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검열과 선한 시대의 응시적 검열 (上)
- 시와 소설과 영화의 검열
자유는 억압에서 시작한다. 억압이 없다면 자유도 없다. 자유는 억압으로 인해 생명을 유지하는 기생 생물이다. 영화 <베놈>의 ‘베놈’이고 <기생수>의 ‘오른쪽이’이다. 그렇다면 억압은 좋은 것인가. 어떤 억압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개별적인 존재에게 제약을 가하는 것이니 딱히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누군가를 지배한 행위는 한 명의 인간을 비틀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부에서 제약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창작자들에게는 어떤 제약이 존재할까.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 만화가 이종철의 <까대기>, <제철동 사람들>, <힌남노> 표지
예를 들어 어느 웹툰 작가 지망생의 경우는 넉넉하지 않은 경제적인 사정으로 인해 제약을 받을 수 있다. 학비를 벌어가며 먹고 살아가는 그에게는 작품을 다듬는 시간이 현저히 부족해 여러 지점에서 제약을 받는다. 최근 <제11호 태풍 힌남노 – 재난이 휩쓸고 간 자리, 그곳에 남은 사람들>(보리, 2024)을 출간한 만화가 이종철이 신인 시절 고백의 형식으로 <까대기>(보리, 2019)를 그린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지방에서 올라온 만화가가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일터를 그리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여유가 있어서 자신의 작업에 온전히 모든 것을 투사할 수 있겠지만, 누군가는 이런 시간 자체가 귀중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웹툰이 생산되는 환경 자체도 제약일 수 있다. 조금만 더 자신을 수련할 시간이 있으면 좋으련만, 너무나도 치열한 작품 생산 환경으로 인해 탄탄한 작품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인 시간을 갖추지 못한 채 현장으로 투입된다. 그러니 온전한 작품을 짓고 싶은 만화가에게는 이런 분위기가 강압적인 제약으로 다가온다. 또한, 연재의 형식을 띤 공장식 웹툰이 자신에게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만화가로 데뷔하고 인기를 얻기 위해 억지로 이런 시스템에 몸을 맡기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시스템에 어울리지 않거나 남들보다 조금 느린 만화가에게는 공장식 창작 환경 자체가 제약일 수 있다. 어디 이뿐만이겠는가. 창작자의 개별적인 사연으로 인해 제약의 형태는 무궁무진할 수 있다. 이처럼 창작자들은 내부적이든 외부적이든 부조리한 외적 요인에 의해서든 어떤 방식이든지 제한받고 통제받고 끝내는 지배 받는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이런 제약보다는 작가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뚜렷한 ‘검열’의 형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검열은 무엇인가. 독자들도 이미 친숙하게 알고 있겠지만 검열은 힘 있는 집단이 창작자들의 작품을 살피고 조사하는 일이다.
1. 어떤 행위나 사업 따위를 살펴 조사하는 일
2. 군기, 교육, 작전 준비, 장비 따위의 군사 상태를 살펴보는 일.
