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풍선 없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 (上) - 1. 말풍선 없는 강풀의 〈어게인〉 9화
어쩌면 세상은 전부 만화인 것인지도 모른다. 산책하다가 우연히 만난 길 안내 화살표들, 목적지까지 무사히 데려다주는 교통표지판들, 급하게 화장실에 갔을 때 남녀 공간을 구분해 놓은 빨간색과 파란색의 고마운 이미지 표시들, 그밖에 언어가 아닌 무수히 많은 상징 이미지 기호들은 넓은 의미에서 모두 만화라고 볼 수 있다. 엄밀히 말해 만화는 아니지만, 만화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기호를 보는 사람에게 특정한 ‘상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상은 언어처럼 사회에서 정해진 약속일 수 있으나, ‘사물(대상)’과 ‘의미’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사물(대상)’을 보면서 의미를 생각하고, ‘의미’를 헤아리면서 ‘사물(대상)’을 상상하는 것이니 만화적인 소통과 닮았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9화에서는 만화에서 기본 중의 기본인 상상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만화에서 상상은 무엇일까.
많은 독자가 이미 숙지하고 있겠지만, 출판만화와 세로 스크롤 웹툰에서 상상은 칸과 칸 사이의 빈틈을 채우는 행위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말풍선의 역할은 칸의 빈틈을 메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고민해야 할 것은 상상의 영역이 극도로 치솟는 상황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말풍선 없이 만화(웹툰)가 스크린이나 텍스트로 재현되는 순간일 테다. 말풍선의 역할은 다양하겠으나 만화에서 말풍선이 없다면 독자들은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칸과 칸으로만 연결된 정보만을 바탕으로 만화의 스토리나 맥락을 상상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럴 때, 만화에서 상상의 영역은 극도로 증폭된다. 나아가 이런 상상의 지점은 독자들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배경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 〈북투어〉 초반부 5~15쪽
가령, 블랙 유머를 방법론으로 텍스트를 만든 애디 왓슨의 〈북투어(THE BOOK TOUR)〉(이숲, 2022)에서 주인공 프렛웰은 자신이 출간한 책 〈사라진 K〉을 홍보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떠난다. 그 과정을 만화가는 말풍선 없이 표현한다. 그렇다면 이 광경을 보고 독자들은 책상에 앉아서 혹은 침대에 누워서 프렛웰의 심정을 상상하며 공감할 수 있다. 타지역의 작은 서점을 돌 때, 어떤 느낌이었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고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흥미롭게 몽상할 수도 있다. 온전히 그가 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책을 홍보하러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한 인물의 설렘이라든지 기대감 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은 만화 이미지를 통해 전달되는 만화의 힘이자 능력이다. 문학이나 미술 그리고 음악도 마찬가지지만, 만화는 만화의 형식으로 독자들과 창작자에게 상상의 몫을 분배한다. 그러니 만화가가 만화를 잘 만드는 것도 일정 부분 중요하지만, 독자들이 해당 작품을 어떻게 읽고 얼마만큼 깊이 ‘상상’의 힘을 끌어내는지도 중요하다. 특정 작품을 읽고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거나 흥미를 잃는다면 만화의 의도는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역으로 만화가가 ‘상상’의 영역을 어떻게 하면 능동적으로 견인할 수 있는지 의도적으로 연출하는 것 역시 중요해 보인다. 아무리 훌륭한 서사라 하더라도 서사 하나만으로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만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것을 만화‘화’해 재현하는 것은 다르다. 이런 맥락에서도 만화가들에게 ‘상상’의 재현 능력은 값진 능력이자 실력이다. 나아가 독자나 평론가에게 있어서 이런 흔적을 분석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런 말풍선 없는 ‘상상’이 어떻게 재현되는지 확인해 보기로 하자. 여기서 잊지 말해야 하는 것은 웹툰과 만화책 등 수많은 텍스트가 이미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말풍선 없는 만화적 연출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만화가들은 초반 일부에 활용할 수 있고, 어떤 이들은 후반에 그런 연출을 사용하기도 한다. 순간순간에 이런 연출을 사용하는 만화가도 있겠다. 그러니 말풍선 없는 만화적 연출은 이미 수많은 텍스트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고 판단된다. 단지 이 글에서는 모든 순간을 움켜잡기보다는 말풍선 없는 만화에 무게를 실은 일부 작품에 대해서 논할 예정이다.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그런 장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소음(말풍선)이 적어지는 과정에서 ‘이미지’가 강조되기 때문에 이미지(상상)에‘만’ 집중하게 되니 그렇다. 그러니 이 글에서 이 지점을 다루는 것은 앞서 언급한 ‘상상’의 힘을 극도로 느껴보기 위함이다. 말풍선 없이 오로지 칸과 칸으로 이뤄진 만화를 통해 만화적 ‘상상’의 힘을 고민해 보기 위해서다. 우선 가장 먼저 살펴볼 만화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하고 유명한 웹툰 만화가 강풀의 〈어게인〉(2009년 6월 22일 ~ 2009년 11월 20일) 9화 ‘포지션(4)’ 편이다.

△ 강풀의 〈어게인〉 다음 표지
이 작품은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다. 불의의 사고나 대형 참사 등으로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한 존재들이 다음 생애에 다시 태어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웹툰이다. 다시 태어난 존재들에게는 한 가지 결핍(?)이 있는데 그들은 이전 생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존재(어게인)들은 누군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그가 죽으면 그와 연결된 누군가가 태어나고, 그와 연결된 누군가가 태어나면 그는 죽는다. 〈어게인〉은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그 인물의 중심에 어게인 박태민이 있다. 그는 유일하게 전생의 기억도 가지고 있는 독특한 ‘어게인’이다.
