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풍선 없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 (下) - 말풍선 없음을 확장 시키는 만화
△ 〈이탈리아식 사랑 이야기〉 표지
그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볼 것은 공교롭게도 또 ‘사랑’이다. 지드루 메르베유의 〈이탈리아식 사랑 이야기〉(이숲, 2024)에서는 다양한 사랑 이야기가 단편의 형식으로 묶여 있다. 열정적인 사랑 이야기부터 사랑할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하는 퀴어의 사랑 이야기, 과거 특정한 사건으로 인해 사랑할 수 없게 된 한 소녀가 복수하는 사랑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가 포진되어 있다. 그중에서 말풍선 없음과 관련해 인상적이었던 단편은 바로 〈무한히 감사해〉 편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단편에서는 말풍선이 사용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일반 만화처럼 다양한 말풍선이 서사를 위해 펼쳐진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이 글에서 다루는 말풍선 없는 만화와 무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생각을 다르게 하면 꼭 그렇게 볼 수 없다. 그러니까 〈무한히 감사해〉 편은 ‘감사해’라는 말풍선이 무한 반복되는 과정에서 오로지 이미지만을 사후적으로 남게 하기 때문이다. ‘감사해’를 무한 반복하는 과정에서 사랑은 이처럼 고맙고 미안한 것임을 여과 없이 전달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작품은 말풍선 없이 만화가 펼쳐지는 형태라고 확장해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반복되는 하나의 ‘말풍선’은 작품 전부에 ‘리듬’을 기입해 배치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남는 것은 오로지 ‘감사해’ 뿐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지나치게 과잉일 수 있으나, 이 단편을 감상하게 되면 일상을 울리는 ‘감사해’라는 단어만이 주변을 맴돈다. 독자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이 울림으로 인해 말풍선(언어)은 모두 사라지고 ‘감사해’라는 침묵의 언어만이 귓가에 맴돈다. 그렇다면 독자들을 위해 어떤 형식으로 말풍선이 ‘감사해’라는 최소한의 언어로 축약되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신 눈 위에 있는 내 눈에... 감사해!
당신 입술에 포개진 내 입술에... 감사해!
신의 삶이 자리잡은 내 삶에... 감사해!
당신에게로 달려가는 나의 다리에...
당신을 향해 뻗는 나의 말에...
서로 주고받는 나와 당신의 웃음에...
감사해!
당신이 어루만지는 나의 가슴에...
당신이 정복하는 나의 숨소리, 당신이 길들이는 나의 배에...
당신이 부추기는 나의 욕망에
감사해!
내 팔에 안긴 채 깨어나는 딸에게...
어느 한순간 갑자기 커버릴 아이에게
내 손에 파묻힌 딸의 손에...
내 튼튼한 몸에,
내 부드러운 목소리에...
감사해!
그들의 웃음에, 그들의 노래에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에
일렁이는 내 마음속에 있는 이 모든 기억들에, 감사해!
당신의 살에 닿은 나의 삶,
당신의 옆에 기댄 나의 옆구리에...
사랑의 노래에 파둗힌
사랑스러운 나의 심장에...
당신의 가슴에 기대 잠든 나의 손바닥에...
당신과 결코 같은 것을 꿀 수 없는 나의 꿈에... 감사해!
당신의 무덤 앞에서 흘린 나의 눈물에...
나의 침묵에, 나의 피에
결국 내 몸에 흐르는 모든 액체에!
나의 심장에, 나의 신장에,
나의 간에...
결국 나의 모든 내장기관에!
나의 주름에, 나의 흰 머리에,
은밀히 생기는 나의 모든 고통에...
...이 모든 세월에, 감사해!
이 모든 것 그리고 다른 것들에, 감사해, 감사해, 나의 몸!
입술에 번지는 –아마 마지막일까?- 이 미소에...
어느 순간 갑자기
아이가 되어버린
아버지라는 이름에...
딸의 손에 파묻힌 나의 손에...
나의 삶에 이어진 그들의 삶에... 감사해!
한없이 감사해!
감사해, 감사해, 감사해....
