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有名)과 무명(無名) 사이 (上)
- ‘강박’과 ‘허기’와 ‘실수’
예술가들에게 무명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 누구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예술가로서 창작행위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인정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니 그렇다. 그래서 예술가에게는 인정의 대가가 어떤 방식이든지 지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시들하게 식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방식이든지 ‘인정’은 채워져야 한다. 채우는 방식은 예술가마다 각자 다르겠지만, 채워지지 않으면 예술은 지속될 수 없다. 그런데 무명 작가들에게는 이런 바람은 사실상 사치와 다름없다. 그들은 인정 욕망을 바랄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정을 바라기보다는 우선 특정한 예술가 집단에 어떤 방식이든지 얼굴을 내밀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신인 작가가 존재한다고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려야 하니 인정은 그다음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쉬운 일인가. 이것 또한 쉽지 않다. 어디든 쉬운 일이 있겠느냐마는 예술가가 자신을 알리는 것은 모험과 도전 정신이 필요하다. 특정 예술가 집단에 기존과는 다른 자신만의 색이 있음을 알려야 하고, 이런 시도가 단순한 작가의 ‘의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은 물론 예술가 동료들에게도 설득해야 한다. 그러니 인맥도 배경(Back Ground)도 학벌도 형편없다면 더욱 곤혹스럽다. 게다가 나이도 많다면 그는 이름을 알리기는커녕 주변의 편견으로부터 손쉽게 밀려날 확률이 높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특정한 예술가가 지독하게 정치적이어서 시대의 주류가 누구인지 잘 볼 수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이도 학벌도 크게 문제 되지 않겠지만, 선량하고 소심한 창작자들의 경우는 자신의 예술과 의도와는 무관하게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밀려 나가는 것이 이 동네의 현실이다. 그러니 무명 예술가는 서럽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명 예술가가 바보처럼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법은 없다. 그에게는 그 누구의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만의 예술이 있고, 이 예술로 자신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어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자신의 ‘예술’을 통해 부조리한 사람들과 시대에 맞서려고 한다. 아무리 공모전 심사가 부조리하다고 해도, 심사위원이 교체되지 않은 채 매년 같은 심사를 반복한다고 할지라도, 이미 판이 짜인 부조리한 환경에서 심사가 진행되더라도, 우리의 무명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갈고 닦는 과정에서 이들의 편견마저 바꿀 수 있는 진정한 작품을 만들어 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무명 예술가는 그 어떤 예술가보다 독과 자신감이 충만하다. 반면에 특정한 예술가가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고 자신이 속한 예술가 집단을 잘 알고 있어서 인맥이 두터운 사람이라면 그는 예술가로서 가져야 하는 독기가 무명 작가들보다 덜 절박할 수 있다. 나이가 점차 들게 됨에 따라 그는 직접 작품을 읽지도 않고 주변 사람들의 입소문에 휘둘려 놀아날 확률이 높을 뿐만 아니라, 이런 긴장 없는 삶 속에 자신의 작품마저도 서서히 긴장을 잃어 간다. 하지만 무명 작가는 역설적으로 이런 경험에서 유리하다. 오로지 ‘작품’ 하나만을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자유가 있다.

