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의 의도 (上) - 창작자의 의도와 차이, 이런 차이를 바라보는 만화계의 소비성 글
나의 글쓰기는 만화평론가가 아닌 문학평론가로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2017년부터 문학평론가로 데뷔해 글쓰기를 했다. 그런 내게 우연한 일이 생겼다. 만화평론 공모전에 데뷔해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며 만화나 웹툰을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2021년부터 원고료를 받아 가며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돈을 받으니 책임감이 생겼다. 모든 것을 편하게 쓸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런 내게 문학판에서 글을 쓸 때와는 조금 다른 미세한 ‘차이’를 느끼는 것은 필연이었다. 창작자가 자신의 창작 ‘의도’를 드러내는 것은 어떤 예술이나 모두 마찬가지라고 한다면, 각각의 장르가 가진 새들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문학 전공자였기 때문에 생긴 유익한 감각이었다.

△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는 책(언어), 만화, 영화 등으로 다양하게 재탄생되었다.
그런 내게 문학계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만화의 영역만이 가지고 있는 개념이라든 용어 또는 세계관 같은 것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IP(Intellectual Property Rights)’라는 개념이다. 이 용어는 한마디로 말해 자신의 고유한 ‘재산’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고 타인들에게 알리는 개념이다. 특히 이 개념은 웹툰을 거론할 때 자주 사용되는데, 순수한 웹툰 창작물을 다른 장르로 번역하거나 생산해내는 과정에서 활용된다. 대표적인 예로 작년에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화제작 『오펜하이머』(2023)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2차 대전 당시 인류의 가장 위험하고 잔혹한 ‘원자폭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당시 총책임자였던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시선에 무게를 두어 폭탄이 제조되는 과정을 담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영화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2022년 부천국제만화축제 ‘해외작품상’을 받은 <원자폭탄-2차대전을 종결한 잔혹하고 압도적인 무기의 역사>(레드리버, 2021) 역시 ‘원자폭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다뤘다. 어디 그뿐만이겠는가. 이 내용은 오래전에 전기 작가이자 저술가인 카이 버드에 의해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사이언스 북스, 2023)로 작업 되기도 했다. 즉, ‘원자폭탄’이 제조되고 만들어지는 과정을 ‘책’과 ‘만화’와 ‘영화’가 각기 자신만의 색을 내며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이럴 때, ‘IP’은 오펜하이머의 삶과 이야기가 처음 기록된 작품이 원작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는 창작자가 크게 영화를 받은 작품 자체가 활용된다는 의미에서 ‘IP의 확장’이라는 표현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동시대에 이는 매우 거세게 불어오는 폭풍이기도 한데, 또 다른 예로 강풀 작가의 화제작 웹툰 <무빙>이 드라마 『무빙』으로 확장된 경우를 생각한다면 IP의 확장은 동시대에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두 작품만을 간략하게 선보였지만, 동시대에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웹툰이나 만화의 IP 확장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지면에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웹툰 IP와 관련해서는 나 역시 여러 번 글을 썼을 뿐만 아니라, 이미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있어서 어떤 작품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는지 묻는 것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런 표면적인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창작자의 ‘의도’가 ‘IP’ 자체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원작 웹툰이 다양한 장르로 변주되고 번역된다는 점을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작자가 어떤 ‘의도’를 품고 작업하는지이다. 만약 이 ‘의도’가 사라진다면 그것은 창작물이기라기보다는 한때 유행했던 결과물을 복사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유행을 좇는 행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에게는 자신의 ‘의도’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생각해 보라. 만약에 어떤 창작자가 특정한 작품을 따라 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같은 작품을 복제해 만드는 성실한(?) 기능장의 임무일 뿐이다. 창작자가 창작자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의도’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존에 있던 예술 생태계에서 벗어나 새롭고 참신한 자신만의 문법을 독자들에게 설득할 수 있다.

