와 ‘루이’가 그들이다. 자퇴하고 파리로 가 4년 만에 다시 발랑스를 찾았으니 이들의 상황과 입장도 많이 달라져 있다. 그중에서 과거에 함께 작업하던 어떤 한 친구가 정우처럼,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유는 ‘아이’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내 보물 같은...레아가 태어났으니까“(위의 책, 190쪽.)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일해서 돈을 벌어 가정을 책임져야 하니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레아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 참 행복하니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삶에 대해 후회한다거나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족해한다. 친구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 질투가 나는 것이 아니라 응원해 주고 싶다고 애정 있게 말한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교육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의 장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교육’에만 의미를 두는 것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지적한다. 정우를 향한 말이었다. 정우는 이런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바라보게 된다.
또 다른 사건은 정우의 애인 민희의 사촌 언니 부부와의 만남이다. 이 두 부부는 ”유기동물 보호센터를”(위의 책, 115쪽.) 운영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정우 역시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문득 보호센터를 운영하면서 생활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밥벌이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러자 보호소 일은 일대로 하면서 대리운전도 한다는 말을 듣는다. 나라의 지원금만으로는 운영이 불가능하니 그렇다. 한마디로 말해 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니 견딜만하고, 무엇보다 뿌듯하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정우에게 한마디 한다.
“항상 직진만 해서 갈 수는 없더라. 빙 돌아 가면서도 의심하지 않는 마음을 잊지 않고 싶어”(위의 책, 130쪽.)
정우는 이 말을 귀담아 든는다. 마지막으로 정우에게 자극을 준 사건은 그의 사랑하는 애인이었다. 학창시절 만났던 ‘은서’, 프랑스 파리에서 만났던 ‘민희’에게 정우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두 번 다시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아무래도 프랑스 유학과정에서 만났던 사람들 덕분이다. 자신은 방황하며 서투르게 유학 생활을 했지만, 그들은 나름 최선을 다해 삶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정우는 이런 평범한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그는 다시 만화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 〈포인트 제로〉 192, 193쪽.
창작 방법론
임성민의 『다시 돌아오는 곳』은 ‘알려두기’에서 “이 만화는 픽션입니다. 실존 인물, 사건과 무관합니다.”라고 적혀있지만, 일정 부분 자기 고백적인 성격이 강한 텍스트이다. 그러니 이 텍스트에서 ‘그림을 그리는 법’에 대해 다룬 부분은 임성민 개인의 시론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우선, 그는 “수채화”로 만화를 그린다. 최근 윤도아가 글을 쓰고 임성민이 그림을 그린 〈겨울의 글쓰기〉의 경우 온전한 수채화 풍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수채화처럼 잔잔하게 그림의 형태가 펼쳐진다. 아마도 수작업이 아닌 기술적인 도움을 받아 작업 되었기 때문에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도 그만의 작법이다. 나아가 이 텍스트는 과거와 현재를 오고간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시간을 흑백으로 현재의 시간을 칼라로 설정한다. 다른 만화가들에게서도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기법이다. 시간을 나누는 데 있어서 색의 변화는 유리한 연출이니 그렇다. 이 부분도 독자들이 눈여겨보면 좋다. 만화가 이정우가 이 텍스트에서 색을 통해 칸과 칸의 유기적인 연출을 어떻게 구현해 내는지 자신의 작업에 응용해 보면 좋을 듯하다.
“우린 남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이잖아. 앞으로 어디서 누굴 만나고, 어떤 일을 겪든... 그 모든 게 우리의 이야기를 꾸며줄 거야.”(위의 책, 109쪽.)
정우의 애인으로 나오는 민희는 영화를 전공하는 사람이다. 그림 그리는 사람과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텍스트가 프랑스 유학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로 채워진다는 점에서 창작자에게 ‘경험’은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책을 통해 간접 경험하거나 과감하게 ‘상상’하는 것도 작품에 도움이 되겠지만, 만남을 통한 진실한 깨달음이 전제된 경험이 더 중요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창작자를 각성하게 만들 수 있으니 그렇다. 나아가 이 텍스트에는 직접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구절을 찾을 수 있다.
“크로키는 눈앞에 보이는 오브제를... 보이는 대로 그려내는 게 중요하다고 배웠어요. 지금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것을 표현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그 이상의 관찰과 분석은 오히려 습관과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종국에는 보이는 대로 그린 그림이 아닌, 보고 싶은 대로 그린 그림이 되고 만다고요.”(위의 책, 214쪽.)