3. 언론, 출판, 보도, 연극, 영화, 우편물 따위의 내용을 사전에 심사하여 그 발표를 통제하는 일. 사상을 통제하거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위의 사전적 의미 중 앞의 두 가지 형태는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특정 사업을 하기 위해 검열한다는 것은 사업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옳고 그름이 현격히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겠지만, 조금 더 나은 목적을 위해 감행되는 일이니 그럭저럭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검열의 형태는 이해하기 힘들다. 자체적인 기준을 정해 어느 집단이 사전에 심사하고 이 기준으로 언론이나 출판 연극 영화 등 당대의 창작물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목적이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집단이나 개인을 통제한다는 것은 한 개인을 구속할 뿐만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한 사회 집단 전체를 특정한 틀에 가두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치안’이라는 것이 누구를 위한 치안이냐는 것이다. 만약, 이 목적이 불순하다면 이 ‘치안’은 왜곡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이 대목에서 철학자 아도르노가 특정한 예술 작품은 사회의 대리물이 자 대리자(‘대리자’ 개념은 아도르노의 『문학론』의 일부에서 빌려온 것이다. 아도르노 연구자 문병호는 아도르노의 이 개념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예술 작품을 담지하는 예술가는 예술 작품을 산출하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고, 그의 작업을 통하여, 그리고 수동적이지만 적극적인 그의 활동을 통해 사회적 전체 주체의 대리자가”(문병호, 『아도르노의 사회 이론과 예술이론』, 문학과 지성사, 2001, 243~244쪽.)가 될 수 있다.)라고 한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대리자에 해당하는 예술 작품은 특정 사회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어느 한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그려낸다는 것은 개인의 작품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회의 한 풍경이자 표정을 담아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런 작품을 특정 집단이 심사를 거처 통제한다는 것은 개인을 통제하는 것을 넘어 사회 전체를 통제한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사회’를 통제한다는 것은 일반 ‘대중’을 감옥에 내모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감옥 안에서 우리는 표정 하나하나 세세하게 타자로부터 감시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는 건강한 사회일까.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알겠지만, 어렵지 않게 잘못된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건강한 사회라면 통제나 제재가 아닌 대화와 토론을 거쳐 제도나 법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식적인 생각이 지배적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흔적을 응시하는 과정에서 검열과 관련된 부조리한 장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나아가 이런 주제의 글, 즉, ‘검열’에 대한 내용은 무수히 많은 사람에게 문제 제기되어 왔고, 이런 문제의식으로 인해 상당 부분 많은 자료가 축적되어 있다. 그래서 새로운 이야기는 불가능할지라도 과거에 있었던 검열의 흔적과 새롭게 주목받는 동시대의 선한 검열(?)의 흔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시와 소설과 영화로는 부조리한 검열의 흔적을, 만화의 경우는 선하면서도 복잡한 검열의 형태를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처음으로 살펴볼 장면은 문학의 영역이다. 시인 김수영(1921~1968)에게는 미발표작이 있었다. 이 글을 읽는 창작자들도 알겠지만, ‘미발표’작이 특별할 필요는 없다. 개인적으로 작품이 덜 대어서 발표하지 못할 수도 있고, 오랜 시간을 공들여 만들어야 할 작품이기 때문에 조금만 더 신경 쓰자는 마음으로 다듬고 보완하는 과정에서 묵혀두었던 것이 미발표작일 수도 있다. 한 명의 창작자가 품고 있는 미발표 작에 대한 개인적인 사정이야 후대의 사람이 정확히 알 수 없겠지만, 의도와 목적이 뚜렷했을 뿐만 아니라, 용기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발표할 수 없었던 작품이 그에게는 있었다.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 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 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 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 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김일성만세(金日省萬歲)”」 전집
(김수영, 「“김일성만세(金日成萬歲)”」, 『김수영 전집1』, 민음사, 2018, 216~217쪽.)