△ <이것이 새입니까?> 표지
여기서 ‘설득’은 중요한데, 최근에 국내에 번역 출간된 <이것이 새입니까?>(바람북스, 2024)의 주인공 콩스탕탱 브랑쿠시(1876~1957)가 1926년~1927년에 겪었던 재판의 일화가 좋은 예가 될 듯하다. 즉, 브랑쿠시는 자신의 작품 「공간 속의 새」를 통해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의 움직임으로 추상적으로 담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동시대의 미국인들은 이것이 새의 모습과 닮지 않았다는 이유로 새가 될 수 없다고 단정 짓는다. 이에 예술가는 이것은 분명히 새라고 주장하며 논쟁이 일어난다. 이 일화는 예술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데, 진정한 예술이라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목소리 높이는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예술임을 증명하는 과정을 잘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브랑쿠시의 창조적인 예술가적 ‘의도’가 생략되었다면, 재현의 영역에서만 인정되는 예술만이 예술이라고 간주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있는 그대로 찍혀 있는 사진 속에는 수많은 사연이 그림자의 모습으로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처럼 ‘의도’는 새로운 세상을 열게 해주는 중요한 기능이다. 그렇다면 다시 ‘IP’ 이야기로 돌아와 창작자들은 같은 소재를 다루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차이(의도)’를 생성해 내는가. 이 물음에 답해보기 위해 우선, 칸 만화로 구성된 <원자폭탄-2차대전을 종결한 잔혹하고 압도적인 무기의 역사>(레드리버, 2021)가 어떻게 창작되었는지 작가의 목소리를 들어보기로 하자.
한 사람의 그림자…물론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영원히 박제된 하나의 그림자일 뿐. 그라운드 제로에서 250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폭발 즉시 사망하고 소멸된 신원미상의 그림자. 당시 나는 얼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나에게 그 그림자는 3년간 꿈꿔왔던 나라의 파괴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 순수함의 마지막이었을 수도 있다. 나는 두 가지 끈질긴 질문과 함께 박물관을 나왔다. 어떻게 이 지경까지 왔던 걸까? 그리고 이 그림자 인간의 사연은 무엇이었을까? 그때부터 나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책을 쓰고 싶었다!(디디에 알칸트(글), 드니 로디에(그림/만화), 로랑 프레데릭-볼레 저자(글), <원자폭탄>, 곽지원 번역, 레드리버, 2021)

△ 계단에 앉아 있던 사람이 엄청난 열선을 받으며 계단에 찍힌 검은 흔적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에 보전되어 있다. 사진은 나무위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서 인용했다. 이 장면을 보고 만화가는 언젠가 이 사연에 대해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한다.
“폭발 즉시 사망하고 소멸된 신원미상의 그림자”는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당시 은행 돌계단에 잠시 앉아 있던 한 사람의 흔적이다. 그는 엄청난 열과 폭발로 시체도 뼈도 남기지 못한 채, 그림자의 형태로 남게 된다. 만화가는 일본의 히로시마 평화 기념박물관에서 이 흔적을 목격하고 난 후, “평생 뇌리에 박혀 날 괴롭힐 것”(위의 책, 461쪽.)만 같았다고 고백한다. 독자들도 알겠지만, 만화가는 가슴에 박힌 이 흔적으로 인해 책을 만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원폭 피해와 관련된 트라우마는 만화가만이 특별한 감정이 아니다. 창작자뿐만 아니라, 당시 원폭 피해를 입은 선량한 일본 시민들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이 비극을 느끼고 가슴 아파했던 수많은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원폭과 관련해서는 이미 아카자와 케이지의 <맨발의 겐>(아름드리미디어, 2002)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그때 그 당시의 그림자 흔적이 강인하게 창작자를 움켜잡았다고 하더라도 기존의 창작자들이 그려냈던 방법으로 새로운 작품을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모방이나 표절로 의심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차이를 생성해 내야 하는 창작자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니 그렇다.
