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작가들에게 그림 그리는 것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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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만화가, 우리들의 편집자 (上) - 세 가지의 키워드

만화 작가들에게 그림 그리는 것이란? 4화

2024-09-29 문종필

우리들의 만화가, 우리들의 편 (上)

 - 세 가지의 키워드

<동경일일> 1~3권 표지

  마츠모토 타이요(松本大洋)<동경일일>은 시오자와라는 우직한 편집자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은 단단한 만화가들의 이야기이다. 시오자와는 이 만화에서 동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아둔한 사람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그 어떤 편집자보다도 만화를 사랑하고 만화가를 존중하는 믿음직한 편집자로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맡고 있던 잡지 코믹밤이 폐간하게 되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만들고 싶은 궁극의 만화책을 만들기 위해 만화가들의 만화가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닌다. 타치바나 레이코, 아라시야마 신, 키소 카오루코, 니시오카 마코토, 이이다바시 미치코, 카에루, 네코야마 쿠모타로, 미키 마루조 등의 만화가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무슨 이유로 매력적일까. 악당을 물리쳐야 끝나는 게임과 같이 시오자와가 만화책을 만들게 되면 이야기가 끝나게 되는 식상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윤을 추구하는 획일적 만화와 구별되는 진정한 만화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생각할 때 돈이 되는 만화가 좋은 만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화가의 입장에서 자신이 만든 만화로 돈을 벌 수 있다면,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챙겨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부를 통해 소외된 존재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그린 만화를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면, 그 돈으로 걱정 없이 작업을 꾸준히 이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돈에 대한 부정은 어리석어 보인다. 만화를 통해 돈을 버는 것을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만화가들이 만화를 통해 돈을 버는 것이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이윤을 추구하는 만화을 추구하는 분위기에 대해서는 잠시 멈춘 채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너무나도 자명하다. 이윤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어지다 보면 만화의 톤도 색깔도 그림도 하나의 표정만을 닮아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대중의 눈높이를 폄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적을 향해 만화가들이 매달리다 보면 다양성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이는 개성이다. ‘차이가 없는 작품은 아무리 재미있는 요소로 채워진다고 한들 빛나지 않는다. 오히려 역겹게 다가온다. 자본은 이처럼 개성을 중시하는 만화의 결을 쉽게 고장 나게 한다.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다양한 취향과 성격이 공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만화 역시 다양하게 소비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역시 맹목적인 자본의 선망으로 인해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이윤만을 추구하는 시대적 경향은 지양되어야 할 사회적 흐름이다.

<동경일일> 1150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이윤을 추구하지 못하는 작품을 그리는 만화가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에게는 독자도 없고, 응원해 주는 사람도 많지 않다. 영혼을 담아 자신의 작품을 그린다 한들, 독자가 없다면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의 만화를 찾아주는 평론가나 편집자도 없다면 그는 만화를 계속해서 그릴 수 있을까. 그러나 진정한 만화가들은 이런 시대의 짓눌림에 호락호락 흔들리지 않는다. 지쳐서 쓰러지겠지만 주저앉지 않는다. 어렵고 지독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작업을 꾸준히 이어 나간다. 아르바이트하면서 시간을 쪼개 만화를 그리고, 회사원으로 힘든 일상을 보내는 과정에서도 틈만 나면 만화 작업을 이어 나간다. 편집자 시오자와는 그런 만화가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원고를 받기 위해 전국을 떠돈다. 물론, 그가 만든 만화책이 잘 팔리지 않더라도, 시오자와의 용기로 인해 만화가들은 사람들에게 잊지 않고 기억된다. 어떤 방식이든지 후대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무용하지 않다.

