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마 1/2
다카하시 루미코, 이 설명할 길 없는 막막함의 주인공, 과연 어떻게 그녀를 설명할 수 있을까, 또한 어떻게 그녀의 만화를 말할 수 있을까. 그녀와 만화는 모두 불가사의하다. 그녀가 포괄하는 만화를 일일이 열거해 보면, 심증은 점차 확증으로 바뀐다. 초자아 없는 인간들의...
2002-11-20
김상우
다카하시 루미코, 이 설명할 길 없는 막막함의 주인공, 과연 어떻게 그녀를 설명할 수 있을까, 또한 어떻게 그녀의 만화를 말할 수 있을까. 그녀와 만화는 모두 불가사의하다. 그녀가 포괄하는 만화를 일일이 열거해 보면, 심증은 점차 확증으로 바뀐다. 초자아 없는 인간들의 향연 『시끌별 녀석들』, 불멸에 허우적대는 『인어의 저주』, 어쩐지 힘을 잃어버린 『견야차』 등등. 정말로 불가사의하다고 말한다면 상찬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분명히 그녀는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제 살펴볼 『란마1/2』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괴이한 세계는 전작 『시끌별 녀석들』에서 예고된 바 있다. 우주인과 지구인의 로맨스, 그것도 끝없이 괴이하게 반복되는 로맨스, 하지만 언제나 웃기게 만드는 로맨스. 슬랩스틱 코메디의 진수를 『시끌별 녀석들』에서 확인하게 된다. 왜 하필 지구인과 우주인인가, 물어봐야 헛수고요 남는 게 없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인과 관계 없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베시시 퍼져 나오는 웃음이 물음을 희롱하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그에 간접적으로 대답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따져볼 계보의 맥락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청춘, 실마리는 거기서 찾아볼 수 있다. 『내일의 조』에서 목격했던, 꿈꾸고 사랑하며 실천하는 청춘, 역사와 사회를 짊어진 청춘,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 싸우던 청춘. 이 청춘의 문법은 『시끌별 녀석들』에서 여지없이 뭉개지고 있다. 청춘의 꿈을 표현했던 뜨거운 태양은 핑크 빛 연애의 배경으로 물들고, 청춘의 고뇌를 묘사했던 황혼의 무렵은 딱지 맞은 풍경으로 ‘밝게’ 빛난다. 이제 청춘의 어깨를 짓누르던 역사의 무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 그들을 충만하게 하는 것, 혹은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것, 오직 연애뿐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청춘의 흔적이라면, 모로보시가 지구를 지킬 용사로 뽑혔다는 점뿐이다. 『란마1/2』는 바로 그 뒤에 놓여, 지워진 청춘이, 또한 새로운 청춘이 들어서는 지점에 있다. 『란마1/2』는 『시끌별 녀석들』의 우주인과 지구인이란 이종 관계를 개인의 이종적 정체성으로 바꾸어 윤색한다. 이 같은 이종성은 매우 흥미롭다. 왜 다카하시 루미코는 ‘비정상인들’을 등장시키는 것일까. 그야말로 변신과 변태의 천국이다. 그런데 하나도 불쾌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유쾌하기 짝이 없다. 변신과 변태가 어우러져 ‘지루하게 반복해서’ 벌이는 연애 타령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즉 고정된 정체성을 조롱하면서, 그네들의 연애를 유쾌하게 반복해 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비남성적 시선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가부장 구조에서 형성되는 연애 이야기, 여기서 비롯되는 온갖 고정 관념들을 다카하시 루미코는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있다(이 측면이 반드시 페미니즘을 함축하진 않는다). 예를 들어, 철저히 소시민 남성의 환상을 『오 나의 여신님』이나 『러브 히나』를 비교해 보라. 이 만화들은 『란마1/2』처럼 웃기지도 않으며, 그렇게 웃길 수도 없다. 단지 ‘그랬으면’ 하는 욕망만 만족시켜 줄뿐이다. (물론 루미코의 좌충우돌 슬랩스틱 코메디를 구성하는 능력도 헤아려야 한다) 덧붙여 반복적 이미지도 루미코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녀의 캐릭터는 모두가 가족이요 친척이다. 물론 다른 만화에서도 유사한 그림의 계열을 관찰할 수 있다(이 점은 만화의 형식적 특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의 만화는 좀 ‘도가 지나치다.’ 그림의 구조적 특질이 유난히 비슷하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런 특성이 기묘한 정체성과 반복된 이야기에 맞아떨어지고 있다. 생각해 보라, 비슷한 인물의 비슷한 이야기에 비슷한 웃음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정말이지 다카하시 루미코만큼 반복의 묘미를 잘 살리고 있는 만화가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