이 구절 또한 의미심장하다. 오브제(objet)를 그리는 데 있어서 잘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대로 그려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습관의 형태로 “보이는 대로 그린 그림이 아닌, 보고 싶은 그림”을 그린다. 이는 매우 중요한 발언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의 눈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믿고자 하는 형태로 세상을 응시하니 말이다. 그런데 바라보고자 하는 대로 응시하는 태도가 눈의 시선뿐이겠는가. 특정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 역시 다른 여러 세계관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수용하지 못한다. 태양계와 같은 무수히 많은 은하수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태양계가 우주 전체라고 믿는 태도가 이에 해당된다. 이처럼 하나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자 모순이다. 하지만 성장하기 위해서는 내가 보고자 하는 것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통해 ‘차이’를 생성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 방식이 독서의 경험일 수 있고, 신체적인 경험일 수 있고, 슬픔일 수 있고, 유학의 경험일 수 있고, 죽음의 경험일 수 있다. 경계해야 할 것은 나만이 시선이 옳다고 믿는 태도일 것이다. 그림 그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나를 지우고 타자를 받아드려야 한다.
임성민은 만화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이다. 친구들이 정우에게 어떤 장르를 준비하냐고 물었을 때, ‘드라마’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만화로 ‘드라마’를 재현한다는 말일 테다. 그런데 정우의 이런 말에 친구들은 만화로 드라마를 재현하기에는 미흡하지 않냐고 묻는다. 영화의 형태가 오히려 ‘드라마’에 적합하지 않냐고 묻는다. 그럴 때 정우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런 만화를 못 보셔서 그런 거 아닐까요? 만화로도 충분히 울림을 줄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해요. 저는 보편적인 정서를 표현하고 싶어요. 조금 역설적인 말이지만... 너무 공상적이고 과장된 만화는 싫더라구요. .만화로도 평범한 얘기를 재밌게 할 수 있는데... 뭐 아무튼, 그런 만화를 그려요.”(위의 책, 67쪽.)
여기서 정우의 입을 통해 공상적이거나 과장된 만화를 지양하고 ‘평범한 얘기’로 작품을 꾸리는 것이 좋다고 발화되었을 때, 만화가 임성민의 창작 방법론이 소개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바뀔 수도 있지만, 현재는 ‘평범함’ 속에서 이야기를 찾으려고 한다. 이야기를 만든다고 했을 때, 무엇인가 새로운 사건과 사고를 찾는 경향이 있다. 때론 독특한 이야기나, 경험해 보지 못한 산뜻한 세계관을 상상할 수 있다. 이 방법으로 만화를 그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령, 노경무가 글을 쓰고 쏘키가 그림을 그린 『안할 이유 없는 임신』(파란거인, 2023)의 경우, 남자가 임신이 가능하다는 설정을 통해 다양한 사회의 부조리를 문제 삼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재치 있는 상상보다도 임성민은 보통의 삶에서 가능한 사건과 경험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하는 창작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방법론은 주변을 섬세하게 응시하는 시선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대목을 인용하고, 개인적인 입장을 적는 것으로 끝내기로 한다. 그것은 바로 임성민의 ‘만화론’과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정우의 애인은 묻는다. “오빠는 왜 만화를 그려요”라고 말이다.
처음 같이 그림 그렸던 날, 그때 오빠가 좋은 크로키에 대해 얘기했잖아요. 그럼 좋은 만화는 어떤 만화예요? 만화의 가장 큰 매력을 대라고 하면.... ‘칸’ 인 것 같아요. 그 네모난 칸이요? 네, 칸이요. 칸의 크기, 형태, 칸 사이의 거리, 칸의 개수와 배치를 통해서 이야기에 긴장을 주고 또 이완시키죠. 칸 속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것 같은 누군가가 어느새 다음 칸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기도 하구요. 모든 이야기는 삶을 닮았거나, 삶과 닮아야 해요. 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누군가의 삶의 단면을 하나씩 그려 모아 앨범 속에 나열하는 과정과도 같죠. 우리가 공원에서 크로키 했던 사람들은 언젠가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집에서 가족과 식사하고, 또는 연인과 사랑을 나누고 아니면 몸을 움크린 채 이불에서 홀로 잠들지 모르죠. 좋은 만화는 그들을 위한 액자를 준비했을 때, 그리고 그들의 삶을 담기 알맞은 액자를 골라냈을 때 그려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까 좋은 만화를 그리려면 충분한 숫자의 빈 액자를 늘 준비해야 하고, 또 누군가에게 빈 액자를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겠죠. 그 모든 걸 앨범처럼 그려 모아 선물할 애정도 필요할 거구요....(위의 책, 234~235쪽.)
젊은 만화가 임성민은 말한다. “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누군가의 삶의 단면을 하나씩 그려모아 앨범 속에 나열하는 과정”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 과정은 네모난 칸과 칸 사이에서 발생하는 유기적인 마법이다. 칸의 크기와 형태, 칸과 칸 사이의 거리와 긴장, 칸의 개수 등으로 연출되는 하나의 거대한 상상 속 상자일 테다. 이런 연출이 누군가의 “삶을 닮았거나, 삶과 닮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삶 자체가 하나의 은유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일 테다. 여기서 ‘은유’는 칸과 칸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 자체일 수도 있겠다. 따라서 그의 만화는 앞으로도 큰 굴곡 없이 포슬포슬한 인간의 ‘삶’을 노래할 가능성이 높다. 그는 앞으로 어떤 삶을 그려낼까. 그의 여정이 아름답게 빛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