  <동경일일>과 관련해 매체 변환도 함께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유독 <동경일일>에서는 매체변환과 관련해 기성세대 만화가의 현재 위치가 위태롭다고 이야기된다. 많은 사람이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다시피 동시대는 1990년 후반부터 웹 문화로 인해 과거의 익숙한 패턴들이 바뀌게 되었다. 이는 만화뿐만 아니라 당대의 모든 예술이 기술의 진보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는 시대의 운명이기도 했다. 가령, 문학의 경우에는 활자로만 독자들에게 읽히는 것이 정설이었지만,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등의 신기술의 발명으로 종이로만 읽히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문자의 만남으로 인한 공진화(共進化)’는 필연적인 사회가 되었다. 가령, 오봉옥 시인은 은유의 세계관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시()를 기술의 도움을 받아 웹툰으로 제작해 독자들과 직접 소통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학은 언어로만 대결해야 한다는 자존심마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의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물론, 활자 언어는 언어 자체가 추상적인 기호라는 점에서 문자 그대로 유용한 발명품임을 부정할 수 없고, 종이와 펜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예술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도 문학의 효율성과 가치를 외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 발전으로 인해 언어가 다른 기술과 만나 새롭게 확장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진의 역사에서 초기 사진의 위치와 후기 사진의 위치가 극명하게 갈리듯이 기술에 의한 접촉과 확장은 우리를 다른 곳으로 움직이게 한다.

  만화 역시 마찬가지다. 만화책으로 읽던 시대에서 어느덧 웹툰을 읽는 시대가 되었다. 요즘은 오히려 책으로 만화를 소비하는 사람이 구시대적인 사람으로 비친다. 그러니 만화를 누리는 세대가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학교에서 학생들과 만날 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데, 새 학기 때 만나는 학생들에게 출생 연도를 물어봤을 때, 들려온 출생 숫자는 이미 웹 문화가 자리 잡거나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고 있었던 시기와 겹친다는 점에서 세대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된다.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만화책이야말로 오히려 낯선 매체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새로운 세대는 매번 구시대가 품은 관념이나 신념을 벗어나고자 했다는 점에서 종이 만화책 세대가 품은 믿음은 오히려 부정되어야 하는지 모른다.

<동경일일> 2163

  그러나 <동경일일>에 등장하는 우리의 편집자 시오자와는 을 만드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직접인용을 해보자면 디지털 시대라는 이름의 파도를 거스르는 아날로그 진흙 배”(2:163)인 것이다. 그리고 시오자와가 찾아가 만화책을 구상하려는 만화가들은 아날로그 방식으로 작업하는 퇴물 만화가”(2:163)인 것이다. 그렇다면 <동경일일>을 연출한 만화가 마치모토 타이요는 시오자와라는 인물을 통해 아날로그 방식으로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들을 주목하는 과정에서 이 시대에 우리가 그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눈물 나는 드라마와 웃음기 있는 풍자를 적절히 배합해 의도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시오자와는 조금은 고지식하고 답답한 면이 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성실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 인물의 답답한 면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디지털에 적응하지 못하지만, 진정성 있는 아날로그인간을 재현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예비 만화가들은 이 지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세대가 바뀐다고 해도 만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동경일일>에서 기억해 두어야 할 또 다른 지점은 사람들에 대한 만화의 인식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편집자 리리코는 시오자와가 회사를 퇴사하기 전 담당하던 만화가 아오키를 맡게 된다. 만화가 아오키는 젊은 만화가로 광기가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로 따지자면 마이클 그랜디지 감독의 지니어스(2017)에서 주드 로가 연기한 천재 소설가 토마스 울프와 비슷한 인물이다. 만화를 그리는 데도 탁월한 감각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인기가 있으니, 자신감이 넘친다. 그런 그가 편집자가 바뀌자, 깽판을 벌인다. 아무래도 익숙함을 바꿔야 하니 창작자로서 불안한 것이겠다. 그런 그가 불만을 토로하면서 말하는 목소리에는 만화에 대한 편견이 잔뜩 담겨 있다. 사실은 저문예지를 만들고 싶었어요.’라고 말하는 부류의 편집자”(1:46)가 리리코라며 비아냥거린 것이다. 이 말은 문예지를 만들고 싶었지만, 경쟁에서 밀려나 만화 편집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아오키가 생각하기에 새로운 편집자는 만화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일 테다. 맥락이 어찌 되었든지 이 문맥 속에는 만화는 중심에 놓인 장르가 아닌 주변 장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경일일> 3163