위에서 인용된 수많은 ‘말풍선’의 목소리에서 알 수 있듯이, 누군가는 말풍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풍선이 없는 연출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르게 보이는 이 말풍선이 오묘하게 어울려 ‘감사해’라는 침묵의 언어로 최종적으로 환원된다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드루 메르베유는 ‘감사해’라는 말을 확장하면서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삶과 죽음의 과정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이 방법이 가능했던 것은 말풍선의 리듬이고 이 리듬이 언어를 지우는 역할을 한다. 형식은 다르지만 강풀의 〈어게인〉 9화에서 진행된 연출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한다는 ‘말’이나 감사하다는 ‘말’을 전달하기 위해 만화가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최선의 형식을 선택한다.

△ 〈이탈리아식 사랑 이야기〉 112~113쪽
이 방법이 의도된 연출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의 목소리가 온전히 들리도록 연출하는 행위는 값지다. 그러니까 말풍선을 사용하지 않고 말풍선의 침묵을 끌어오는 강풀의 방식과 리듬을 통해 많은 말풍선을 지우는 지드루 메르베유의 방식 모두 말풍선의 효과적인 운용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성공과 실패 여부는 독자(평론가)들이 결정하겠지만, 이 만화는 침묵의 연출로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만화에서 말풍선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니다. 오히려 말풍선의 유무보다도 어떻게 자신의 작품이 칸과 칸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느냐이다. 이 부분은 만화인들에게 다양한 만화의 형식을 고민하게 해준다.

△ 〈내 이름은 마리솔〉 표지
지드루 메르베유의 〈이탈리아식 사랑 이야기〉와 관련해 이 글에서 살펴볼 또 다른 만화는 이민자의 이야기를 다룬 알렉시스 카스텔라노스의 〈내 이름은 마리솔〉((주)푸른책들, 2023)이다. 이 이야기는 쿠바 역사에서 일어난 ‘피터 팬 작전’과 관련이 있다. 간략히 말해 1960년 초 쿠바에서 정권을 잡은 피델 카스트로의 억압적인 정책을 피하려고 수많은 아이가 미국에 이민을 떠나게 되는데 텍스트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다면 많은 부분 말풍선이 생략된 이 텍스트에서 어떤 지점들을 들여다봐야 할까.
이 작품에서는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민을 떠난 사람들의 복잡하고 불안한 심정과 그 심정을 언어가 아닌 만화의 형식으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대한 것이다. 이민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다. 공부를 목적으로 또는 사업을 목적으로 떠나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 언젠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은 ‘그곳’에서의 생활이 힘들다 하더라도 견딜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 돌아올 수 없는 이민은 맥락이 다르다. 고향에서 머물 수 없어서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밀려난 존재들은 여러 복잡한 감정을 품게 된다.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떠나야만 했으니 낯선 ‘그곳’에서의 삶은 힘겹다. 〈내 이름은 마리솔〉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하루하루 즐거운 일상을 보내게 되지만, 국내의 정치적인 혼란함으로 인해 미국에 이민을 급작스럽게 떠난 ‘마리솔’은 ‘그곳’에서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그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언어의 장벽이다. 미국의 모국어인 영어를 할 수 없으니, 미국에서 도착해 느꼈던 울분이나 서러운 감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 답답할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에도 기댈 수 없다. 그곳에서 마리솔은 주변에서 헛돈다. 그렇다면 이런 복잡한 감정을 언어가 아닌 만화의 형식으로 이 책의 작가 알렉시스 카스텔라노스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이 지점이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이자 핵심일 테다.
이 텍스트에서 말풍선이 하나도 사용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적재적소에 말풍선이 사용된다는 점에서 만화적 형식에서 말풍선을 모두 생략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텍스트를 읽어본 독자들은 상당히 많은 분량에서 말풍선이 생략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텍스트의 창작자는 말(말풍선)을 줄이고 이민을 떠나야만 했던 한 인물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하였는지 즐겁게 상상할 수 있다. 이 지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독자뿐만 아니라 만화창작자에게도 많은 도움이 된다.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이 작품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점이 바로 ‘색’ 자체이다. 칸과 칸으로 연결되는 미세한 연출은 만화가의 실력이나 노력으로 채워질 수 있다고 본다. 국내의 수많은 만화(웹툰)학과에서도 이런 연출을 가르칠 것이다. 그러니 이 부분은 중요성이 덜 하다고 볼 수 있다. 만화에서 기본 중에서 기본이 칸과 칸과의 긴밀한 연결 설정이라는 점에서 이는 특별한 만화적 형식이 아니다. 그런데 색은 다르다. 의도적으로 흑백으로 연출하는 만화가 아니라면, 웹툰의 창작환경에서는 ‘색’을 잘 활용할 수 있다. 자신의 원하는 색을 지우고 칠하는 것에 별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이런 색의 사용이 아무런 자각 없이 막무가내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 만화가들에게 이 색도 잘 사용하면 자신의 상황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유용한 도구이자 방법이 된다. 〈내 이름은 마리솔〉은 그런 지점을 잘 공략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식의 색 운용인가.


