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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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게임

해적판(제목 ‘판타스틱 게임’)으로 큰 인기를 모은 후 1997년 서울문화사에서 정식 발간되었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돼 케이블 TV 투니버스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한 『사신천지서』에 빨려 들어간 강미주가 책 속 세계의 무녀가 되어 이세계(異世界...

2002-11-28 박소현
해적판(제목 ‘판타스틱 게임’)으로 큰 인기를 모은 후 1997년 서울문화사에서 정식 발간되었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돼 케이블 TV 투니버스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한 『사신천지서』에 빨려 들어간 강미주가 책 속 세계의 무녀가 되어 이세계(異世界)는 물론 현세계까지 구하게 되는 모험담을 그린 만화다. 이야기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 만화는 이세계의 모험과 유귀와의 사랑을 가장 중요한 두 축으로 놓고 있다. 미주에게는 주작의 무녀가 되어 세가지 소원을 빌어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이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녀를 도울 조력자들로 주작 칠성이 등장한다. 한편 미주 일행을 방해하는 세력으로는 미주의 절친한 친구였던 진아가 있다. 진아는 미주에 대한 사소한 오해로 인해 그녀를 적으로 돌리고 청룡 무리의 선봉장이 된다. 소원을 빌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무녀-사신과 인간을 매개-라는 역할에 비해 미주와 진아의 대립원인은 시시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만화는 이 오해를 대립구도의 핵심으로 설정하고 결말 부분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한편 『사신천지서』 속 세계 구성과 관련, 몇 가지 거슬리는 것들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키워드인 무녀와 연관되어 있다. 첫번째, 무녀는 반드시 처녀여야 한다. 순결한 여성만이 신성(神性)과 닿을 수 있다는 생각, 아니 애초 ‘순결한’ 이라는 단서는 은연중에 처녀성의 상실이 곧 어떠한 결핍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주 독자층이 여성 중?고등학생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특히 못마땅한 설정이다. 두번째, 소원을 다 빈 무녀는 사신에게 먹힌다는 설정이다. 첫번째 내용과 같은 맥락에서 소원의 대가로 여성은 자신의 몸을 바쳐야 한다. ‘먹힌다’는 것 자체가 성적 의미를 담고 있는 데다 그것이 순결과 닿아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짙은 순결 강박증을 읽을 수 있다. 청룡측에서 진아가 주작을 소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의 순결을 빼앗으려 한다는 내용이나 이를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온 유귀의 노력 역시 사랑의 진실성 보다 순결지상주의로 다가온다. 그렇게 소중히 지켜야 하는 것이 여성의 순결이다, 라는 공공연한 메시지는 구시대적 발상이다. 많은 순정만화가 스스로 여성을 한계지우고 편견을 답습하는 사례를 본다. 하기사 인간은 이성적인 판단 이전에 사회화 과정 속에서 스스로 불평등한 구조를 내재화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라는 단서를 붙이는 것은, 이 만화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수많은 이유들을 제쳐 두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만화가 가진 엄청난 위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만화는 재미를 위한 오락물일 뿐 아니라 인간―특히 청소년기의 사회화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교육 매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