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땅
레드땅(Lair du temps)은 니나리찌가 만든 ‘시간의 공간’이란 뜻을 지닌 향수 이름이다. 그 레드땅의 향이 짙게 벤 초대장을 받은 라드는 내키지 않는 초대에 응하게 되고 프랑스의 부호 에르브 그란데이 백작의 별장에서 일주일간 머물게 된다. 백작의 호화로운 생일...
2002-07-30
장하경
레드땅(Lair du temps)은 니나리찌가 만든 ‘시간의 공간’이란 뜻을 지닌 향수 이름이다. 그 레드땅의 향이 짙게 벤 초대장을 받은 라드는 내키지 않는 초대에 응하게 되고 프랑스의 부호 에르브 그란데이 백작의 별장에서 일주일간 머물게 된다. 백작의 호화로운 생일파티에서 가수인 라드가 부를 축가 또한 레드땅이다. [눈을 감고 비스듬히 고개를 누이면 추억이 흘러옵니다. 아련한 노래소리, 멀어지는 세상의 소리. 나의 손, 나의 입술, 나의 가슴, 나의 몸에는 추억이 넘쳐흐릅니다. 시간을 넘고 넘어 향기는 나의 몸을 감쌉니다. 추억의 향기는 레드땅] 몽환적인 이 노랫말이 작품 전체에 퍼지며 신비로운 유령소녀 르센이 갇혀있는 ‘시간의 공간’속으로 점차 빠져든다. 라드 앞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소녀 르센은 라드를 ‘에르’라는 인물로 착각한다. 라드는 자신의 죽음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르센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그란데이 백작과 관련이 있음을 직감한다. 르센과 그란데이 백작의 관계를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40여년 전 백작의 음모에 묻혀버린 진실이 밝혀진다. 『레드땅』은 유령소녀 르센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풀어가면서 추억이라는 향수에 감춰진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끄집어낸다. 작가는 이미 시작부터 많은 단서를 보여주고 출발한다. 깎아지른 절벽의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떨어지면 끝장이겠어’라고 하는 라드의 대사와 그가 자동차광이라는 설정(라드가 자동차광임을 강조하는 대사가 여러번 나오지만 사실 이 작품 전반에 그가 자동차광이라는 설정은 중요하지 않다.), 매니저가 그란데이 백작을 소개하면서 그를 녹색 눈에 금발이라고 말하는 부분, 그리고 레드땅-백작이 레드땅을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레드땅의 뜻과 관련된 듯 하다. 사실 이런 단서들은 대부분 놓치고 출발하게 된다. 또한 굳이 단서를 찾아내 미스터리를 스스로 풀어볼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레드땅』은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상황전개보다 의문이 풀려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캐릭터의 심리가 바로 작품을 이해하는 키워드이기 때문이다. 치밀한 구성안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캐릭터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서로 물려있는 감정의 끈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인간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작가의 시도는 그 빛을 발하며 강경옥 특유의 작품세계로 강하게 흡입된다. 『레드땅』의 또 다른 묘미는 강경옥의 그림체에 있다. 흔히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로 가장 적당하다고 하는 강경옥의 간결한 캐릭터는 공포물에서도 그 진가가 드러나는 듯 하다. 『레드땅』이 공포물은 아니지만 마지막에 보여지는 르센의 클로즈업 장면만은 전반에 보여졌던 신비롭고 천진한 모습과 대조되면서 섬뜩한 충격으로 남는다. 『레드땅』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94년 단행본(대화)으로 출간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던 작품이다. 87년 「로망스」라는 잡지에 연재를 시작해 연재 2회만에 중단됐고, 몇 년 후 다른 잡지에 연재되지만 잡지 폐간과 동시에 마지막회분 원고마저 분실됐다고 한다. 결국 분실된 30페이지를 다시 그려 단행본이 나오긴 했지만 8년여의 시간이 걸린 이 작품은 작가의 말처럼 강경옥의 그림 변천사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책이 되고말았다. 간혹 장편물에서 볼 수 있는 작가의 그림 발전과정을 120페이지 분량의 단편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한국의 만화가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의 폐해로만 미뤄놓을 수 없는 한국 만화계의 중요한 사안중 하나다. 지금도 수많은 작가들이 잡지사들을 옮겨다니며 위태롭게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겪고 있는데, 이는 새로운 시스템이 개발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끊임없이 반복되며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갉아먹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