그것은 바로 「김일성만세」였다. 그는 이 시를 쓰고 나서 발표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첫 시집 제목으로 삼아야겠다고 굳은 마음을 먹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그가 오래전에 쓴 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용기 내 이 시를 썼고, 세상에 발표하려고 했다. 동시대는 무수히 많은 매체뿐만 아니라 개인 블로그나 SNS 등을 통해 얼마든지 자신을 표현할 수 있지만, 김수영이 이 시를 발표할 당시인 1960년대는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이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용기 내 쓴 이 작품을 발표하는 순간 주목받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부당한 언론 탄압에 반기를 들고 싶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이 작품은 발표되지 못한 채 책상 서랍에 오랜 시간 묻히게 된다. 필자 또한 2009년에서야 전문을 읽을 수 있었다.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민음사, 2009)에 수록된 「김일성만세」를 그때서야 볼 수 있었다. 안타까운 사고로 시인 김수영이 죽고 난 이후,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그가 이런 작품을 썼는지조차 몰랐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작품을 ‘검열’과 관련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거론하는가. 감각 있는 독자들은 이미 눈치챘을 테지만, 김수영이 활발히 활동했던 1950~60년대는 반공이 국가의 무기이던 시절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적대감일 수도 있었겠지만,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분위기는 이 시대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담론 중의 하나였다. 그런 시대에 공산주의의 수장을 찬양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이 작품을 처음 본 출판사 동료는 제목을 바꾸자거나 발표하면 안 될 것 같다는 걱정과 우려(이 작품은 단순히 <언론자유>에 대한 고발장인데, 세상의 오해 여부는 고사하고, 현대문학지에서 받아줄는지가 의문이다. 거기다가 조지훈(趙芝薰)도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는가?…(중략)…이 작품의 최초의 제목은 「〇〇〇〇〇」. 시집으로 내놓을 때는 이 제목으로 하고 싶다.” 김수영, 「10월 6일」, 『김수영 전집2』, 민음사, 2005, 503쪽.)를 내보였다. 그만큼 시대의 검열과 제재는 창작자들에게 불안을 품게 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보다도 독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발표할 수 없었던 미발표작인 「김일성만세」를 어떻게 보관했느냐이다. 2009년에 공식적으로 세상에 선보이기까지 오랜 시간 어떻게 보관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누군가는 보관하는 것이 무슨 대수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 작품을 보관하기 역시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육필 원고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당대의 검열은 창작자들을 괴롭혔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시대가 존재했다. 그런 시대에 창작자들은 어떤 방식이든지 검열을 뚫기 위해 자신의 작품을 굴절시켰다. 그러므로 이 흔적은 중요하다. 어쩌면 이 작품은 고백할 수 없는 응어리를 용기내 발표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오래도록 사람들의 가슴에 남겠다.

△ 「“金日成萬歲”」 육필 원고 처음 부분
(김수영, 「“金日成萬歲”」,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 민음사, 2009, 476쪽.)
그런데 검열이 시문학에만 존재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시인 김수영에게 적용되었던 통제와 규율이 언론에 대한 ‘자유’라고 한다면 1990년대 소설가 마광수에게는 음란이라는 개념이 그를 통제했다. 그의 소설 『즐거운 사라』(서울문화사, 1991)가 문제 되었고 그는 끝내 검찰에 구속되었다. 역사는 이러한 사건을 부끄러운 촌극으로 일갈한다. “마광수의 죄는 ‘시대를 앞서간 죄’였다.”(강준만, 『현대사산책1990년대 1권』, 인물과 사상사, 2006, 192쪽.)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시대를 앞서간다는 것’ 자체이다. 즉, 특정한 시대에서 작용하는 시대적 기준이나 담론이 어느 시대든 존재하고 그 분위기가 사회적 ‘잣대’인 통제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일부의 창작자들은 그 틀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구속되고 벌받고 없는 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이 좋은 예가 될 듯하다. 이 텍스트는 흑인 노예제도를 SF 형식으로 비판한 소설인데 시대의 한계를 거론한 구절이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즉, 미래의 시간에 사는 주인공 다나는 과거의 시간에 살고 있는 루퍼스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헌신적으로 그를 도와준다. 하지만 그녀는 루퍼스를 온전히 믿지 못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도움을 받은 사람은 생명을 구해준 사람을 호의적으로 생각해 줄 수밖에 없다. 실제로 텍스트에서도 루퍼스는 다나에게 굉장히 호의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시대’ 앞에서 무조건적인 친절을 감히 바랄 수 없다. 다나가 “노예를 소유하고 거래하고, 자기 아버지처럼 고약해지진 않겠지만 결국 그 시대 남자야.”(옥타비아 버틀(각색 데이미언 더피, 그림 존 제닝스), 『킨: 그래픽 노블』, 박설영, 프시케의숲, 2022, 213쪽.)