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의 의도 (下) - 신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의도’
최근에 출간된 텍스트 중에 눈에 들어온 작품이 있다. <11명의 시민 작가가 들려주는 ‘나 이야기>(호밀밭, 2024)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표지를 보면 작은 글씨로 ‘영산대 웹툰 학과 와이주툰 아카데미 시민작품집’이라고 적혀있다. 이 대목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시민’이라는 단어이다. 시민이라는 단어를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으나, 문맥상 만화를 그리지 않는 사람들로 읽힌다. 그러니까 이 책은 만화전공자였다고 해도 오랜 시간 만화를 그리지 않았거나, 만화에 대한 애정은 있으나 만화를 그려본 적이 없는 일반인들이 단기간에 만화를 그리는 프로젝트에 참여해 만화를 그려보고 그것을 책이라는 물질에 담아놓은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로 따지자면 이종은 감독의 『시인할매』(2019) 같은 작품이 예가 될 수 있다. 이 영화 오프닝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강점기 시대 즈음에 태어난 여성들은 전쟁, 가난, 남아선호, 사상 등 여러 이유로 학교 문턱을 넘을 수 없었던 사연으로 인해 할머니들은 한글을 배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이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는 프로젝트에 참여해 한글을 배우게 되고 나아가 오랜 시간 품었던 자신의 한을 글로 노래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과 결과물은 <눈이 사뿐 사뿐 오네>(북극곰, 2017)에 담기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2010)도 마찬가지다. 한 번도 시를 써보지 못한 할머니 미자는 우연히 듣게 문학창작 강좌 프로그램에 신청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한 편의 수준 높은 시를 완성하게 된다. 물론, 이 영화는 ‘죄(罪)’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특정한 장르에 대해서 잘 몰랐던 일반인이 창작자가 되는 여정을 담는다. 따라서 만화계에서도 이런 텍스트들이 등장한다는 것 자체는 반가운 일이다.

△ <‘나 이야기’>, 『시』, 『시인할매』는 모두 전문 창작자가 아닌 보통의 사람이 창작자가 되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텍스트의 내용은 어떨까. 이 작업을 이끈 선생님을 포함해 총 10명이 참여했다. 1부에는 이야기가 있는 작품을, 2부에서는 인스타툰을, 마지막 3부에서는 일러스트를 작업으로 채워져 있다. 이중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역시 ‘이야기’다. 이 글을 리뷰하는 것이 아니기에 모두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눈길이 갔던 작품은 이 프로젝트에 선생으로 참여한 최인수 만화가의 <아버지와 한 잔>, 정무구 시민의 <골든레인>이다. 전자는 비교적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뵙는 과정에서 나이 든 아들(?)과 젊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정겹게 담아낸다. 표면적으로는 어린 아버지가 귀엽다며 산소에 인사하러 온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게 되는데, 이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갔기 때문에 만들어진 만화적 설정이다. 이런 역설적인 상황으로 인해 몇 컷 되지 않는 만화는 무겁지만 짠한 웃음을 담아낸다. 나이 든 아들이 젊은 아버지에게 절을 하는 장면이라든지, 어린 아버지가 나이 든 아들의 볼을 당기며 “내 눈에는 평생 얼라지…”(하마탱 외 9명, <11명의 시민작가가 들려주는 ‘나 이야기>, 호밀밭, 2024, 18쪽.)라고 하는 장면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웃기지만 웃기지 않는 역설이 살아 숨 쉬는 짧지만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후자의 작품은 수십 년 전 남편이 먹고살기 위해 바닷일을 나갔다가 봉변을 당한 아내의 이야기를 담는다. 아내는 가슴 아픈 이 사건으로 남편을 잃게 되고 남편을 평생 기억하며 기다린다는 내용이 이야기의 골자이다. 물론, 이 책에 수록된 시민 작품이 모두가 좋았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은 오랜 시간 쉬지 않고 단련한 프로 만화가가 아닌 일반인이라는 점에서 책의 목적과 의도는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만 이런 사례를 통해 만화인들은 다양한 순기능들을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의 가능성을 믿어볼 수 있다. 우리는 만화를 위해 새로운 무엇을 계속해서 실험해 볼 수 있을까. 이 질문 역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 <민와일>, <밴더스내치>, <투명한 인간>은 모두 ‘게임’이라는 키어드를 작품에 활용한다.
