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교육헌장
일찍 어머니를 여읜 소녀는 매정한 고모에게서 자라났습니다. 아버지는 큰 일을 위해 소녀 곁에 있어줄 수 없었습니다. 마음의 고통을 받고 자라난 소녀는 응달의 화초처럼 시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TV에 비친 아이돌 스타 ‘하이피치’는 소녀에게 희망을 가져다...
2003-10-21
김동연
일찍 어머니를 여읜 소녀는 매정한 고모에게서 자라났습니다. 아버지는 큰 일을 위해 소녀 곁에 있어줄 수 없었습니다. 마음의 고통을 받고 자라난 소녀는 응달의 화초처럼 시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TV에 비친 아이돌 스타 ‘하이피치’는 소녀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소녀교육헌장』은 평범하고 소심한 여고생 원아미가 대통령의 딸이자 영부인 대리로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내용이다.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자 유일한 딸 원아미가 영부인의 부재를 채워야 한다. 영부인 대리 자리를 노리는 속물 고모로부터 ‘퍼스트레이디’자리를 지켜야 하는 원아미. 일찍이 『별빛 속에』의 시이라젠느가 그랬듯이 때가 되어 숨겨진 비범함을 펼쳐야 하는 것이다. ‘오빠천국 불신지옥’ 빠순이 원아미가 할 수 있는 일은 천 명의 군중 속에서도 ‘릭’ 오빠를 찾아내는 능력뿐이다. 시이라젠처럼 초능력을 가진 것도 아닌 평범하고 무능해 보이는 원아미는 무엇을 가지고 싸워야 하는가? 바로 미디어를 이용하는 능력이다. 빠순이 생활로 잔뼈가 굵은 원아미는 타고난 방송체질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잘 생기고 능력있는 아버지와 아름답고 총명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원아미는 기본적으로 외모가 받쳐줌은 물론이고, 어린 시절 부유한 고모 집에서 어른들의 시중을 들어야 했던 혹독한 경험 덕분에 정숙한 숙녀의 예절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 거기에 본능적으로 ‘방송을 아는’ 원아미는 미디어를 타고 전 국민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셈이다. “나를 속였어. TV에서 봤을 때는 그냥 기와집인 줄 알았는데, 커다란 건물일 기와를 뒤집어쓰고 기와집인 척 하고 있어.” 한낱 립싱크 그룹의 포장된 모습을 사랑하던 빠순이가 청와대를 직접 보고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리고 나중에는 스스로 미디어의 이미지 포장 속에 몸을 맡기게 된다. 전작 『어느 비리 공무원의 고백』이나 『악마의 신부~사립 그노시스 특수목적고~』등을 봐도 임주연의 제목 선정 솜씨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소녀교육헌장』도 제목에서 오는 느낌이 강렬하다. 이 시대의 소녀들은 TV를 통해 감수성을 기르고 커뮤니티를 만들고 가끔은 스타가 되기도 한다. 그 소녀들을 위한 교육헌장은, 오빠들을 사랑하되 이성을 잃지 않을 것이며, 텅 빈 머리보다는 꽉 찬 비판능력을 키워야 함을 명시하고 있지 않을까? 신데렐라와 백설공주 모티브가 묘하게 어우러진 『소녀교육헌장』은 단행본 4권에 접어들면서 모든 갈등 요소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운동화를 신겨주며 왕자님처럼 등장한 강무현과의 사랑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조금씩 드러나는 인물들의 비밀. 『소녀교육헌장』 앞에 펼쳐질 이야기는 창창하게 남아있다. 임주연의 독특한 풍자와 패러디를 다음 이야기에서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