△ 〈내 이름은 마리솔〉 초반부에는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미국에 이민을 가야 했던
한 소녀의 우울과 서글픔을 흑백 톤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색이 있는 지점은 소녀가 고향에서
가지고 온 붉은 색의 작은 꽃이 유일하다.
이 작품은 쿠바에서 미국으로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부모님을 놔둔 채 이민을 떠나야만 했던 한 여성 소녀에 관한 이야기라고 앞서 서술했다. 그러니 이 작품의 주인공 ‘마리솔’은 급작스러운 선택으로 인해 미국에서 잘 적응하지 못한다. 창작자는 이러한 심정을 대변하기 위해 소녀가 미국에 도착한 시점을 기준으로, 미국 이후의 시간은 모두 흑백으로 처리한다. 소녀가 쿠바에서 가지고 온 부모님과의 소중한 추억은 식물(꽃)에 대한 기억이 전부다. 만화가는 이 지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소녀가 귀에 꽂은 꽃 하나만을 ‘붉은색’으로 처리하고, 이 색과 대비되는 ‘흑백’색을 통해 암울한 마리솔의 심정을 온전히 전달한다.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이 시점부터 천천히 이 텍스트는 다양한 색을 채워나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색이 채워지는 이유는 독자들도 어렵지 않게 짐작하겠지만, 미국에서의 적응을 의미한다. 언어도 학교 친구들과도 비틀어진 상황으로 인해 흔들렸지만, 마리솔은 힘겹게 버티면서 이곳에서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흑백의 공간에서 점차 ‘꽃’의 색으로 대변되는 다양한 ‘색’의 회복을 의미한다. 친부모님과 지냈던 과거의 시간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텍스트의 후반부에서는 다양한 색으로 텍스트가 꽉 채워진다. 텅 빈 흑백의 공간에서 다양한 색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말풍선을 최대한 절제하는 과정에서 색의 대비를 통해 이민을 떠나야 했던 가여운 ‘마리솔’의 삶을 재현한 것이다.
이런 순간을 읽으면 기억에 오래 남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인간에게 꼭 필요한 ‘침묵’의 시간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이민 생활의 어려움을 수많은 언어로 재현하는 것도, 그곳에서 살게 된 한 인물의 사연을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방식도, 의미 있는 방식이지만 언어 없이 그림으로만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무리가 없는 것이다. 이 지점은 회화(繪畫)의 영역과 동시에 생각할 수 있지만, 만화의 형식으로도 충분히 그런 감정을 재현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창작자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 〈내 이름 마리솔〉 후반부에서 소녀의 방은 점차 다양한 색으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이 텍스트의 마지막은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마리솔이 타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소개하는 장면으로 연출된다. “안녕, 나는 마리솔이야.”라며 자신의 이름을 이국의 언어로 말하는 장면은 여러 힘든 여정 속에서 당당히 일어난 이민자의 한 표정을 상징한다. 그다음 장면은 1965년 미국에 도착한 이후, 친부모님과 만나게 된 장면과 고등학교 무도회 때 사진, 고등학교 졸업 사진, 학업을 끝마치고 대학에 들어가 영어 교사가 된 마리솔의 사진, 결혼 후 자신의 딸을 낳은 사진, 그녀의 양부모님과 친부모님은 물론 온 가족이 함께 어울리면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독자들에게 여운을 남긴다. 이는 그녀가 미국에서 소외되지 않고 잘 적응하면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삶과 죽음의 여정이 녹여져 있다. 이런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 만화가는 말풍선을 최대한 줄이고 선과 색으로 칸과 칸으로 옮겨지는 만화적 형식을 선택했다. 동시대 예비 만화가들도 자신의 복잡한 심경이나 감정을 말풍선(언어) 없이 표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런 고민 속에 자신의 만화는 더욱 성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