그는 ‘메신저’라는 초능력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다시 살아난 어게인들이 누군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능력이다. 그렇기에 박태민은 삶을 연장하려고 자신의 운명과 연결된 여린 존재들을 살해하게 된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어게인들을 찾아 그들의 생명을 연장해주는 대가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한다. 그가 이런 잔인한 목적을 이루려는 이유는 참사로 죽은 어게인인 자신의 동생을 곁에 두기 위함이다. 동생을 살리기 위해 그와 연결된 어린아이를 죽이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하지만 이 목적은 또 다른 초능력자들에 의해 저지된다. 박태민과 반대편에 서 있는 초능력자들은 참사를 미리 알 수 있어서 대형 사고를 막는 능력을 갖췄다. 시간을 멈추거나 미래를 볼 수 있는 예지력이 있기에 박태민의 잘못된 행위를 저지한다. 즉, 이 웹툰은 서로 다른 능력의 초능력자들끼리 부딪치는 과정에서 팽팽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웹툰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9화 ‘포지션(4)’ 편은 말풍선이 극도로 제한된다. 그렇다고 해서 말풍선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상상의 연결지점을 정밀하게 타격하기 위해 가장 적은 언어(말풍선)가 활용된다는 표현이 옳겠다. 전체적인 풍경을 그리는 데 있어서 말풍선은 노골적으로 배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배제된 내용은 어떻게 연출되는가.
박태민의 동생은 대형참사로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이 불운했기에 그는 ‘어게인’으로서 다시 살게 된다. 하지만 동생은 전생에 대한 기억이 없다. 자신을 아껴주고 챙겨준 사람이 악당(?) 박태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박태민은 동생과 다시 만나기 위해 끔찍한 일을 계속해서 벌인다. 여기서 끔찍한 일이란 자신은 물론 동생과 연결된 존재를 살해해 자신과 동생의 삶을 연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생과 연결된 존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사랑한 사람의 아이, 즉 자신의 아이이다. 이 지점에서 〈어게인〉의 짠한 역설과 사연은 시작된다.
이들 형제에게는 특별한 초능력이 있다. 박태민이 ‘어게인’과 연결된 존재들을 미리 알 수 있었다면 그의 동생은 ‘포지션’이라는 초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 능력은 안전한 장소를 찾는 능력이다. 이 초능력으로 인해 그는 어떤 재난이나 사건에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지키는 데 사용한다. 그리고 이 능력의 정점은 ‘인도네시아’에서 만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쓰인다.
그녀를 만나기 전 그는 인도네시아 반디아체에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편히 지내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 여기서 운명의 상대는 사랑하는 사람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이메 아즈라히라는 인도네시아의 한 여성이 그녀다. 이 둘은 언어가 통하지 않지만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우정과 사랑을 쌓는다. 그런데 어느 날 큰 재앙이 발생한다. 2004년 12월 6일 오전 인도네시아 반다아체에 ‘쓰나미’가 그곳을 강타한 것이다. ‘포지션’ 능력을 갖춘 그는 직감적으로 재앙이 불어닥친다는 사실을 알고 운명의 상대인 아즈라히를 탈출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다행히 그녀는 그의 도움으로 살아남게 된다. 바닷가 주변은 모두 망가지고 폐허가 된다. 그녀는 이곳에서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없다. 그러던 찰나 용기 내 고향을 떠나 한국으로 간다. 그녀가 한국으로 온 이유는 오로지 하나다. 그를 만나기 위해서다.
어떻게 보면 이런 이야기는 특별하다고 볼 수 없다. 외국인 여성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배우자가 사는 나라에 머물며 살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역도 충분히 가능하다. 외국인이 한국에 잠시 머물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한국을 떠나 그의 고향에 자리를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국적이 다르다는 점에서 소통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외국인을 보는 시선 또한 여전히 부정적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선택 속에는 위태로운 용기가 숨겨져 있다. 그러니 이국땅에서의 생활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독자들은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된다. 만화가 강풀은 이런 설정을 의도적으로 연출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런 연출 속에서 드러나는 언어 소통 문제에 무게를 두면서 불가능성을 한순간에 바꿔버리는 ‘사랑’의 속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말풍선 없음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랑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진실한 마음 자체이지 부수적으로 딸려 오는 ‘언어(조건)’가 아닌 것이다.

△ 출판본 〈어게인〉 9화 –포지션(4)의 일부
강풀이 이 모든 것을 의도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9화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만화가의 의도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진정한 마음이 있다면 언어의 장벽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을 호소한다. 이런 의도가 〈어게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게인〉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를 비유적으로 온전히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화가로서는 주절주절 연결되는 말풍선으로 사연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 장면에서 말풍선을 사용했다면 감동을 덜 할 수도 있다. 이런 만화적 연출은 그래서 빛이 난다.
그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인도네시아어를 모르지만, 사전을 뒤지면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그 말은 바로 ‘Aku cinta kamu(사랑해)’이다. 사랑한다는 말과 마음에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가 그녀를 그녀가 그를 믿는 것만큼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이런 관계를 흔들어야 하는 그의 형 박태민의 운명은 어떠한가. 동생의 운명을 자연스럽게 놔둘 것인가. 아니면 자신 곁에 동생을 조금이라도 더 두기 위해 동생이 사랑하는 인도네시아 아내와 아이를 지우겠는가. 〈어게인〉의 다양한 사연과 세계관을 모두 설명하지 못해 아쉽지만, 〈어게인〉 9화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말풍선 없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끓어내는 방법을 확인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때론 무수히 많은 말보다도 ‘침묵’이 더 위대한 것일 수 있다. 많은 말보다 적은 말이 효과적일 수 있다. 이는 만화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그렇다. 의도와 목적이 넘치면 컵에 담긴 물은 넘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