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세바스찬입니다
깊은 밤, 음침한 고성(古城)을 배경으로 한 마리 박쥐가 날아간다. 뿌연 안개 속에 쌓인 그 성에는 오랜 옛날부터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살아가는 이는 있다. 밤이면 관속에서 나와 사람 냄새만을 기다리는 그는 붉게 충혈된 눈을 가지고 있다. 잔혹해 보이는 송곳니 너머로 ...
2002-07-31
김정묵
깊은 밤, 음침한 고성(古城)을 배경으로 한 마리 박쥐가 날아간다. 뿌연 안개 속에 쌓인 그 성에는 오랜 옛날부터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살아가는 이는 있다. 밤이면 관속에서 나와 사람 냄새만을 기다리는 그는 붉게 충혈된 눈을 가지고 있다. 잔혹해 보이는 송곳니 너머로 위험한 웃음을 띄운다. 드라큐라를 떠올리면 먼저 이와 같은 음침한 분위기부터 연상이 된다. 그의 눈빛에 압도된 인간들은 결국 그에게 희생당한다. 희생자들은 다시 새로운 흡혈귀가 되어 인간의 피를 원하게 된다. 대부분의 영화나 소설에 등장한 드라큐라의 모습은 이처럼 인간과 적대적이며 십자가와 태양 빛을 두려워하는 인물로 그려져왔다. 심혜진의 『안녕하세요 세바스찬입니다』에 등장하는 드랴큐라 백작은 이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큐라라는 캐릭터의 기본적인 특성, 즉 피를 먹고 산다는 사실에 반기를 든 것이다. 작품 속에서 백작은 토마토를 먹고 살아간다. 따라서, 피를 먹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백작이 인간을 두려워한다. 피를 먹지 않는 드라큐라라는 설정 이외의 요소들은 모두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오래된 성에서 살고 있으며, 낮에는 관속에서 빛을 피해 잠을 잔다. 인간의 피를 먹지 않으니, 괴기스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스토리가 진행되기 위해서 무언가 새로운 계기가 필요하다. 여기에 작가는 세바스찬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데려온다. 드라큐라 백작의 비서이자 성(城)의 집사로서 세바스찬은 작품에서 큰 비중을 가진다. 밤에는 까마귀이지만, 낮에는 인간의 모습을 가지는 그는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 불만이 많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그 수고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간대가 대개 밤이니 인간의 모습보다는 까마귀로 나올 때가 많다. 작품의 제목을 『안녕하세요 세바스찬입니다』 라고 지은 걸로 미루어 무언가 그에게 대단한 임무를 부여할 것 같지만 그것도 아니다. 그저 토마토가 묻은 드라큐라 백작의 옷을 빨고, 성을 청소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드라큐라 백작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대상이 세바스찬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외롭고 고독한 성(城)생활에서 드라큐라와 소통이 가능한 존재는 세바스찬 뿐이다. 세바스찬이 있기에 작품은 진행되고, 드라큐라의 외로움은 대화가 되어 흘러나온다. 세바스찬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투덜거리면서도 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는 백작을 보필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안녕하세요 세바스찬입니다』에서 주인공이 되는 인물은 드라큐라임에도 불구하고 세바스찬을 제명으로 가져온 것은 그 역할에 부여된 크기 때문이다. 주연만큼 중요한 조연이라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필요하다. 작품을 유쾌하게 이끌어가던 세바스찬이 까마귀에서 인간으로 변하는 시점은 주인공이 드라큐라에서 세바스찬으로 바뀌는 때이다. 즉, 관속으로 잠을 자러 들어가는 드라큐라 대신 세바스찬이 극(劇)을 이끌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늘 없이는 실도 무용지물. 인간의 모습으로 외롭게 지내는 시간보다 까마귀의 모습으로 백작과 투닥거리며 보내는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과 까마귀의 대조가 아니다. 작가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바는 혼자서 외로운 시간보다는 조금 싸우더라도 함께 있는 것이 낫다는 사실이다. 혼자 존재하는 것보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 작가는 『안녕하세요 세바스찬입니다』에서 음험하고 괴기스러운 모습 대신에 유쾌하며 재미있는 드라큐라 백작을 가져왔다. 그것은 세바스찬이라는 보조적인 캐릭터가 있었기에 가능하다. 주연을 빛나게 하는 조연, 그것이 세바스찬에게 맡겨진 역할이였다. 사람들 모두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두 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세바스찬처럼 자신에게 맞는 역할은 주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