이런 고민 속에서 창작자는 다음과 같은 ‘차이’를 생각해 낸다. “그래서 우리는 원자폭탄의 결과보다는 개발로 이어진 사건들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피해자에 대해 느끼는 연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여전히 이들이 겪었던 일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리모토 나오키와 세발제전거 소녀의 운명을 통해 이들에게 충분한 경의를 표했길 바란다.”(위의 책, 465쪽.)라고 디디에 알칸트는 ‘후기’에 고백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텍스트에 펼쳐 보일 만화의 방향을 의도적으로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말해 창작자들은 아카자와 케이지의 <맨발의 겐>과는 차별화된 방법으로 원자폭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개발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그 당시 시민들의 연민을 모두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개발 과정에 무게를 두면서 몇몇 인물들을 설정해 시민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보완하기로 한 것이다. 이처럼 창작자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자신의 작품을 그리는지 파악하는 것은 중요할 뿐만 아니라, 창작자로서도 자신의 의도가 창의적인지 오랜 고민 끝에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것을 단순히 모방하려고 하는지 따져 물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어떤 의도를 품고 있을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참여한 첫 공식 도서>(제우미디어, 2021)에는 핵폭탄을 만든 인물인 오펜하이머를 떠올리며 “나가시키에 폭탄이 투하되고 8만 명에 가까운 인명을 앗아간 후 2년이 지난 1947년 11월 25일, 오펜하이머는 MIT에서 ‘현대 세계의 물리학’이라는 공개 강연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물리학자들은 원죄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이는 천박함, 유머, 과정으로도 없앨 수 없는 사실이죠. 그들이 상실할 수 없는 지식입니다”(크리스토퍼 놀란, 톰 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참여한 첫 공식 도서>, 제우미디어, 2021, 459쪽.)라고 말했던 오펜하이머를 떠올리는 발언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과학자들은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과학자로서 최첨단에 닿고 싶은 욕망과 이 욕망으로 인해 파괴될 수밖에 없는 윤리적인 선택 사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과학자들의 운명이고, 이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핵폭탄을 만드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오펜하이머는 갈팡질팡했다는 것이다. 이런 인물의 특징은 놀란 감독이 국내의 어느 한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선택을 매번 유보할 수밖에 없었던 ‘복잡한 인물’로 간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 입장에서 애정이 갔고 그런 인물을 영화로 재현하고 싶었다고 자신의 의도를 밝힌다. 즉, 그에게는 ‘원자폭탄’이라는 소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잡한 인간의 심리를 그 누구보다도 잘 재현해 낼 수 있는 인물이 오펜하이머라는 역사적 인물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 강풀의 작품 <조명가게>, <무빙> 등은 드라마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이처럼 우리는 같은 대상의 작품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 작가의 ‘의도’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이 된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확인하였다. 전혀 다르다고는 볼 수 없지만, ‘차이’가 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이런 차이를 숙지하고, 웹툰 IP의 변주를 살펴보면 어떨까. ‘웹툰’이 ‘영화’나 ‘드라마’로 변주된다고 했을 때, 혹은 ‘웹소설’이 ‘영화’, ‘드라마’, ‘웹툰’으로 변모된다고 했을 때, 우리는 같은 작품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적어도 예술적인 감각을 가진 창작자가 변주할 때는 같은 소재라고 해도 전혀 다른 작품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 ‘의도’를 읽는 작업은 하나의 ‘놀이’가 될 수 있고, 나아가 만화계는 이 놀이를 어떻게 표현하고 재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더불어 이 ‘의도’로 평론가들은 어떤 ‘놀이’를 할 수 있을까? 역으로 웹툰 IP의 변주와 관련된 연구물은 어떨까. 예를 들어 대만 영화 『청설』(2010)처럼, 2010에 상영된 작품을 누군가가 14년 후인 2024년에 새롭게 변주한 작품이 있다고 치자. 14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동시대의 감각도 창작자가 품고 있는 인식의 변화도 다를 테니, 2010년대의 세계관으로 담지 못했던 내용을 2024년에는 담아낼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평론가들은 그 부분을 찾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즐거운 게임과 같다. 하지만 우려가 되는 것은 이런 ‘차이’가 ‘논문’을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이 지점은 국내의 대학 시스템과도 만난다. 무엇인가 치열하게 기계처럼 실적을 증명해야 하는 대학이나 연구자의 강박이 이 ‘차이’를 의무적으로 소비하게 되는 것이다. 시대의 유행도 하나의 흐름이라는 점에서 비판할 마음은 없지만, 실적이나 어설픈 논문을 위한 글쓰기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화계는 이런 지점들을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