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플 하트
중세를 닮은 가공의 시대, 마녀와 요정이 나오고 저주와 마법이 가능한 곳, 예쁜 공주와 역시 "예쁜" 왕자가 모험하는 만화. 『퍼플하트』는 외견상으로만 바라보면 온갖 환상의 범람 속에 잘난 주인공들을 잘 버무려 놓은 그렇고 그런 순정 만화다. 전철에서 시간때우기로 혹은...
2002-08-07
이가진
중세를 닮은 가공의 시대, 마녀와 요정이 나오고 저주와 마법이 가능한 곳, 예쁜 공주와 역시 "예쁜" 왕자가 모험하는 만화. 『퍼플하트』는 외견상으로만 바라보면 온갖 환상의 범람 속에 잘난 주인공들을 잘 버무려 놓은 그렇고 그런 순정 만화다. 전철에서 시간때우기로 혹은 수업시간에 돌려가며 술술 넘기고 즐거울 만화. 무난하게 진행되는 페이지 넘기기 작업 "10분만 기다려, 금방 보고 줄게". 엇. 그런데 초반부터 제동이 걸린다. 주인공은 심장이 없는 공주란다. 심장은 온몸의 피를 순환하는 기관, 사람은 이것이 없으면 곧 죽는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반은 죽어있는 상태는 물론 아니다. 심장 하면 떠오르는 두 번째 이미지는 바로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으로 대표되는 온갖 감정들이다. "머리는 차갑게 그러나 마음은 따뜻하게"라는 말을 하면서 사람들은 뇌와 심장을 가리킨다. 감정이 뇌의 작용이든 영혼 고유의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을 심장에 비유해 왔다. 그리하여 심장이 없는 시릴 공주는 감정이 없는 공주가 되어 버렸다. 합리적인 사고는 가능한데 느끼질 못한다. 애정이나 미움 따위 뿐 아니라 자비심이나 욕심도 도무지 없는 공주다. 오로지 합리성만 가지고 있는 공주로서는 일반 사람들의 행동이나 생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1+1=2식의 명쾌한 논리밖에 가진 것이 없는 존재가 1+1=5가 되고 가끔은 4도 되는 비규칙적이고 측정 불가능한 감정을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두 측면을 이성과 감성이라고 할 때 반(半)이 없는 공주, "얘 인간 맞나요?" 일단은 답을 유보한 채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자. 이제 좀 편하게 넘어가나 싶더니 다시 발을 붙들린다. 이번엔 마녀의 아들 라하드다. 시릴 공주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서 장기를 떼어다가 만든 인간. 과학시대의 사이보그나 인조인간이 중세에 구현되었다. 그러나 한 마법사의 말대로 장기를 모아서 한 자리에 둔다고 인간이 되지는 않는다. 현재의 과학력에 준하는 마녀의 마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애초 모체를 통해 육체가 만들어지지 않은 인간에게는 온전한 자기 것은 없다. 팔 하나를 사고로 잃은 사람을 우리는 물론, 인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라하드는 다르다. 부분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애당초 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껄끄러운 조각 모음이다. 그러나 라하드는 감정을 가지며 생각을 한다. 남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만 시야에 들어온 세상을 아름답다 느낄 수도 있고 그 속에 나무는 몇 그루 라는 식으로 분석할 수도 있다. 물론 느끼는 것은 시릴 공주의 심장 때문이다. 그러나 시릴 공주라는 존재가 심장 없이도 버젓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라하드라는 존재의 정점에 있는 것은 어쨌든 라하드다. 시릴 공주의 분신 따위는 분명 아니다. 그렇다 해도 "얘 인간 맞나요?" 겨우 2권까지 나온 만화에 두 번이나 발이 묶였다는 것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다. 인간 역사의 시작부터 제기되었으나 현재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 인간은 무엇인가, 감성을 빼면 인간이 아닐까?? 이성은? 육체는? 영혼이라는 것이 정말 있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일까. 완결은 안났지만 어쩐지 짐작할 수 있을 듯 하다. 시릴을 비롯해서 장기를 빼앗긴 인간들은 결함이 있어 불행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육체는 "나"를 규정하는 근간이 된다. 그러나 모든 장기를 그러모아 만든 라하드는 저절로 인간이 되지는 않았다. 그가 어쨌든 생각하고 느끼는 하나의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마녀의 마법 덕분이다. 마법이라 불리는 그것(영혼인지 무언지 모를) 역시 "나"가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하나도 빠지지 말 것, 이 모든 것이 다 합쳐져 인간이 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