앞서 시민이 참여한 만화의 순기능을 살펴보았다면 이색적인 창작자의 ‘의도’에 대해서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평범한 만화책이 아닙니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제이슨 시가의 <민와일>(중앙일보에스(주), 2023)이 그것이다. 이 텍스트는 한편의 게임을 연상하게 한다. 게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이야기의 흐름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이 텍스트 역시도 종이책에서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연출해 놓았다. 그런데 이러한 연출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미 여러 매체에서 실험되었다. 블랙 미러 시리즈 『밴더스내치』(2018)가 대표적이다. 드라마나 영화는 굉장히 수동적인 매체이다. 수동성이 워낙 강해서 폭력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멈추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멈춘 채 다음날 다시 볼 수도 있지만, 이야기의 흐름이 멈추면 감정은 손쉽게 휘발된다. 그래서 영상매체는 수동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고정관념을 이 작품이 무너뜨렸다. 드라마를 보는 과정에서 시청자들은 얼마든지 자신의 ‘선택’에 의해 달라지는 결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의도’ 즉, ‘선택’으로 인해 이야기가 바뀌는 ‘이야기’ 자체도 다양한 영역에서 실험된다고 볼 수 있고, 만화책에서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도록 만화가 제이슨 시가가 재구성한 것이다. 이런 ‘의도’는 창작자들과 비평가들을 주목하게 만든다.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새로움이라는 실험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창작자의 의도는 동시대의 게임 문화가 한몫하기도 했다. 과거에는 게임이 놀이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지만, 당대에는 이런 게임 자체가 하나의 예술적인 소통 도구로도 간주할 수 있다는 견해가 담론화되면서 게임의 장점인 선택 자체가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심대섭의 <투명한 남자>(로프 에디션스, 2021) 역시 본격적인 게임을 끌어와 자신의 의도를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텍스트 첫 장에서 “이 작품은 다양한 트리거 요소를 다루고 있습니다. 해당 트리거 요소에 민감하신 분은 감상을 삼가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힌 문구처럼, 다소 파격적인 작품이다. 물론, 나는 이 텍스트가 전혀 파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일반 대중들은 이 만화를 보고 불쾌감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여하튼 이 텍스트의 주인공은 악몽을 꾸면서 생활한다. 꿈속에서 다양한 환각들을 보며 힘겹게 하루하루 견딘다. 그런 주인공은 자신만의 탈출구를 찾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가 막노동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레지던시에 참여했던 어느 작가의 노트북을 소유하게 된다. 주인공은 그 노트북의 내용을 은밀히 확인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LUCID MAN’이라는 게임을 작가가 죽기 전에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게임이 무엇인지 호기심이 생긴 주인공은 작가의 게임을 실행한다. 그런데 이 게임의 내용이 문제적이다. 몸이 아픈 ‘다희’를 ‘삼촌’이라는 인물이 돌보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을 돌보는 게임이 특별하지는 않지만, 하체가 썩어가는 인물이 다희이고, 삼촌이 그녀를 돌본다는 설정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다희는 성적으로 매력적이면서도 미인의 요건을 모두 갖추었지만, 하체가 썩어나가기 때문에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상체만 보이는 유튜브 방송에서도 시청자들은 그녀의 상체만 보고 미의 기준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이 게임의 목적은 그런 모순적인 인물을 유쾌하게 돌보는 것이 아니다. 잘 돌보지 못한다면 게임은 비극적으로 끝나게 된다. 결국, 다희가 죽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화가는 이런 만화 속 게임 이야기를 설정해 놓음으로써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일까. 복잡한 구성을 통해 정말로 창작자가 의도한 것은 무엇일까. 표면적으로도 메시지가 잘 드러나지 않는데 방법은 없는가. 힌트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텍스트 속에 숨겨져 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작가가 게임을 만들었던 이유를 확인해 보면 작가의 숨겨진 의도를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혹시 그 친구가 개 키웠나요?
개? 강아지? 그랬지, 다리 못 쓰는 개, 보기 안쓰러워서 난 쳐다도 안 봤어.
그 친구 사고로 죽었다던데... 혹시 어쩌다가 그랬는지 아세요?
어~ 이사하는 날 그랬지, 우리가 여기서 더 못 산다고~ 우리 밭이니까~
육지로 돌아간다고! 그 배에서 떨어졌어. 젊은 총각이 불쌍해서~ 나도 울었어~(심대섭, <투명한 남자>, 로프 에디션스, 2021, 192쪽.)
즉, 작가에게는 다리를 못 쓰는 안쓰러운 반려견이 있었다. 어떤 사연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반려견을 오랜 시간 돌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다리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게임 속 가상 인물인 ‘다희’ 역시 하체가 썩는 병에 걸렸다는 점에서 반려동물인 개와 다희는 유사성을 갖는다. 그런데 문제적인 것은 다희라는 인물이 성적인 인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관능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는 표면적으로도 실제로도 그런 인물이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숨겨진 은유를 헤아려본다면 기표나 겉모습만을 중시하는 당대의 시대상을 비판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창작자는 이 사실을 비판하기 위해 당대의 성문화나 미의 잣대를 빌려온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어 이런 작가의 의도에는 기표만을 쫓는 우리의 인식을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더는 자신의 반려동물을 반려동물로 생각하지 않을 때, 길바닥에 유기해 버리는 것처럼 우리는 눈에 보기 좋은 것만을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작자는 독자들에게 당신은 이런 모순적인 인물이나 상황에서도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만화가 심대섭이 끌고 들어온 성적인 과격한 표현들은 하나의 반어적 장치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작가에게 의도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작품들은 독자들에게 여러 고민할 거리를 제공해준다. 창작자인 당신은 어떤 작품을 그리겠는가. 의도가 뻔한 재미있는 작품과 의도가 숨겨져 있어서 독자를 긴장시키는 작품 중 어떤 그림을 그리겠는가. 어떤 선택이건 간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이런 선택 자체가 당신의 정체성을 결정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