△ <그랑 비드>, <배부르지 않아 배부르잖아>, <지니어스> 표지와 포스터
레아 뭐라비에크의 <그랑 비드>(이숲, 2023)는 이런 세계관을 그 어떤 텍스트들보다도 잘 담아 놓았다. 물론, 국내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쉽기는 하지만 그녀는 이 텍스트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현대인을 ‘불안’을 그 누구보다도 잘 담아 놓았다. 하지만 이 불안의 형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억척스럽거나 이러면 안 될 것은 같은 풍자의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자신과 이름이 같은 ‘마넬 나에르’가 사람들에게 가수로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인기를 얻어 명성을 얻게 되자, 자신의 이름으로는 그녀와 동일하게 명성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괴로워한다. 아무리 자신이 노력한다고 해도 교환 불가능한 ‘단독자’로서의 ‘마넬 나에르’를 기억해주는 것이 아니라, 유명 가수인 마넬 나에르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명인 그는 어떤 방식이든지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치욕을 견디는 일이다. 즉, 타인에게 따귀를 맞음으로써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수치심과 관련된 것으로 부끄러운 것이기도 하고 창피한 것이기도 하겠다. 누군가에게 감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인공 ‘마넬 나에르’는 이런 감정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도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한다. 이런 처절함이 우리 ‘현대인’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SNS를 이용해 자신의 행보를 공개적으로 선전한다. 학회에 가서 무엇을 발표했는지 올리기도 하고, 자신이 요즘 보는 책과 영화가 무엇인지 올리기도 하고, 자신의 신간이 출간되면 애정을 담아 올리기도 한다. 유명인과 찍은 사진과 담고 싶은 풍경을 올리는 것은 기본이다. 따라서 어떨 때는 어떤 방식이든지 칭찬받기 위해 애쓰는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순간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다. 최근 나의 인스타 계정에는 특정 매체에서 연재하고 있는 〈노동의 표정〉이라는 주제의 연재를 빠짐없이 공유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먼 훗날에 이 주제로 내가 글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있고, 이 주제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깊이 있는 논의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람으로 인해 누군가가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청탁을 해주거나, 좌담에 초대해 주거나 학회 발표 요청을 해줄 수 있다는 기대와 바람의 심정도 담겨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SNS를 통해 ‘나’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작은 명성이나마 얻기 위해 강박적으로 홍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풍경이 나만의 전유물일까. 그렇지 않다. 물론, 굳이 자신을 SNS에 표현하지 않아도 괜찮고, 이미 너무나도 단단한 상징을 가진 예술가들은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말처럼 가진 게 아무것도 없거나 결핍된 존재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 누구도 자신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이런 방식이라도 동원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시대의 ‘강박’일 수 있고, 2000년대 초반에 활기를 띠기 시작한 웹 문화에서 파생된 자연스러운 기술의 진보적인 풍경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과거에는 자신의 예술 행위를 알리려면 스승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거나, 조촐한 낭독회를 갖거나 했다면, 요즘은 그런 루트를 선택하기보다는 익명의 독자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려는 현대인의 산듯한 마음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레아 뭐라비에크의 <그랑 비드>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것들을 제공해 준다. 무엇보다도 이 텍스트는 비유와 상징이 일품이다. 그러니까 시대의 강박적인 ‘불안’을 선과 곡선으로 환원해 표현한다. 이 텍스트에 그려진 수많은 간판 그리고 그 간판들에 색칠해져 있는 화려한 흔적들은 바로 현대인의 욕망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욕망은 부끄럽고 불손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안타까운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보가 바로 무명 예술가들의 시작을 알리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아무것도 없는 무명 예술가들에게 어떻게 보면 SNS야말로 구세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고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기대지 않아도 정정당당하게 SNS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작품이 쓸모가 있다고 뽐낼 수 있기 때문이다.

△ <배부르지 않아 배부르잖아> 52쪽
이와 관련해 최근에 읽은 작품으로는 조성환의 <배부르지않아 배부르잖아>(미메시스, 2024)가 있다. 이 텍스트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채워지지 않는 허기진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는 어린 시절 가족 없이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런 정서적인 허기가 그녀를 쉬지 않고 먹게 한다. 정서적인 허기와 먹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만화가는 이런 연출을 통해 아무리 채워 넣어도 채워질 수 없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에 대해 질문하고 이런 질문 속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 인물 중의 한 명이 직업이 소설가인 남자의 등장이다. 즉, 그 여자를 사랑하는 소설가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새로운 사건과 만나게 된다. 그는 그녀의 이러한 ‘허기’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에 곁에서 여자와 함께한다. 그들은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사랑을 나눈다. 시간이 흐르자 아기를 갖기로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여자는 더는 허기를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새로 생긴 아이로 인해 채워진 것 같은 허기는 또 다른 방식의 허기를 낳게 되고, 이로 인해 여자는 채워야 할 새로운 무엇인가를 다시 찾게 된다. 이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텍스트는 예술가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이 글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무래도 욕망의 순환일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갈구해도 채워질 수 없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일 수 있고, 이런 욕망에서 손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가여운 이야기일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인간은 더 많은 것을 탐하려거나, 더 많은 것은 내 것으로 소환해 내고 싶어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몸의 한 곳이 병들거나, 이제는 글이 써질 수 없는 단계까지 밀려 나가고서야 뒤늦게 자신이 쫓고자 하는 욕망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안타깝지만 욕망을 굴레라는 것은 이처럼 허무한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 깨달았다면 그는 그래도 운이 좋은 경우다. 어떤 이들은 이 욕망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줄도 모르고 발악하며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다가 스스로 분쇄되기도 한다. 이는 극도로 불편한 영화의 종말과 닮았다.

