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인어공주
신화(神話), 설화(說話), 전설(傳說), 그리고 동화(童話)가 온전히 자신의 가치를 발휘하는 것은 그것의 사실(事實) 여부와는 무관하다. 일단 이것들을 모두 사실이라고 믿고 논의를 시작하더라도, 결국에 가서 이들 내용에 대해 개별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비과학적이고...
2003-09-30
양준용
신화(神話), 설화(說話), 전설(傳說), 그리고 동화(童話)가 온전히 자신의 가치를 발휘하는 것은 그것의 사실(事實) 여부와는 무관하다. 일단 이것들을 모두 사실이라고 믿고 논의를 시작하더라도, 결국에 가서 이들 내용에 대해 개별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비과학적이고 명확한 근거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정작 이런 옛 이야기들이 갖고 있는 영향력은, 인류 공통의 집단 무의식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는, 개별 개념들이 “상징”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예컨대 환웅(桓雄)과 결혼하여 단군(檀君)을 낳았다는 웅녀(熊女)는 신화에 속에선 본래 곰이었던 것으로 나오지만, 이런 내용을 액면 그대로 “곰이 쑥과 마늘만 먹고 백일 동안 동굴 속에서 햇빛을 보지 못하면 인간으로 변한다”고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곰과 동굴, 쑥과 마늘, 햇빛 등이 각각 개별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을 유추해내는 것이, 바로 이런 종류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에 있어서 첫걸음을 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데르센의 유명한 동화인 『인어공주』에서 모티브를 따온 듯한 이 작품 『21세기 인어공주』는, 이런 관점에서 대단히 억지스러운 이야기를 SF적인 상상력으로 무난하게 넘어가고 있는 만화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이 작품에서 주요 인물이기도 한 “루카”가 처음 등장하는 모습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에서 인어공주가 처음 뭍으로 올라온 장면과 거의 유사하다. 단행본 첫 페이지에서, 주인공인 “도현”이 어렸을 때부터 동화 『인어공주』에 대단한 애착을 가졌다는 설정 또한 “도현”이 “인어”라는 존재와 모종의 연관이 있으리란 걸 암시하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제목으로 보나, 설정으로 보나, “인어”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 같은데... 도대체 인어는 언제 나오는 걸까?... 하는 찰나에 기다렸다는 듯이 인어가 등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어”가, 이미 동화 속에 나오는 (이루지 못할 가슴아픈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어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명색이 인어일 뿐 외관상으론 그 흔한 지느러미조차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루카”를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해 보았을 때야 겨우 “부레”를 발견했을 했을 정도로 인간과 똑같은 존재인 것이다. 여기에 인어족의 선조가 우주 에너지를 발산하는 원석의 힘을 빌어 막강한 제국을 건설했다는 아틀란티스 사람들이었고, 잇따른 원석의 분실과 더불어 원석 자체가 힘을 잃어 가기 때문에, 환경 오염을 막지 못해 생겨난 변이종의 습격과 각종 괴질들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몰려 있다는 설정에 이르면, 이 만화가 이미 단순히 “동화”의 변형이나 패러디를 넘어 전혀 별개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이 작품 『21세기 인어공주』는 그레이엄 핸콕의 『신의 지문』이나 에리히 폰 다니엘의 『미래의 수수께끼』 류의, 단순히 가설을 나열한 SF(Science Fiction)에 속하는 것이다(물론 『신의 지문』이나 『미래의 수수께끼』를 논픽션(nonfiction)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분류를 하기엔 오히려 무리한 해석과 황당한 가설이 지배적이므로). 무엇보다도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작품들은 전설, 설화, 민담 등에서 실마리를 얻어 초(超) 고대문명(古代文明)이나 외계인 같은 것을 끌어들여 과학적인 설명이 힘든 것들에 대해 무리하게 설명을 한다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마저 불사하고 종족마저 초월하는 사랑으로 적당히 “순정”에 포함되기엔, 너무나 일이 크게 벌어졌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