라고 평한 것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나가 ‘흑인’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발언은 다소 섬뜩하게 다가온다. 당신이 생명의 은인이라 할지라도 ‘시대’ 앞에서는 배려나 선의는 굴절될 수밖에 없다.”(문종필, 「#비건」, 『싸움』, 자이출판사, 2022, 00쪽.) 이처럼 특정한 시대는 한 사람의 시야를 가린다. 선량한 두 눈을 멀게 한다. 한 사람의 시야를 가리는 것을 넘어 시대 전체를 장님으로 만든다. 만약 누군가가 2024년에 ‘루퍼스’처럼 흑인에게 이런 무례한 행동을 했다면 어떨까. 그는 아마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할 것이다. 소설로 돌아와 마광수의 이런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시기에, 시대에 갇혀 있었던 많은 사람은 온전히 그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이해하거나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힘 있는 집단이 특정한 누군가를 힘 있게 누르는 과정에서 다수의 사람은 시대의 감각을 무의식적으로 흡수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한 개인은 지독하게 연약할 뿐만 아니라 힘이 없다. 그러니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감옥에 갇힌다. 저항하더라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외면당한다. 그의 말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힘 있는 집단의 판단과 선택이 엇나갈 때, 진실과 진리가 가려진다는데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시나 소설만이 검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렇지 않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 시인 김수영의 전집 표지,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표지, 영화 <시네마 천국> 이미지
어처구니없은 검열의 형태를 쥬세퍼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 <시네마 천국>(1990)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90년 영화라는 점에서 30년도 더 된 이 영화가 낡은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낭만적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검열의 풍경은 당시 사람들이 어리석은 것을 넘어 순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알프레도와 살바 토레(토토)는 영화관 영사실에서 일한다. 이 영화의 배경은 디지털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닌, 필름을 영사기로 직접 돌려야만 볼 수 있는 시대이다. 그곳에서 알프레도는 고독하게 일한다. 혼자서 일하는 것이 외롭다고, 같은 영화를 100번 이상 본다고, 부활절이나 성탄절 날 같은 휴일에도 일해야 한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그때 영사실에서 일을 배우고 싶은 토토가 좋은 것도 있지 않으냐고 묻자, 알프레도는 강경했던 처음의 태도를 바꿔 익숙해지면 할만하다고 한다. 사람들 보는 재미도 있고, 가득 찬 극장 안에서 관객들이 영화를 보며 웃고 우는 소리를 들으면 뿌듯하다고 한다. 영사실에서 느낄 수 있는 장단점 사이에서 이 두 명은 우정을 나누며 영화의 철학과 삶을 배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우정보다도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검열관에 의해서 삭제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삭제되는 장면은 다름 아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키스’ 장면인 것이다. 요즘 시선으로 본다면 키스처럼 시시한 것도 없을 테지만, 이런 사랑의 방식이 당대의 시대에서는 불건전한 것으로 간주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알프레도는 “키스를 너무 많이 하잖아!”라고 말하면서 영화 필름을 잘라낸다. 관객들 역시 “20년 동안 키스는 한 번도 못 봤어”라고 말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검열의 역사적 흔적이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그때에는 유별났다고 생각하니 당대의 분위기와 시대적 감성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그 당시의 사람들은 지금과는 다른 세계관과 사고를 갖고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니 우습다. 역으로 이런 진리가 조심스럽기도 하다. 조심스럽다고 말한 것은 내가 사는 시대 역시도 언젠가는 다음 세대들에 의해서 어처구니없는 풍경으로 묘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 <시네마 천국>은 토토의 추억을 어떻게 분배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즉, 검열과는 별개로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토토와 그를 영화의 세계로 인도했던 알프레도, 그리고 그 시절에 만났던 사랑하는 애인의 살결을 어떻게 떠나보낼 수 있을지 말하는 작품으로도 읽힌다. 토토의 엄마가 마지막 이런 대사를 던진다. “여기엔 추억만 두고 가라” 이 말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하지만 사회적인 측면에서 당대의 검열 풍경을 정확하게 담아냈다. 어린 시절 알프레도와 함께 오랜 시간 함께 일했던 토토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검열 때문에 삭제된 키스 장면을 보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영화 역시도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검열과 관련해서 한 시대의 검열을 감칠맛 나게 담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