△ 영화 <지니어스>의 한 장면
신인 작가에게도 이런 시선과 잣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이름과 작품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게 되지만, 이런 욕망이 채워진다면 그는 점점 더 크게 바라게 될 것이고,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괴물이 되기도 할 것이다. 어떨 때는 이런 욕망으로 인해 자신의 작품을 망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행착오 역시 어쩌면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것일 수 있다. 매사 지혜롭게 살기 쉽지 않고, 역설적으로 오히려 실패할 때, 더 나은 삶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마이클 그랜디지 감독의 영화 <지니어스>(2017)에서 주드 로가 연기한 천재적인 소설가 토마스 울프가 그이다. 토마스 울프는 이 영화에서 처음에는 천재 소설가로 등장하다가 어느 정도 명성을 얻게 된 이후에는 당대 최고의 소설가로 간주된다. 그 이후에는 다소 위축되었던 과거 자신의 모습과는 달리 조금은 더 당당해지고, 조금은 더 자신감 있고 과감하게 거침없이 주변 사람들을 만난다. 하지만 그에게 이것은 독이었다. 무명 작가에서 유명작가로 성장하게 되는 과정에서 주변 동료들에게 실언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발언에도 당당한 예술가의 자신감과 진실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갑자기 자신에게 도래한 ‘인정’에 대한 과부하로 인해 무마된다. 영화에서 이 ‘과부하’를 알려준 사건은 그와 같은 시기에 소설가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위대한 개츠비>로 유명한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이기도 하지만, 그에게 찾아온 고칠 수 없는 ‘병’이 자신을 온전히 되돌아보게 했다. 그는 죽음 앞에서 신인 시절로 돌아가 절박했던 자신을 다시 응시하게 된다. 이 소설가는 뒤늦게 깨달아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지만, 이런 실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여러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그는 죽는 순간에 자신의 편집자였던 당대 최고의 편집자였던 맥스 퍼킨스에게 아래의 편지를 띄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막을 내린다.
맥스에게
난 때가 되었어. 그래서 이 글을 자네에게 남기네.
긴 여행 끝에 낯선 곳에 이르렀고.
죽음의 망령과 마주하게 됐군.
그리 두렵진 않아.
하지만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자네를 다시 만나고 싶어.
뼈에 사무치도록 괴롭고 후회가 돼.
자네에게
전하지 못한 말들과
완성하지 못한 이야기들.
거대한 창으로 내 인생이 비치는 듯해.
이 병을 이겨낸다면
반드시
더 나은 사람이 될 거야.
자네처럼 살겠어.
무엇보다 자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었어.
난 자네 모습을 11월 그날의 느낌으로 간직할 거야.
자네가 항구로 날 마중 나왔었지. 우린 무작정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고.
도시의 전경과 소음 속에 인생의 찬란함을
내려다 보았어.
그대의 영원한 톰이.
여기서 “더 나은 사람이 될 거야”라고 말한 것은 죽음 앞에서 목격한 인간의 끝에 대한 겸손함 일 것이다. 또한 지난 시절에 대한 뼈저린 후회에 대한 아쉬운 고백일 것이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소설 쓰기에 전념하면서 모든 것을 걸었던 뜨거운 열정으로 인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수이겠다. 그렇다면 이 작품들은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미래의 창작자는 어떤 예술가가 되려고 하는가. 예술에서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하겠다. 딱히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 이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통해 조금은 더 나은 방향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는 있을 듯하다. 당신은 레아 뭐라비에크의 <그랑 비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대의 강박을 어떻게 뚫을 수 있겠는가. 조성환의 <배부르지않아 배부르잖아>처럼 채워지지 않는 인정 욕망이나 예술적 허기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마이클 그랜디지 감독의 영화 <지니어스>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것을 채우고 난 뒤, 찾아오는 허무함과 지난 시절의 후회를 어떻게 대처하겠는가에 관한 질문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질문들은 신인 작가들에게 사치일 수 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예술가들에게는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자 산이다. 우리는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점에서 살아가면서 어떤 방식이든지 죄를 짓거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실수나 죄에 대해서 우리는 몸부림을 떨어야 한다. 예술가는 그래야 한다. 이것이 작가의 윤리이고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