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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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셜 D (Initial D)

‘인간의 역사(歷史)’는 곧 ‘경쟁의 역사’이다. 그리고 이처럼 단순한 형태의 진실은 사실 그다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생존을 위해 동물들과 경쟁하던 시기에서 벗어나, 사람들끼리 경쟁하는 시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언제부턴가 사람들 스스로 그들 사이의 그 모든 경쟁...

2002-12-01 양준용
‘인간의 역사(歷史)’는 곧 ‘경쟁의 역사’이다. 그리고 이처럼 단순한 형태의 진실은 사실 그다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생존을 위해 동물들과 경쟁하던 시기에서 벗어나, 사람들끼리 경쟁하는 시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언제부턴가 사람들 스스로 그들 사이의 그 모든 경쟁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이란 어떤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지적(知的) 능력에 관한 것이나, 육체적 능력에 관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누가 얼마나 더 똑똑하고, 누가 얼마나 더 육체적인 능력이 뛰어난가에 대한 관심은 시대를 불문하고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기계가 이러한 인간의 지적 능력과 육체적 능력을 대체하면서부터는, ‘누가 기계를 얼마나 더 잘 다루느냐’는 것까지 경쟁의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 모든 형태의 기계를 다루는 분야에서는 이러한 경쟁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만화 『이니셜 D』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자동차 경주’는 그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게노 슈이치의 이 작품 『이니셜 D』에 등장하는 자동차 경주는, 이른바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그런 것은 전혀 아니다. 자동차를 타고 도로가 잘 정비된 산을 내려오며 기록을 겨루는 ‘다운 힐(Down Hill)"이라는 이름의 경기가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는 이 만화에서, 주인공인 ’탁미‘는, 한때 지역 최고의 드라이버였지만 현재는 작은 두부 공장의 사장인 아버지의 훈련(중학교 때부터 5년 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동차로 두부를 배달하는 심부름)에 의해 최고 수준의 자동차 드라이빙 테크닉을 갖추게 된 고등학생으로, 본인 스스로는 운전을 잘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운전을 즐기는 것도 아니지만 우연한 기회에 다른 지역의 레이서와 부득이한 시합을 하게 되고, 이른바 ’팔육(도요타 AE86 트레노 레빈)‘이라는 구형 자동차로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며 레이싱에서 승리한 이후, 내로라 하는 레이서들로부터 숱한 도전을 받게 된다. 결투에서 승리한 무사에게 다른 무사들이 도전장을 내밀 듯. 약간 졸린 듯한 눈빛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1/10초, 1/100초의 긴박한 승부를 펼치는 주인공 탁미가 소수의 매니아 정도만 그 정확한 명칭을 알고 있을 법한 놀라운 드라이빙 테크닉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장면 같은 것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고등학생이라는 ‘황당한’ 상황 설정을 빚어낸 상상력의 기발함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엄청난 배기량의 자동차 엔진이 내뿜는 굉음과, 산꼭대기에서 급격한 커브 길을 자동차로 달려 내려가는 팽팽한 긴장감도, 어딘가 모르게 사람들을 긴장의 도가니로 몰아 넣긴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이 만화 『이니셜 D』또한 ‘뛰어난 주인공 → 뛰어난 라이벌 → 계속되는 대결 구도 → 대망의 전국제패’라는 구도를 크게 벗어나진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만화 [슬램 덩크]에서 볼 수 있는 멋진 덩크 슛 장면이나, 이 만화에 등장하는 박진감 넘치는 자동차의 모습은 그 효용에 있어서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 자신이 자동차 매니아로서의 역량을 맘껏 발휘하고, 독자들로서도 자동차 매니아로서의 자부심이 충만하지 않은 이상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이 만화는, 그래서 분량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보는 이로 하여금 이러한 작품을 가능하게 한 일본의 문화적 배경에 대해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게다가 주인공 탁미가 자동차의 성능을 넘어서는 놀라운 운전 솜씨를 구사해서 사람들이 우습게 보는 구형 자동차로 최신형 자동차를 탄 상대편을 매번 물리치는 모습은 아무런 사심 없이 짜릿한 감동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는 전통적인 흥행의 코드를 이 만화 역시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반증일 터이다. 엄청난 성능을 과시하는 라이벌들의 자동차에 맞서서 구형 자동차로 멋지게 상대하는 주인공 탁미의 모습은, 낡고 녹슨 칼 한 자루를 들고 석양을 등진 채 수많은 무사들을 상대하는 모습을 현대판으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