  <동경일일> 322‘5, 서점에 인사를 돌다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어렵지 않게 반복된다. 시오자와는 자신이 만든 만화책을 팔기 위해 여러 서점에 돌아다닌다. 동시대에 책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SNS를 활용하거나 인스타 광고를 통해 책을 판매하는 것이 유리하지만 시오자와는 직접 발로 뛴다. 이런 과정에서 북스츠바키라는 서점에 들르게 되고 그곳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 대화에서도 만화에 대한 편견을 확인할 수 있다. 노인은 말한다. “여기에 아내와 둘이서 가게를 차린 게 1970년이었는데, 아들이 아직 어릴 때였죠. 먼저 떠난 아내는 소위 책벌레였는데... 만화 같은 불건전한 책은 안 들여놓겠다고 하지 뭡니까”(3:163)라고 말이다. 소위 책벌레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여기서 은 인문학 서적이나 검증받은 소설이나 시집을 말하는 것이고, 불건전한 책은 만화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노인은 만화 중에서도 아내가 수긍할 만한 작품을 찾기 위해”(3:163) 노력했다고 고백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목에서는 모든 만화가 불건전한만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화 안에서도 무엇인가 영혼이 있는 만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이 텍스트에서도 만화는 특정한 시기에 좋지 않은 텍스트로 독자들에게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동경일일>의 시오자와는 이런 만화가와는 대척점에 놓인 의미 있는 작품들을 찾아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화가 일개 놀이에 불과하다고 인식되던 시대에 그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만화를 그렸던 진정성 있는 만화가들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이 지점이 흥미로운 것은 2024년 동시대에 만화를 그리는 것과 책방이 처음 운영되었던 1970년대에 만화를 그리는 것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웹툰 IP의 확장으로 인해 만화의 가치가 치솟는 시대에 만화를 그리는 것과 불건전한 대상으로 만화가 치부되었던 시대에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물론, 어떤 시대든 절박한 것이 없지 않고, 시대라는 것도 상대적이기에 시대의 무게를 함부로 논할 수 없지만, 만화가 부정적으로 인식되던 시대에 만화가로 산다는 것은 조금은 다른 문제이다. 어찌 되었든 <동경일일>의 주인공 편집자는 이런 만화가들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전국을 돌고 돈다. 독자들은 만화가 질 낮은 저렴한 텍스트로 인식되던 시대가 있었고, 이 관성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이상으로 <동경일일>을 읽는 데 필요한 세 가지 키워드에 관해서 확인했다. 이윤만을 추구하는 만화와 그렇지 않은 만화 중 무엇이 좋은지에 대한 것과 매체변환으로 만화 창작의 방향이 변화되었다는 것과 과거에는 만화가 지독하게 형편없는 텍스트로 치부되었다는 것이다. 예비 만화가들은 이런 세계관을 깔고 시작하는 만화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하나는 상업성과 예술성을 어떻게 조율하고 이해하고 표현할지에 대한 고민이다. 이 만화에서는 이 지점이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진다. 왜냐하면 어떤 만화가는 팔리는 만화를 그릴 수 있어서 만화가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고, 어떤 만화가는 지독하게 자신의 작업을 고집한 나머지 고독하게 고립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더 나은 삶인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이 텍스트를 읽고 있는 예비 만화가들은 앞으로 선배들이 해왔던 고민을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것은 창작자의 운명이다. 이 문제는 비단 만화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동시대의 예술이 품고 있는 난해함이다. 두 번째는 매체 전환과 관련된 것이다. 이 부분도 이제는 너무나 상투적이기에 더는 반복하고 싶지 않지만, 웹과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한 지가 20~30년 전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우리 시대는 웹 문화에 적응한 시대와 그렇지 못한 세대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자명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면 어떤 방식이든지 자신의 창작 작업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세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양한 독자와 시대를 이해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만화에 대한 편견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만화에 대한 편견은 동시대의 다양한 작품에서도 여전히 확인된다는 점에서 만화의 위치를 창작자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작업한 장르가 누군가에게는 형편없는 장르로 취급될 뿐만 아니라, 이런 편견을 벗어나야 할 것 같은 강박을 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때론 강박감이 조금은 더 나은 흐름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런 희망의 메시지보다는 주변 사람들이 바라보는 만화의 위치를 냉정하게 예비 창작자들은 바라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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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필

글쓴이 문종필은 평론가이며 지은 책으로 문학평론집 〈싸움〉(2022)이 있습니다. 이 평론집으로 2023년 5회 [죽비 문화 多 평론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밖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만화평론 공모전 수상집에 「그래픽 노블의 역습」(2021)과 「좋은 곳」(2022)과 「무제」(2023)을 발표하면서 만화평론을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