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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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나라

순정만화의 역사 속에서 여전히 대작으로 빛나는 만화 『바람의 나라』를 작은 지면에 모두 풀어놓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작품 내용 자체가 방대하고, 그것이 만화계에 끼치는 영향이나 의미도 크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는 작품이 기대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작품과의 관계에만 한...

2002-08-07 김규진
순정만화의 역사 속에서 여전히 대작으로 빛나는 만화 『바람의 나라』를 작은 지면에 모두 풀어놓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작품 내용 자체가 방대하고, 그것이 만화계에 끼치는 영향이나 의미도 크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는 작품이 기대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작품과의 관계에만 한하여 논하기로 하자. 이 작업도 충분히 작품을 이해하는데 의미가 있다. 『바람의 나라』는 작품 외적으로도의미하는 바가 크다. 순정만화는 대개의 여성 작가 소설이 그러하듯, 자기독백적이고 내면의 이야기에만 안주한다는 편견 앞에 당당한 것이 바로 이 만화이기 때문이다. 흔히 순정만화를 비난할 때 동원되는 논리 중 하나는 작가가 게으르다는 착각이다. 상상만으로 존재하지도않는 세계를 건설하고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주인공들이, 역시 현실에서는불가능한 사랑으로 울고 웃는다는 편견은 오래도록 순정만화 독자들과 작가를 괴롭혀 왔다. 그러나 누가 감히 『바람의 나라』를 두고 게으르다느니, 근거 없는 상상이라는둥 비난을 가할 수 있을까. 『바람의 나라』는 한국 만화 전체를 통틀어 무엇보다 고증에 충실한 만화다. 작가는 참고가능하며 사료적 가치가 인정된 사서를 이용해 한국의 고대사를 완벽히 재현해 냈다. 물론 우리 나라 고대사는 베일에 쌓인 부분이 많은 만큼 구멍이 많다. 작가는 역사적 사실로 뼈대를 삼고 살까지 붙인 후 군데 군데 빈 구멍에 상상력을 동원해 생명을 불어넣었다. 『바람의 나라』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과, 사건은 모두 [삼국사기]에 나오는 것이다. 이를 시간 순으로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세류와 날개 달린 이의 결혼, 도절·해명태자의 죽음, 한의 왕망에 의한 연비의 죽음, 무휼의 학반령 전투 승리, 괴유, 마로와의 만남, 부여와의 전투와 대소왕의 죽음, 호동과 낙랑공주 등은 모두 삼국사기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내용이다. ([삼국사기]권 제 13 고구려본기 참조) 할머니의 귀신이 들린 해오녀의 경우, 『바람의 나라』에서는 對부여전에서 퇴각시 부여군의 퇴로를 맡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는 [삼국사기]에서 대무신왕이영험한 솥을 주웠다가 퇴각시에 잃어버린다는 기사를 각색한 경우다. 또한 무휼의 북벌에의 꿈, 이에 대립하는 해색주의 국가상은 [삼국사기]에서 나타나는 그들과 일치한다. 본 작품에서 중요한 무기이지 등장인물인 신수(神獸, 무휼의 청룡, 세류의 주작 등)은 고구려 당시의 사신(四神) 개념을 응용한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작품은 결말까지 이미 예고되는 약점을 가진다. 극적인 반전이나 다음 전개를 기다리는 흥미진진함은 창작품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작품의 재미와 긴장을 유지하기 어렵기에, 초반부에는 거창하게 사료를 인용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작가의 상상으로 내용이 변질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많은 사극 드라마들이 역사를 제멋대로 각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기에 김진의 역량은 더욱 빛난다. 작가의 세계는 정해진 역사적 사실 속에 잘 용해되어 있다. 사료에 묘사되는 그대로의 인물들이지만 하나 하나가 다층적인 정신세계를 가진 인간으로 재현되었다. 연출에 있어 내용의 시간적 순서를 뒤섞는 등의 노력으로 작품의 긴장도 늘상 팽팽하다. 아니 시간순으로 전개된 사건일지라도 긴장감은 창작품의 그것에 비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92년연재를 시작해 연재와 중단을 반복했지만 여전히 많은 독자들이 이 만화를 기다리고 있다. 필자 역시 다음 권을 고대한다. 결말을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