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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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속에

87년에 시작해서 91년에 완결된 『별빛속에』는 김진, 김혜린, 신일숙 등과 함께 순정만화계에 골수팬 1세대가 탄생하게 한 강경옥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순정 만화 역사에 한 획을 긋는다. 우선 두드러지는 것은 이 작품이 순정만화의 궁극적 관...

2002-08-08 김정묵
87년에 시작해서 91년에 완결된 『별빛속에』는 김진, 김혜린, 신일숙 등과 함께 순정만화계에 골수팬 1세대가 탄생하게 한 강경옥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순정 만화 역사에 한 획을 긋는다. 우선 두드러지는 것은 이 작품이 순정만화의 궁극적 관심을 로맨스에서 로맨스 아닌 것으로까지 확장시킨 대표적인 만화라는 점이다. 물론 로맨스는 작품 내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레디온과 시이라젠느의 사랑과 레디온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독자들을 울렸던가. 그러나 로맨스 지상제일주의라는 당시의 순정 만화 풍토에서 이례적으로 작품의 초점은 사랑이 아니라 주인공의 성장에 맞춰져 있다. 후에 강경옥식 심리묘사라고도 일컬어지는 그녀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주인공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평범한 지구 소녀에서 갑작스레 카피온이라는 외계의 공주가 된 신혜(시이라젠느)는 오래도록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갈등한다. 특히 카피온이 블랙홀의 궤도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카피온을 구하느냐, 지구를 구하느냐는 주인공의 적(籍)을 결정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레디온과의 사랑도 로맨스만이 목적은 아니다. 레디온에게 있어 시이라젠느는 결코 넘봐서는 안될 신분의 여성이다. 따라서 그녀에 대한 사랑은 자신의 감정과 신분차를 두고 선택해야 하는 과제를 남긴다. 시이라젠느에게 있어 레디온은 지구에서의 기반을 모두 파괴한 장본인이다. 아버지를 죽게 하고 자신을 난데없이 카피온이라는 별로 끌고 온 사람이 레디온이다. 그녀가 레디온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아픈 과거를 정리하고, 카피온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사춘기의 청소년이 끊임없이 자아에 대해 묻는 과정과 닮았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따위의 녹록치 않은 의문. 이세계(異世界)로의 이동은 이러한 의문들을 극대화하는 기폭제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기억을 잃었지만 뭔지 모를 마음 아픔을 느끼는 시이라젠느는 험난한 사춘기를 거쳐 어른이 된 우리의 자화상쯤일까. 또 하나 가지 눈여겨 볼 것이 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연출이 그것이다. 두 페이지를 가득 메운 밤하늘의 별이나 주인공의 얼굴을 제외한 배경의 검은색 처리 등. 작가 스스로 먹칠하느라 고생했다고 밝혔듯이 이 만화는 유독 검은 색이 많이 나온다. 검은 색 배경은 독자의 시선을 압도함과 동시에 작품의 무거운 분위기를 배가시키는 기능을 한다. 만화가 글과 그림으로 구성된 매체인 만큼 그림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표현하느냐는 작품의 질을 좌우하는 한 요소다. 『별빛속에』는 내용과 그림이 잘 조화되어 만들어진 만화의 예다. 요즘 복간 붐이 일고 있다. 인기있는 작품은 종이 질이나 제본 수준을 높여서 소장용으로 만들어진다. 판매량에서도 높은 수익을 올리게 하는 효자가 명작 복간작이다. 어설픈 신작보다는 내용을 뻔히 알고 있다 해도 명작에 손이 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많은 독자들이 『별빛속에』의 복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